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그는 인상을 바짝 찌푸리며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기억이 떠올랐는지 링링은 내 손을 낚아채듯이 마주 잡았다.
“아! 아눌드 공방의 그 신한별! 알다마다! 그 플레이어의 얘기라면 나도 다른 NPC 사이에서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실물을 보게 될 줄이야.”
아, 뭔가 싶었는데 그쪽이었나.
하긴 구름 위에 있었을 당시에도 내 얼굴을 본 NPC가 대충 비슷한 뉘앙스로 말했었지.
아무리 아눌드 공방이 파급력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NPC 사이에서 내 이름이 퍼질 수 있나?
문득 든 의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뮤니티처럼 NPC들도 커넥션 같은 게 따로 있는 건가.’
나는 시선을 돌려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업적: NPC와의 친구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 NPC와 대화 시 친밀도가 급상승합니다.
- 아놀드 공방과 관련된 NPC에게는 호감을 얻습니다.
※주의! 적대 세력의 NPC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생각해보면 업적의 효과라기보다는 아눌드 공방에서 활약상을 듣고 나서 NPC의 친밀도가 올라간 거 같은데.
‘그러면 칭호는 단순히 권능처럼 NPC와 친해지게 만드는 게 아닌 건가?’
음, 자세하게 파고들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와 관련해서는 직접 공방주나 링링한테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뭐, 그런 사소한 사정까진 내 알 바는 아니니까.
그런 걸 알아봤자 탑을 등반하는 데는 쓸모없는 정보이기도 했고.
“그 영감님의 성격상 공방의 전속 모델을 따로 선정해 두진 않을 텐데 역시 자네를 보니까. 그런 이유가 있었군.”
“전속 모델? 그게 뭔데?”
“음? 자네… 모르나?”
“모르는데?”
“……지, 진짜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링링조차 ‘뭔 이런 놈이 다 있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색한 침묵 끝에 링링은 입을 뗐다.
“그게 아눌드 공방에서 이번에 전속 모델로 자네를 선정했었다네. 공방이 생겨난 이례로 공석이었던 자리를 자네가 꿰차서 요새 화젯거리인데… 그걸 당사자가 모르고 있을 줄이야.”
“그 전속 모델라는 건 뭐가 좋은데?”
“음… 그러게 관계자가 아니라 뭐라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다른 공방의 경우를 따져 봤을 땐 드높은 명예와 부, 지위가 있겠지. 그 아눌드 공방이니 탑의 모든 사람에게 부러움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그러니까. 저 녀석이 하는 말을 요약하자면.
지금 신협단이라는 미친 새끼들과 NPC 사이에서는 아눌드 공방 때문에 내 얼굴이 각지로 팔리고 있다는 뜻이지?
안 그래도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느낌인데.
그걸 처리하지 못할망정 더 무겁게 하다니.
“……진다.”
“음? 지금 뭐라고 했나?”
“그 노망난 노인네는 다음에 보면 내 손에 뒈진다.”
“그, 그게 무슨….”
이어진 내 발언에 링링은 적잖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아무 사정도 모르니까 그는 모르겠지.
내가 얼마나 쪽팔리는지.
안 봐도 뻔하다.
그 영감이라면 나한테서 잃은 것을 메꾸기 위해 어떻게든 다시 채우려고 하는 건 뻔하므로.
적당히 내 이름값을 팔아먹을 작정이겠지.
“어쨌건 그건 내 얼굴을 봐서 넘어가기로 하자고. 지금은 그게 아니라 토벌이 중요하니까.”
정론이다.
노망난 영감탱이를 손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다.
하지만 토벌은 지금 필요한 일이다.
순서를 착각해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을 그를 칠 순 없다.
그의 발언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를 구한 링링은 허리춤에서 타구봉을 꺼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네가 다른 플레이어보단 강하다는 건 알고 있네. 근데 아쉽게 됐지만, 나서서 활약할 일은 없을 거야.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절로 믿음이 가는 모습.
내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그의 영웅과 같은 외견에 매료되어 철석같이 믿었으리라.
하나 탑을 등반하는 자라면 누구나 알아야 한다.
탑에는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풍당당하게 앞서 나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눈초리를 형형히 번뜩였다.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다.
길고 짧은 건 직접 대봐야 알 테니까.
* * *
NPC들을 뒤따라가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약하네.’
그건 내가 NPC들이 괴수를 상대하는 장면을 보면서 내린 판단이었다.
내 눈이 잘못됐나 싶어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명확했다.
저들의 무력은 봐줄 것도 못 된다.
아, 물론 내 기준으로 봐서 그렇지. 26층을 등반하는 플레이어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실력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건 좀 양심이 찔리는데.”
나는 볼을 긁적이며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실력도 약한 것들이 나를 지키겠다고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광경을 뭐랄까.
나만 쓰레기가 된 거 같잖아.
근데 뭐 어쩌겠어.
직접 나서서 전투에 참가해도 상관없지만, 저쪽에서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언질을 줬으니까.
NPC들이 합세해 잇따라 달려드는 괴수를 처치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쿠구구궁!
귓가를 찌르는 파공음과 동시에 지형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지하로 푹 꺼진 곳도 있다 싶으면 일부 지형은 마치 중력을 상실하기라도 한 듯,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플레이어였다면 어지러이 변화하는 지형에 적응하지 못하고 압사당하기에 충분한 상황.
그러나 NPC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상황에 대처했다.
나 역시 익숙하다는 듯 NPC의 뒤를 바짝 따라붙자, 그들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오오, 플레이어가 제법인데.”
