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68화 (68/175)

제68화

36층.

수많은 플레이어가 피와 희생을 감내하고 도달한 층이자.

탑의 최전선.

그 명성에 걸맞게 이 자리에 서 있는 플레이어들의 면면은 탑을 등반하는 자라면 모를 리 없는 얼굴이었다.

한 명, 한 명이 탑에서 이름을 떨치는 랭커다.

멋도 모르는 이가 이 광경을 본다면 놀라기에는 충분했을 테지만, 당사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었다.

탑의 최전선에 도달할 만큼 강한 실력을 지닌 자는 자연스레 명예도 동반하는 법이니까.

본디 강한 자는 이름을 쫓지 않는다.

이름이 강한 자의 꽁무니에 따라오는 것이지.

그렇다 보니 그들 사이에서도 상하 관계는 존재했다.

“흠흠… 유채아 씨 혹시 바쁜 일이 있으십니까.”

“아, 괜찮아요. 안 그래도 저도 막 연락을 마친 참이거든요.”

“하하… 그렇군요. 괜히 민폐를 끼친 게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입니다.”

남자는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바로 앞에 있는 여자의 눈치를 살핀다.

탑의 최전선이라 불리는 곳이니만큼 남자의 신분 역시 낮지만은 않았다.

3대 길드라 불리는 신화의 핵심 요직임과 동시에 랭킹 100위권 안에 들 정도의 실력자.

어디에서든 다른 플레이어에게서 동경의 시선을 받을 수 있었으며, 어떤 권력자 못지않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유채아는 신화에서 일반 길드원의 자리에 있으니 직책상 명령을 내리는 것도 가능했지만.

남자는 유채아의 안색을 살피는 데 급급했다.

‘그럴 수가 있어야지.’

그는 시꺼먼 낯빛으로 바짝 마른침을 삼켰다.

유채아는 탑에서도 한 손에 꼽힐 만한 강력한 실력자.

실력으로 따져도 그녀의 앞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드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그러고 있을 무렵, 유채아의 목소리가 채찍같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무슨 연유로 저를 부르셨나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바짝 긴장했다.

분명 온화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목소리였건만, 묘하리만치 차가운 한기가 느껴진다.

불러 세워놓고, 그대로 방치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죄, 죄송합니다. 곧 토벌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하여 그 사실을 전하러 왔습니다.”

“아 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봐요. 간만에 좋은 일이 있어서 잠시 깜빡하고 있었네요.”

“좋은 일이시라면?”

“그건 사적인 일이라.”

“아, 그렇군요.”

무어라 말을 내뱉기 위해 입술을 찰싹거리던 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다.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할 질문이 아니라 생각해서.

공허하기만 했던 그녀의 눈빛에 짧은 찰나 온기가 깃든 느낌이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착각이겠지.’

중한 일을 앞에 두고 긴장해서 그런지 헛것이라도 봤나 보다.

그는 소매로 눈가를 스윽 훔치고는 말을 이었다.

“곧 출정이니 서둘러 채비를 마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럴게요.”

“그럼 다른 분들한테도 알려야 해서 전 이만….”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는 그는 이전과는 다른 이질감을 느꼈다.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은 그는 유채아의 손목에 시선을 멈춰 세웠다.

“…저, 이런 질문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데 못 보던 팔찌네요?”

“아, 이거 말인가요? 최근에 인기 있는 장신구인데 귀여워 보여서 새로 샀어요.”

남자의 물음에 그녀는 소매를 걷어 팔목을 드러냈다.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 위에 주렁거리는 팔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고풍스러운 한복에 팔찌.

언뜻 보면 매치가 되지 않는 패션이었지만 유채아의 미모는 그것마저 어울리게 만든다.

팔찌를 유심히 바라보던 남자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 그런데 어째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해츨링으로 보이는 검은 드래곤이 새겨진 팔찌.

그러고 보니 이번에 대형 길드를 상대로 테러(?)를 일으킨 신협단이라는 단체의 사람도 저런 것과 비슷한 걸 차고 있었던 거 같은데.

착각인가?

설마, 아니겠지?

