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72화 (72/175)

제72화

살벌한 하울링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그 울음소리가 신호탄이 된 모양인지, 나를 주변으로 괴수의 수가 속속 늘어난다.

꽤나 오랫동안 피에 굶주렸는지 괴수들은 입가에 끈적한 침을 질질 흘리며 이빨을 세웠다.

당장 덤벼들어도 이상한 것 없는 대치 상황이었지만, 놈들은 섣불리 움직이려 들진 않았다.

내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니다.

‘설마 내가 한 입 거리밖에 안 돼서 다른 놈들한테 뺏길까 봐 눈치 보는 건가.’

새끼들이 뒈지려고 환장했나.

당장 어떻게 협공해서 나를 상대할까 고민해도 모자랄 판인데 다른 놈들을 견제하고 나자빠진다고?

아니, 반대로 말하자면 내 힘을 못 알아차릴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다는 건가.

예로부터 멀쩡한 짐승보다 위험한 게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이라 했다.

뒤가 없는 놈들은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잘됐네.”

놈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적당한 놈들을 상대한다면 검의 능력을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내 선에서 마무리될 테니까.

오히려 좋다.

이쪽을 무시한 대가는 확실히 받아 낼 셈이니 말이다.

“그 노인네가 얼마나 잘 만들었는진 직접 실험해 봐야지.”

미리 수납해 둔 검을 뽑았다.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구축하자 원래 뭉툭한 방망이였던 검의 무게가 달라진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바닥의 그립감에 따라 형태와 날카로움 등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 바뀐다.

단검으로부터 시작해 바스타드 소드, 스틸레토, 글레이브 심지어는 배틀 엑스까지 변화폭에는 끝도 한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제일은 이거지.’

쐐이이잉, 채앵!

검의 손잡이가 단숨에 내 가슴께까지 도달하며 육중한 무게가 양손에 감돈다.

그립감에 만족하고선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일전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될 절삭력과 함께 괴수의 두개골이 양단된다.

촤악, 단숨에 머리가 박살난 괴수는 뇌수를 흩뿌리며 털썩 주저앉는다.

나는 손에 쥔 투핸디드 소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게 최고란 말이지.’

차라리 둔기를 휘두르고 말지. 가벼운 비수로 깨작거리는 건 영 성미에 안 찬다.

나중에 필요해지면 몰라도 지금의 나한텐 이게 딱이다.

“크르릉!”

“아우우울!”

동료 중 하나가 다짐육이 되는 꼴을 앞에서 지켜본 괴수들은 충혈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본다.

아무리 굶었더라도 서로 싸울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가.

저걸 두고 괴수치고는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한심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딱히 기대도 안 했지만.’

이것들은 실험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나마 남아 있는 실험체라는 이용 가치를 살려 주는 수밖엔 없겠지.

검의 다른 특수 능력도 사용해 보려는데, 어디에선가 쇄도한 작살이 괴수의 배를 관통했다.

나를 향해 뛰어들던 괴수는 어느샌가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내가 벌인 짓은 아니다.

“그럼….”

“아, 아니다! 한별, 의심하지 마라. 난 여기에서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이 돌아가자, 곁에 있던 둘리는 양손을 격하게 흔들며 부정한다.

왠지 모르게 억울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

“누군 뼈 빠지라 싸우는데, 두 손 놓고 구경하는 건 자랑이다?”

“…….”

하얗게 질린 둘리의 얼굴에 가볍게 딱밤을 휘둘렀다.

둘리가 저지른 짓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였다.

제3의 인물.

내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를 즈음, 멀리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완전 무장을 갖춘 한 무리가 나타났다.

같은 무리인지도 조금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지각색의 복장을 한 사람들.

제법 되는 거리였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도달한 사람들은 각자 무기를 뽑으며 흉흉한 살기를 뿜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더는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검을 집어넣었다.

‘남아 있는 검의 능력을 확인 못 한 건 아쉽지만.’

뭐, 상관없겠지.

그 영감님이 알려 준 내용에 따르면 이런 전장에서는 딱히 써먹을 만한 것도 못 된다.

급한 건 아니니 천천히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그나저나.

“저것들 NPC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샅샅이 살폈다.

외형적으로 플레이어와 NPC는 별반 차이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하나 플레이어에 비해 NPC들은 보자마자 단번에 느껴지는 그들만의 기백이 존재한다.

내 의문을 해결하기라도 하듯 그들의 머리 위로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NPC〉

- NPC입니다.

- 약해 보인다고 깝치지 맙시다! NPC를 합당한 이유도 없이 건들 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사소한 건 둘째 치고.

시스템이 직접 그렇다는데 틀린 건 없겠지.

NPC들은 마치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듯 딱딱 흘러가는 협동력으로 금방 사태를 진압했다.

마지막 남은 괴수까지 애완동물 다루듯 손쉽게 제압한 그들은 이쪽을 향해 시선들 돌린다.

NPC 중에서도 가장 대표로 보이는 자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다행히도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떨어져도 이런 외지에 떨어진 걸 보니 지지리도 운이 없나 보군.”

“그래도 이 포위망에서 혼자서 괴수를 때려잡았다니 플레이어치고는 제법 깡이 좋나 보네.”

호쾌한 인상의 NPC는 내 앞에 쓰러진 괴수를 살피더니 쾌활하게 웃기 시작했다.

뭐 그들이 난입했어도 별문제는 생기지 않았겠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NPC들은 내 어깨를 두들기며 팔뚝을 걷어 올렸다.