“이걸 따라온다고?”
“하긴, 그 얄팍한 노인네가 자기네 공방의 대표로 내세운 놈인데 이 정도도 못 하면 섭섭하지. 그래도 대단하긴 하네.”
각자 반응은 달랐지만, 그들의 반응은 하나 같이 감탄한 분위기였다.
그야 이 정도 변화는 나한테 있어선 껌이었다.
튜토리얼에 있을 당시엔 이것보다 더한 것도 겪어봤는데 NPC한테 뒤처지면 그것대로 쪽팔린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면을 노려보며 검을 부여잡았다.
“온다.”
“온다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뭐가 온다고 그래. 우연으로 한 번 잘했다고 자만하지 말고 넌 위험하니까 뒤로…….”
“대장! 정면에서 괴수 수십 마리가 달려듭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네, 확실합니다! 이 속도로 조금만 더 가면 육안으로도 보일 겁니다.”선두에서 앞서 나가던 NPC의 외침에 링링은 인상을 바짝 찡그렸다.
이윽고 저 너머로부터 괴수의 안광이 비치자, 그는 타구봉을 강하게 붙잡았다.
“쯧, 운도 안 좋지.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는 판에 한 술 더 뜨긴. 다들 자세 잡아! 오늘 중에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어떻게든 뚫어야 한다!”
그는 언제 방심했냐는 듯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한두 번 경험한 것으로는 결코 보일 수 없는 대처.
“알았다!”
“물론이지, 저깟 개새끼들한테는 죽어도 안 죽어.”
“우익은 이쪽에 맡겨만 줘!”
링링의 명령에 뒤이어 NPC들도 교전의 준비를 마쳤다.
당장이라도 선두에 뛰쳐나갈 것 같던 링링은 제자리에서 멈춰 서는가 싶더니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순간 그에게서 미심쩍은 눈빛이 느껴진다 싶더니, 이내 의심이 가시고 부끄러운 감정이 눈에 서렸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링링은 얼굴을 붉혔다.
“우리도 모르는 걸 플레이어인 자네가 미리 알고 있어서 잠시 의심을 했다네. 미안하네, 그리고 적습을 미리 알려 줘서 고맙다.”
링링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받자 그는 폭발적인 기세로 전장으로 뻗어 나갔다.
녀석은 그저 말뿐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가장 먼저 괴수를 향해 달려든다.
이에 질세라 괴수와 맞붙는 NPC 무리.
실력 자체는 나보다 한참 떨어지지만,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유려한 콤비네이션을 보인다.
괴수의 공격을 빈틈없이 차단하는 와중.
줄곧 기회를 노리던 NPC들이 쾌검을 휘두른다.
그리고 모든 이들을 통솔하는 링링의 시원한 매타작.
깨개갱!
아무리 괴수라도 일정 이상의 무력과 체계적인 콤비에는 당해 내기 어려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괴수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다.
‘이거면 내가 나설 것도 없겠는데.’
멀리 떨어진 장소는 아니지만, 그들의 등 뒤에 붙어 눈여겨보던 나는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전투에 직접 끼어들자면 못할 것도 없다.
파도를 타고 흘러가는 흐름에 억지로 헤집어 들어가 저들이 쓰러뜨릴 괴수까지 전부 독식할 순 있지만, 굳이 그럴 이유는 없다.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없었고.
괜히 힘만 빼는 일이니까.
왜인진 몰라도 지금은 가만히 지켜보는 게 낫다는 직감이 들었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거라는 직감이 말이다.
그렇게 NPC들의 전투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
“……!”
순간 느껴진 심상치 않은 미세한 진동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비단 나 혼자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기감에 민감한 둘리마저 귀를 쫑긋 세운다.
“한별! 이건….”
“그래, 알아.”
나도 안다.
뭔가 있다.
크나큰 위험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나는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지 NPC들은 괴수를 상대하고 있었다.
적어도 저기에 있는 괴수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위협의 원인이 괴수였다면 내가 아니라 놈들을 직접 상대하고 있는 NPC들이 알아차렸을 테니까.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지.”
고민은 짧고.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빨랐다.
눈대중으로 간격을 재고는 검의 특수 능력을 발현했다.
어쭙잖게 검의 모형을 따라 한 형태가 아닌, 튜토리얼에 있을 수백 년간 있으면서 내 손에 익을 대로 익은 형태.
나는 상단에서 하단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푸우웅!
길게 뻗어 나간 풍압이 NPC의 경로를 방해하곤 그대로 상공으로 날려 버린다.
적절한 힘 조절을 했기에 경상은 있지만, 눈에 띄게 다친 NPC는 없었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상황에 그들이 나를 노려보기도 잠시.
콰드드득! 콰앙!
지금까지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력과 힘으로 방금 전까지 NPC들이 서 있던 지면이 폭발했다.
그와 동시에 지하에서부터 간헐천처럼 솟아 나온 토사가 열과 압력의 작용으로 견고한 절벽을 형성했다.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움직인 나조차도 기겁할 만한 광경.
하지만 나보다도 놀란 이들은 따로 있었으니.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토사를 절벽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열과 압력에 의해 곤죽이 되었을 사실을 깨달은 NPC들은 새파랗게 질런 얼굴이 되었다.
이윽고 NPC는 나에게서 눈을 못 떼지 못하며 넋을 잃었다.
“바, 방금 우리… 죽을 뻔했어? 아니, 그보다도 우리가 모르는 걸 플레이어가 알고 대처했다고? 대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