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쿠구구궁!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앞을 가로막은 절벽을 바라봤다.
얼마나 높은지 가늠이 안 될 정도의 높이.
절벽을 타고 상공을 활공하던 둘리는 고개를 가로지르며 인상을 굳혔다.
“한별, 한번 올라가 봤는데 너무 높아서 이 이상은 힘들 거 같다!”
“그래?”
둘리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절벽은 이전에 다녀온 하늘섬보다도 더 높다는 뜻이다.
그 정도로 높다면 절벽을 건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지금이라도 우회해야 하나.”
당장 이 경로로 돌파하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26층의 지형은 계속해서 바뀐다.
그 점을 이용하면 다소 시간이 걸릴지라도 우회해서 돌아갈 수 있겠지.
상황을 돌파할 견적을 짜고 있을 때쯤이었다.
“그, 그것보다! 자네 아까 전의 무위는 어떻게… 아니, 그전에 절벽이 생겨나는 건 어떻게 알았지?”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난입했다.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NPC가 서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녀석들도 있었지. 너무 존재감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네.
그래도 멀쩡히 질문을 던질 정도로 여유를 가진 걸 보니 어느 정도 진정한 모양이었다.
“26층에 있는 플레이어가 이만한 실력을 가졌다고?”
“그게 말이 돼? 나는 당최 이해가….”
“하지만 플레이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실히 봤는데?”
NPC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이 갈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고작 26층에서 내 실력을 보기란 힘들 테니까.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껏 목숨을 살렸는데 아무도 감사 인사는 한마디도 없을 줄이야.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그 모습에 인상을 바짝 찌푸렸다.
여기서 참을 이유는 없겠지?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저놈들한테는 그럴 의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주먹을 올리려던 즈음이었다.
“새끼들이 돌았나!”
분노가 섞인 누군가의 일갈에 NPC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그들의 시선에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일전에 링링을 꾸짖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악귀처럼 구겨져 있었다.
“누구 덕분에 살았는데 어떤 새끼가 막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고 있어. 저 플레이어가 구해 주지 않았으면 너희들 이미 뒈지고도 남았어!”
“…….”
“고맙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 이해가 되니 마니? 쓰으벌, NPC 꼴 한번 잘 돌아간다. 그러는 너희들은 잘해서 이 자리에 서 있나 봐?”
듣기에도 걸쭉한 욕지거리에 NPC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제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그들은 얼굴을 붉히며 애써 시선을 돌린다.
그녀는 NPC들의 어깨를 박차고 내 앞에 마주 섰다.
서로 눈을 직시하기도 잠시, 그녀는 대뜸 고개를 푹 숙인다.
거의 90도에 가까운 각도에 다른 NPC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보기 안 좋은 꼴은 보여 줘서 미안해. 저 새ㄲ… 아니, 저 녀석들을 대표해서 내가 사과하지.”
“그건 상관없지만, 맨입으로?”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람이 염치가 있지. 보상은 걱정 마.”
실험 삼아 찔러 본 말인데, 그녀는 내게 손을 뻗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26층의 NPC가 당신에게 보상을 제의합니다.〉
〈두근두근 랜덤박스!〉
- D급~B급에 달하는 아티팩트를 랜덤으로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 실수하지 맙시다!
- 개똥을 밟으면 운수 좋은 날이라니, 개똥을 밟아 봅시다. 레어 아이템을 얻을 확률이 올라갈지도?
보상 자체로만 보면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좋다고도 하기 어려운 애매한 보상.
‘NPC가 주는 거니 어쩔 수 없나.’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26층을 클리어한 조건이라면 상당히 싼 값이다.
하나 26층 일개 NPC의 보상이라면 썩 나쁘지만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건네준 아티팩트를 받았다.
그걸 끝으로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의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아까 전부터 안 보이던데 혹시 여기에서 링링을 본 사람 있어?”
마지막으로 내뱉은 그녀의 말에 싸늘한 정적이 감돈다.
“어? 그러고 보니까?”
“일이 터지고 나서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뭐, 뭐라고?”
잇따른 NPC의 증언에 그녀는 극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서둘러 스킬을 발동해 주변을 살펴보는가 싶더니, 이내 양팔을 힘없이 내렸다.
그 이유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아까 전에 일어난 소동으로 무리에서 떨어졌나 보네.’
그들의 대화를 가운데서 듣고 있던 나는 차갑게 식은 눈초리로 한없이 드높은 절벽을 바라봤다.
부정할 수 없었다.
모든 상황과 정황이 설명하고 있었기에.
그로부터 시간이 훌쩍 흘렀다.
