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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75화 (75/175)

제75화

설마 시스템창에 오류가 생겼나 싶어서 다시 한번 더 확인해 봤지만, 내 눈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일전에도 탑을 등반하면서 샘물을 발견했었다.

아마 그때가 23층을 등반하면서였었지?

그때와 주변 환경은 많이 변했으나 샘물은 내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놀랐나 보지? 하긴 플레이어는 이곳을 보는 건 처음일 테니 놀랄 만도 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자, NPC 중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사실 놀란 부분은 그 탓이 아니지만, 굳이 반박하진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수습하곤 NPC들을 되돌아봤다.

“그래서 너희가 말한 곳이 여기야?”

“맞아. 도착했어.”

내 의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기가 가득한 주변 풍경을 보고 놀랐다고 여겼는지,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입을 뗐다.

“놀란 만도 하지. 여긴 샘물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로부터 조성된 장소거든. 웬만한 곳을 둘러봐도 이 정도로 생명력이 가득한 곳은 찾기 힘들걸.”

확실히.

그녀의 설명대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주변 경관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으리라.

하나 나는 미심쩍은 눈길을 감추지 못했다.

본래 탑은 층마다 각기 다른 환경과 컨셉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다른 층에서도 봤던 지형물이 여기에도 그대로 존재한다고?

23층과 26층.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여기에 있는 샘물은 26층 말고도 다른 곳에 있어?”

“어? 갑자기 그건 왜? 음… 그러게 링링이면 모를까. 우린 다른 층의 NPC들하고 소통하는 주의가 아니라서 다른 곳은 잘 모르겠네.”

그녀는 침음을 흘리며 애매모호하게 대답한다.

혹시나 싶어 다른 NPC들을 살폈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모르는 눈치인 듯싶었다.

묘한 시선으로 샘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이었다.

⎯⎯⎯!!

주머니의 안쪽에서부터 강한 진동이 느껴진다.

생각지도 못한 울림에 주머니 속에 팔을 깊게 찔러 넣자 묘한 물체가 집혔다.

손에 집히는 물건을 아무렇게나 꺼내자, 새하얀 섬광을 발하는 로자리오가 손에 쥐여져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문득 떠오른 기억에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예전에 성녀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준 거였지.’

받아 두면 요긴하게 쓸 일이 있을까 싶어서 넣어 뒀는데. 그동안 탑을 등반한다고 바빠서 새하얗게 잊고 있었네.

손에 쥔 로자리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을 훤히 밝힐 정도로 점멸한다.

광량의 밝기가 심해지자 NPC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끌린 어그로.

더이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전에 포켓에 수납하려는데, 로자리오가 내뿜는 광량이 더욱 커진다.

이윽고 내 손아귀를 벗어난 로자리오는 공명음을 내며 샘물 쪽으로 다가갔다.

우웅⎯!

마치 의식을 가진 듯한 모습.

그러던 도중이었다.

지금까지는 경견할 정도로 고요하던 샘물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나만 이상하다고 여긴 것은 모양인지.

이를 지켜보던 NPC 중 한 명은 손가락을 덜덜 떨면서 샘물을 가리켰다.

“자, 자네 저게 뭐길래. 샘물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가.”

“…….”

그의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야.

‘나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알았으면 물어보지 않아도 대답해줬지.

저게 도대체 왜 저러는지는 내가 더 알고 싶을 정도다.

그러는 와중에도 로자리오의 공명음은 강해졌으며 샘물에서 샘솟는 거품의 양은 많아졌다.

공명음이 절정에 다다르자 샘물의 중앙에서 튀어나온 새하얀 빛무리가 로자리오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성물이 표식을 연속으로 발견함으로써 우연이 아니라 간주합니다.〉

〈성물에 성신의 권능이 깃듭니다.〉

- 전체 수집률: 3%

〈성신 카르텔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모로 입 대고 싶은 건 많지만, 사소한 건 전부 제쳐 두고.

성신 카르텔.

분명 내 기억이 맞다면 23층에서 성녀가 모시던 신의 이름이었다.

한때는 사이비이겠거니 생각했었는데.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거였다고?’

심히 당황스럽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적당히 포교 활동이나 할 것이지, 부담스럽게 왜 나를 주시한다는 거야?

그것만이 아니다.

나는 체념 어린 눈길로 로자리오를 바라봤다,

고작 3%라는 미미한 수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로자리오에서 느껴지는 힘은 터무니없었다.

만약 수집률을 전부 채우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돋는 기분이다.

하지만 혹하는 일은 없었다.

정체도 뭣도 모르는 물건을 위해서 움직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세상에 누가 봐도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물건을 떠안는 바보가 어딨어.”

골칫거리를 안는 건 탑 하나면 족하다.

다른 요소는 사양이다.

나는 눈을 흘기며 로자리오를 포켓에 수납했다.

로자리오를 수납하고 나서야 공명음이 끊기며 샘물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상황이 한차례 진정되고 나서야, NPC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도대체 뭔 짓을 벌인 거지?”

“설마 성물에 독을 탄 건….”

“그렇다고 해도 성물에는 딱히 이상이 없는 거 같은데?”

NPC들은 하나같이 황망한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곁으로 보기엔 분명 샘물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거 같은데 그렇다고 하기엔 변한 것이 없다.

추궁하기에는 이렇다 할 명분이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묘한 침묵이 이어지던 도중이었다.