그런 개망나니들과 비교하는 것부터 실례라 판단한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명예도 실력도 전부 지닌 그녀가 신협단인가 하는 사이비 같은 단체에 속할 리는 없다.

비슷한 디자인이겠거니 하고 넘긴 남자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하하, 잘 어울리십니다. 그러면 전 급한 일이 있어서 정말로 가 보겠습니다.”

남자는 짧게 목례를 하고선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의 발걸음에서 이번 일이 얼마나 일각을 다루는지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인기척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자리에 홀로 남은 유채아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후훗, 아무래도 괜찮았나 보네요.”

유채아의 시선은 팔찌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선 한별 씨께도 보여 드리고 싶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겠죠.”

마음 같아선 적당한 핑계를 대고선 신한별의 옆에 붙어 있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오히려 신한별 쪽에서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까.

다른 플레이어들은 아직까지도 그의 저력을 모르는 모양이지만, 튜토리얼에서 마지막까지 그와 같이 있었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신한별이라는 플레이어의 가능성을 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진 탑에 먼저 오른 자신이 우위를 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도 눈 깜짝할 사이에 따라잡힐 것이 분명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옆에 설 텐데, 내려가 봤자 오히려 한별 씨의 발을 묶는 셈이겠죠.’

지금은 이곳에 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언젠가 그가 이곳에 도달할 때쯤이면 옆에 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니.

“다시 만날 그날을 기대해 볼까요.”

유채아는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는 36층의 눈 폭풍을 향해 발을 옮겼다.

* * *

“후우.”

얼굴에 묻은 괴수를 피를 가볍게 털어 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새파란 평야 위로 수십, 수백 마리에 달하는 괴수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압도적인 광경이었건만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털었다.

‘썩 나쁘진 않네.’

간만에 보는 장면이라 그런가 색다른 느낌이었다.

분명 튜토리얼에 있을 적엔 흔했었는데, 막상 탑에 오니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니.

제삼자의 눈에서는 좁디좁은 휴게 공간에서 이렇게나 넓은 공간이 생길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었으나, 의외로 그 해답은 간단했다.

“AI 훈련장이라고 해서 또 시답잖은 건 줄 알았는데 꽤나 본격적이네.”

일부로 아까운 시간을 들여 시스템의 설명을 읽어 본 보람이 있었다.

AI 훈련장에서는 공간의 크기도 장소도 플레이어의 멋대로 조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곳이었다.

“캬아, 절경이네. 다음부터는 방 말고 이곳에 있어야겠어.”

미리 냉장고에서 챙겨 온 탄산음료를 한 번에 들이켜고는 혀로 입술을 훑었다.

이곳에 서 있으니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그 좁은 공간에서 둘리와 단둘이 있자니 불편했었는데 잘됐네. 해결책이 생겨서.

아, 물론 이건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는데.

탑이 플레이어의 사정을 봐줄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았다.

〈TIP. AI 훈련장에서 죽으면 탑과 마찬가지로 죽습니다.〉

- 쉬운 단계를 선택해도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애먼 화살을 조심하세요!

- 자나 깨나 조심하고! 또 조심! 방심하면 한 방에 훅 갑니다!

내 생각을 읽듯 시스템 창이 시야 위로 떠올랐다.

“둘리야. 방심하고 있으면 화살이 날아온다는데….”

피슝!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같이 훈련장에서 괴수를 때려잡던 둘리의 머리에 화살이 꽂힌다.

얼마나 강한 위력인지 멀리 떨어진 자리였음에도 소리가 여기까지 울린다.

“아, 그게 저거였어? 한발 늦었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말해 줄 걸 그랬나.

어지간한 괴수조차 한 방에 골로 보낼 만한 위력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저런 함정이 있다면 이곳에서 맘 놓고 노는 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탑에서 간과한 점은 둘리는 어지간한 괴수들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으윽… 한별! 그런 게 있으면 미리미리 말 좀 해 달라!”

“그렇게 누가 방심하고 있으래?”

둘리는 불만을 투덜거리며 짧은 팔로 화살을 튕겨 냈다.

화살이 박혔던 자리에는 칠흑과 같이 새까만 비늘이 번들거린다.