절벽을 넘을 수 있을까는 둘째 치고.
그동안 지형이 쉴 새 없이 바뀌었을 테니 다시 찾는 건 무리다.
그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NPC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링링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 * *
“에잉, 여기로 되돌아가는 건 힘들려나.”
한편.
끝도 없이 이어진 절벽을 앞에 두고 링링이 혀를 찼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무수히 바뀌는 지형 속에서 괴수들과 맞서 싸웠었다.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곳은 자연스레 잊기 마련.
지면에서 순식간에 토사가 치솟는가 싶더니, 그와 동시에 갑작스레 발생한 풍압에 의해 몸이 튕겨 나갔다.
그러고 나서가 지금 이 모양이다.
‘남은 건 나 혼잔가?’
탐색 스킬로 주변을 둘러보던 링링은 아쉬운 듯이 혀를 내둘렀다.
무리와 떨어지게 된 건 아쉽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순 없다.
그렇다면 혼자서라도 전진할 수밖에.
그리고 26층에서는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나기 마련이니 대비책 또한 존재했다.
“어차피 목적지에 가면 합류할 건데 뭐 어때.”
그는 가벼운 생각으로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
여기서 멈춰 서봤자 의미는 없다.
그렇게 첫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또다시 26층의 지형이 바뀌는가 싶더니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서둘러 무기를 들고 상대를 바라본 링링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어? 자네?”
“대, 대장?”
마찬가지로 이쪽을 바라본 상대 역시 당황한 낯빛을 지으며 대답한다.
모를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게 남자는 지금 이 상황에 다다르게 만든 일등 공신이니까.
NPC들조차 오르기 버거운 하늘섬에 직접 다녀왔으며.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벼락 생성기를 파괴해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마련해 준 영웅!
링링은 남자의 덥석 얼싸안으며 등을 두들겼다.
“새끼 해낼 줄 알았다니까! 그 망할 아티팩트 쪽에는 다가가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그 골칫거리를 어떻게 처리한 거야?”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눈앞의 남자가 해낸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나 뒤이어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충격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 그게 대장. 사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뭐라고?”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한 겁니다.”
느닷없는 남자의 발언에 링링은 팔뚝에 힘을 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추궁하자 남자는 무안하게 볼을 긁적였다.
“제가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가 했는데.”
“플레이어?”
“그것도 이제 막 26층에 올라온 플레이어였어요.”
“장난치는 거지? 플레이어는 그렇다 쳐도 우리도 수십 년간 해결 못 한 문제를 이제 막 여기에 올라온 신인이 뭘 어떻게 해결해?”
그의 대답을 들은 링링은 타박하듯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리 압도적인 재능을 가졌다 해도 탑의 저층에는 성장의 한계가 있다.
압도적인 재능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르익는 법이니까.
상식적으론 불가능하다.
분명 그래야 할 터인데, 사실을 입에 담는 남자의 얼굴은 더없이 단호했다.
한참의 고뇌 끝에 링링은 이어질 말을 겨우 입에 담았다.
“……진짜?”
“예.”
단호하기 짝이 없는 그의 대답에 링링은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발언은 그의 상식을 깡그린 채 박살 내기에는 충분했다.
꿈보다 해몽 같은 상황이었지만, 링링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일절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라면, 어쩌면 26층을 넘어 탑에 큰 변혁을 가져올지도 몰랐기에.
링링은 궁금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그 플레이어 이름이 뭐지?”
꿀꺽.
침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가운데.
하늘섬에서 다녀온 남자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얼굴로 플레이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플레이어의 이름은….”
* * *
무리에서 한 명이 빠지긴 했지만, 정해진 예정은 변하지 않았다.
지형이 수시로 바뀌는 26층의 특성상 이런 사태를 대비해 대처 방안 역시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목적지는 정해져 있으니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직후.
NPC들을 따라 괴수들을 맞서 싸우며 목적지에 도달한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삭막한 황무지를 지나 마주친 드넓은 평원과 그 위에 피어난 꽃무더기는, 호화롭게 가꾼 화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여기까지만 봐도 NPC들이 어째서 괴수들로부터 이 장소를 탈환하려고 했는지 수긍이 될 정도였다.
그리고 화원의 끝에 다다르자, 그곳에는 나한테도 아주 익숙한 장소가 있었다.
〈샘물(C)〉
- 성신 카르텔의 갸륵한 은혜로 지하로부터 성수가 흘러나옵니다.
-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으니 오염되지 않게 주의 바람.
- 이런! 성신의 성수라고 해서 이걸로 배를 채우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약도 과하면 독이 되거든요!
예전에도 한 번 마주했었던 샘물을 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