쿠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감각이 예민한 사람만 느낄 정도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진동의 세기는 점점 커졌다.

예상 밖의 사태에 NPC들은 숨을 죽인 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뭐야? 지금 너도 느꼈어?”

“그 말은 너도….”

“그럴 리가 없는데? 샘물의 근처에서는 지형이 바뀌는 일이 없었잖아.”

NPC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저마다의 추측을 내세웠다.

얼핏 느끼기에는 지형이 바뀌기 직전의 전조 현상.

뭐,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건 없다.

나한테서 예사롭지 않은 촉을 느꼈는지 그녀는 눈가를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너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지? 설마 아까 전에 벌인 일과 관련 있는 건….”

“아아, 착각할까 봐. 싶어서 미리 말해 두는데 그건 아냐.”

“…….”

단호하게 부정하자, 그녀는 당황한 낯빛을 보였다.

“보니까 지면이 흔들리는 이유가 궁금한 거지? 너무 애타게 기다리지 말고 잠자코 있어 봐.”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두고 보면 알게 될 테니까.

뒤이은 내 말에 그녀는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 대한 반박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 보였으나 그녀는 차마 입 밖으로 의문을 내뱉지 못했다.

그보다도 먼저 이변이 들이닥쳤기 때문에.

콰광!

불과 수십 미터 떨어진 장소로부터 거대한 모래 폭풍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한 진동이 울렸다.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육중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살 떨릴 만한 살기에 나는 검을 빼 들었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던 NPC들도 각자 무기를 꺼내 든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지의 공포.

꿀꺽, 침이 목울대를 넘기는 소리가 들릴 즈음.

“키에에에에엑!”

지면이 한꺼번에 뒤엎어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는 검을 횡으로 그어 모래바람을 걷어 낸 후, 놈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지네의 몸과 스콜피온의 꼬리를 섞은 듯한 괴기한 모습.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이다.

벌레에 대한 내성이 없다면 졸도하고도 남겠…….

“꺄약! 버, 벌레….”

“어?”

바로 뒤에서 들린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그녀가 있었다.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모양인지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니, 튜토리얼쯤이면 몰라도 여긴 26층이잖아.

명색이 NPC라는 게 벌레 하나 보고 놀란다고?

사실 벌레라고 치기에도 구격이 애매한 감이 없지 않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돼?

황당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자, NPC 중 한 명이 얼굴을 붉히며

“흠흠, 다른 때는 괜찮은데 벌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래도 우리가 저 녀석의 몫까지 맡을 테니까. 별일은 없을 거다.”

“어디서 개가 짖나? 개소리도 풍년이네.”

“지금 뭐라고?”

“별일이 없긴 뭐가 없어. 그래서 너희들끼리 저거 막을 순 있고? 너희들끼리 해결할 수 있으면 난 뒤에서 구경할까?”

“…미안하네. 실언이었다.”

이어진 타박에 NPC는 고개를 푹 숙였다.

거봐 나 없으면 시체인 놈들이 뭘 하겠다고 떵떵거리는 거야.

이러는 와중에도 괴수는 폭발적인 기세로 다가온다.

아무래도 지네는 다리가 많다 보니 기동력도 기본 이상이었다.

빠른 속도로 괴수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괴수의 앞으로 두 개의 인영이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시야에 들어왔다.

“저 어, 어라… 대장? 대장이 왜 거기서?”

그들의 정체를 알아본 NPC들은 하나 같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링링과는 26층의 영향으로 일행과 떨어졌었다. 그래서 나중에 목적지에서 만나겠거니 싶었는데…

저 미친놈이 하다못해 저런 괴수를 끌고 온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퍼득 깨달은 그들은 다급히 손을 휘둘렀다.

“미친! 대장 저 괴물을 여기에 데리고 오지 마!”

“방향! 여기에 있는 사람 전부 뒈지기 전에 빨리 방향 틀라고!”

“빌어먹을! 대장!!”

기대했던 눈물겨운 재회는 어디 가고, 희게 질린 NPC들은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는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재회 현장에 할 말을 잃었다.

당사자는 필사적으로 달려오는데, 나머지 한쪽은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말리다니.

탑의 어느 곳을 찾아봐도 이렇게까지 극적인 재회 현장을 직접 볼 수 있을까.

코미디나 다름없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실소를 흘렸다.

‘한 명은 링링이라면 옆은 저번에 하늘 위에서 잠깐 봤었던 그놈인가 보네.’

어쩐지 멀리서부터 보는데 안면이 있다 싶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괴수를 둘러봤다.

확실히 NPC의 반응대로 상당한 거물급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요컨대 저놈을 쓰러뜨리면 26층에서 필요한 건 전부 메꿀 수 있다는 거지?”

이게 웬 떡이야.

NPC한테는 재앙과 다름없는 사태였지만, 나한테는 묵직한 선물 꾸러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간 바쁜 일이 잊어서 잠시 제쳐 두고 있었지만, 26층은 개인이 팀을 이뤄 점수를 획득하는 방식.

모든 점수가 집계 후, 추후에 발표되는 방식이라 당장 보유한 점수를 확인할 수 없으나.

저것만 처리하면 점수 따윈 고민하지 않아도 되리라.

깔끔하고 좋네.

계산을 마친 끝에 나는 욕망이 그윽한 얼굴로 괴수를 마주했다.

“그래서 넌 얼마나 줄 거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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