암만 화살이 세다고 해 봤자, 그 위력이 드래곤을 쌈 싸 먹을 수 있을까.

녀석을 보며 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이런 건 이렇게 처리하는 거야.”

이번에는 화살이 이쪽을 향해 쏜살같이 쇄도한다.

방금 전의 위력과는 전혀 비교도 안 될 정도였으나 나는 여유롭게 몸을 돌렸다.

검의 옆면을 세워 후미에서 날아온 화살의 각도를 비틀자, 튕긴 화살은 옆에 있던 괴수의 두개골을 뚫고 지나간다.

쿠웅!

한순간에 머리에 구멍이 뚫린 괴수는 그대로 쓰러졌다.

“…….”

깔끔하기 짝이 없는 동작에 둘리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식으로 하라는 거야. 알겠지?”

“아, 알았다!”

“알면 됐고.”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쓰러진 괴수를 내려다봤다.

확실히 탑에서 봤던 어쭙잖은 놈들보단 덩치고, 힘이고 비교해도 이놈이 더 훤칠하다.

‘그래서 더 좋은 거지만.’

이터의 권능을 발동하자, 몸에서부터 스멀스멀 뻗어져 나온 보랏빛의 촉수가 괴수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몇 초도 안 되어 괴수들의 스탯을 흡수한 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씨, 이래도 간에 기별도 안 가네.”

마음 같아선 느긋하게 여기에서 박혀 있고 싶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한정되어 있었기에.

〈곧 26층으로 이동합니다.〉

때마침 의도하기라도 하듯 시스템창이 하늘 위로 떠오른다.

이걸로 여기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끝.

하지만 내 얼굴에는 아쉬움은 담겨 있지 않았다.

“다음번에 휴게 공간을 올 때는 좀 더 시간을 여유롭게 와야겠네.”

물론 그러려면 그만큼의 성적을 거둬야 하는 법이지만.

못 할 건 없었다.

나는 괴수의 피가 묻은 옷을 정리하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섬광을 마주했다.

“그럼 가 볼까.”

26층으로.

* * *

〈이곳은 26층입니다.〉

〈플레이어들은 팀을 결성해 각자 개인층에서 획득한 누적 점수를 통해 순위를 가립니다.〉

〈팀의 인원수만큼 보상이 분배됩니다.〉

〈주의! 하위 30%는 죽습니다.〉

26층에 도착한 나는 시스템창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색은 개인 층에서 진행하지만, 결국 팀 운이 중요한 게임.

“그리고 멤버의 숫자도 분배를 잘해야 한다는 거네.”

팀의 인원수 제한이 거의 없다시피 한만큼, 많은 숫자에 들어가면 안전하게 층을 클리어 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해선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적어진다.

요컨대 눈치싸움인 셈이다.

안전과 위험, 플레이어의 결정으로 그 두 개를 양립해야 하니까.

‘뭐 일단 팀부터 찾아볼까.’

복잡한 건 전부 제쳐 놓고 일단 살펴보면 되겠지.

시스템을 통해 팀을 확인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휴게 공간에 오래 머무른 탓인지 플레이어 대부분이 팀을 결성한 상태였다.

게다가 상위 팀들은 소속 길드로서 이어져 있었다.

“죄다 한통속이네.”

하긴 초반 층이면 몰라도 26층까지 올라온 지금에선 다들 소속 하나쯤은 있겠지.

아예 안면도 없는 사람보단 그나마 서로 무력을 파악한 사람들과 팀을 맺는 게 편하다.

이쯤 되면 내가 특이한 부류에 속한 건가.

N빵이라는 명백한 단점이 있어서, 상위 그룹은 딱히 기대도 안 했다.

그렇다면 내가 봐야 할 곳은.

“중간이나 하위 그룹.”

고민은 짧았다.

빠른 손동작으로 리스트를 쭉 내리던 나는 어느 곳에서 우뚝 멈췄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이 아닌, 한 파티의 모집 글.

〈♧♡♥→쁘띠 신협단←♥♡♧ 모집합니다(17/30)〉

무미건조한 모집 글 사이에서 형형색색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글을 본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타격감과 함께 새파랗게 질렸다.

저게 여기서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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