“어쨌건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젠 우리가 왔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네는 우리들이 보호하고 마을까지….”

“링링! 우리들이 여기까지 온 목적을 잊었어?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여기에서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

“그, 그렇긴 하지.”

링링이라고 불린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난입했다.

그러자 그는 걷어 올린 팔뚝을 슬그머니 내렸다.

주변 눈치를 살피던 남자는 다시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돌아봤다.

“암튼 일이 그렇게 돼서 마을까지 보호하는 건 좀 곤란하네. 대신에 지도를 줄 테니 이걸 보고 따라가게나.”

그는 사람 좋은 인상을 하며 지도를 건넸다.

확실히 그가 건네준 지도만 있다면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응, 그렇겠지.

나는 가지각색의 무장을 NPC를 둘러보며 확신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NPC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타의 추종을 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만한 숫자가 모였는데도 불구하고 NPC들은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뜻은 간단히 생각할 수 있었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거니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놓여선 안 되는 기회라는 확신이 들었다.

분명 이번 층과 관련된 클리어 조건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나는 링링이라는 남자에게 지도를 다시 건넸다.

“이건 필요 없어.”

“응? 이게 없으면 넌 어떻게 되돌아갈 건데? 방금처럼 개새ㄲ… 아니 괴수들한테 포위당하면 어쩌려고?”

“너희들 따라가면 되지.”

“음, 확실히 그런 방법도 있네. 그것도 괜찮….”

“이, 멍청한 새끼야! 안 그래도 손이 부족한데 어쭙잖은 놈을 데려갔다가 일 터지면 어떻게 하려고!”

링링이 수긍하며 넘어가자, 옆에 있는 NPC가 딴지를 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난 눈썹을 들썩였다.

이것들 봐라? 잠자코 봐주니까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하네?

손이 불끈 쥐어졌지만, 나는 숨을 내쉬며 진정했다.

필요하면 주먹이 나가는 것을 아끼지 않겠지만, 아직은 말로 해결할 수 있다.

“까 놓고 말해서 내가 괜히 객기 부려서 괴수하고 싸우다가 뒈지면 내 책임이지 너희랑은 관련 없잖아.”“끄응, 그렇긴 하지.”

그에 대해선 할 말은 없는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NPC는 입을 닫았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안 끼워 줄 이유도 없지.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따라 와.”

“링링!”

“하지만 저쪽에서 우리 도움은 바라지 않는다잖아.”

“그렇지만….”

“그럼 됐지. 뭘 하러 플레이어하고 싸우고 있어. 그리고 혼자 가는 것보다 우리랑 같이 다니는 게 안전해.”

반박할 만한 건수를 못 찾았는지, NPC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토론 끝에 결론에 다다른 링링이라는 남자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대강 그렇게 됐으니까. 넌 우리 뒤꽁무니만 따라오면 돼.”

“그래서? 설명은 해줘야지. 아무리 그래도 같이 움직이는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따라 오라고 하려고?”

내 물음에 그는 주변에 있는 NPC들의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보면 알게 될 건데 숨길 것도 없지. 너도 26층을 겪었으면 이곳엔 벼락이 떨어지는 건 알고 있지?”

“어, 알지.”

모를 리가 있나.

그 벼락을 몸으로 직접 맞다 못해, 벼락을 만드는 원인을 찾아서 박살 내기도 했다.

적어도 26층에서 그 벼락을 나보다 아는 놈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사실 이쪽에는 괴수들이 출몰하는데 그놈들로 인해서 여럿 피해가 벌어졌었거든. 그런데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괴수들은 벼락에 안 당했지만 우리는 그것 때문에 곤혹을 치렀어.”

아무래도 옛일이 분했던 모양인지, 그는 이빨을 빠득 갈았다.

남자는 살벌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어깨를 으쓱이며 대화를 이었다.

“그래서 마을에 있는 다른 놈이 벼락을 생성하는 아티팩트를 찾으러 나섰는데, 그 일이 잘 해결된 모양인지 벼락이 감쪽같이 멈췄단 말이지.”

다른 놈?

아아, 그러고 보니 구름 위에 있을 당시에 이상한 놈을 본 거 같기도 한데.

설마 그 NPC가 이 녀석들의 동료였나?

그가 말하는 시기를 봐서는 내가 벼락 생성기를 파괴했던 시간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내가 벼락 생성기를 박살 낸 덕에 NPC가 직접 움직이게 된 건가.

머릿속에서 대략적인 퍼즐이 맞춰졌다.

“그러니까. 이 기회를 틈타서 괴수를 일망타진하려고?”

“하핫, 이것 봐라? 다른 플레이어들은 뇌에 똥만 가득 찼는지 이렇게 퍼먹여 줘도 말귀를 못 알아듣던데.”

그는 싱긋 웃으며 손을 탈탈 털었다.

“암튼 그렇게 된 거니까. 너도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상대하긴 어려울 테니까. 아! 맞다. 생각해 보니 통성명이 늦었네. 난 마을의 대표를 맡은 링링이다.”

링링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내게 손을 뻗었다.

그의 모습에 나는 손을 맞잡으며 이름을 말했다.

“난 신한별이다.”

“…음? 신한별?”

내가 이름을 소개하자 링링은 곧장 내뻗은 손을 움찔하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가 갑자기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생각하기도 잠시.

링링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되물었다.

“어디에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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