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67화 (67/175)

제67화

사람이 머리끝까지 분노하면 오히려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다고 했었던가.

그 경험을 겪어 보지 못했다곤 하지 않았다.

이미 튜토리얼에 있을 때, 매일 같이 탑을 저주하며 분노했었으니까.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 감정을 분노와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앞서 봤던 영상이 너무 어이없어서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동안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 현기증이 생긴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 영상 때문이겠지.’

응, 확정이네.

더 이상 탑에서 얼굴을 내밀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하겠어.

그도 그럴게.

탑에서 제일 유명한 길드라는 곳에서 내 얼굴이 박힌 티셔츠와 두건을 메고 야단법석을 친 놈이 있는데, 얼굴을 어떻게 떳떳하게 세울 수 있을까.

게다가 방금 전에 올라온 영상은 많은 플레이어한테 영감을 줬는지, 금방 인기 게시물에 등극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화제가 되는 건 삽시간이다.

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는 크나큰 오락거리였으니 말이다.

“다른 건 다 좋은데 하필이면 왜 나야?”

나는 의미 없는 한탄을 중얼거렸다.

어디서부터 잘못 꼬였을까.

단체층에서 조금 과하게 날뛰었던 거?

아니면 유채아와 만났을 때부터?

그것도 아니라면 튜토리얼을 끝내고 탑에 들어왔을 때?

아니 원인을 따지자면 내가 탑의 부름에 응한 거부터 잘못이겠지.

의미 없이 신세를 한탄해 봤자, 이미 벌어진 일은 없어지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최대한 수습해야지.’

다른 건 몰라도 신협단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내 얼굴이 떡하니 박힌 옷을 입고 다니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겸사겸사 이 짓거리를 꾸민 놈과 마주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이를 뿌득 갈고 있을 때쯤, 청아한 소리와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누군가로부터 온 쪽지.

서둘러 수신인을 확인해 보니 유채아로부터 온 문자였다.

[유채아]- 한별 씨! 소식 전해 들었어요. 이번에 새로운 업적을 얻으셨다면서요. 축해드려요:)

단지 텍스트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 너머의 생기발랄한 느낌이 느껴진다.

적당한 대답을 보내기도 전에 유채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채아]- 전에 얘기한 대로 공방에 보낼 물자는 준비해 뒀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 덕분에 살았어. 꼭 필요했는데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유채아]-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닌 한별 씨 부탁인데 별로 문제는 없죠^^

여러모로 씨가 담긴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눌드 공방에 주기적으로 지급할 포션은 유채아가 직접 공수해 주기로 했다.

일전에 공방주가 설명했듯, 아무리 돈이 많은 자라도 포션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포션의 등급이 높을수록 말할 것도 없다.

‘최전선에서도 항상 물자 부족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니 말 다 했지.’

그런 최고급 포션이 도대체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니 굳이 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없겠지.

[유채아]- 그것보다도 한동안 연락이 안 돼서 괜히 걱정했잖아요.

잇따른 그녀의 말에 나는 뜨끔했다.

생각해 보니 포션과 관련된 일을 마친 후에는 딱히 연락한 적이 없었지.

애초에 그 뒤에도 여러 일로 바빠서 숨 돌릴 틈조차 없었긴 했지만.

충분히 서운하다고 여길 만했네.

[나]- 그동안 바쁜 일이 많아서 그렇게 돼 버렸네;;

[유채아]- 업적을 보니 한별 씨도 여러모로 바쁘셨던 거 같으니 뭐, 어쩔 수 없겠죠.

[나]- 또 연락할 테니까. 걱정 마.

[유채아]- 흠흠, 약속하셨으니 꼭 지키셔야 해요? 그럼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각종 미사여구로 장식한 것이 아닌 그저 기다리겠다는 말.

‘늦든 빠르든 내가 따라잡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탑에서는 하루에도 적게는 몇 명, 많게는 수십 명까지 죽고 퇴출당한다.

내가 비정상적인 편이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렇게 빠른 속도로 등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제로 탑이 생기고 수십 년, 최전선은 41층에서 멈췄다.

그런데 그녀는 탑을 등반하는 자라면 누구나 꺼리는 말을 툭 내뱉었다.

그것도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정확하게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거겠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에게는 객기에 그치지만, 이미 이룬 자에게는 더없는 확신이 된다.

그래서 쫄리냐고?

그럴 리가 있나.

고작해 봐야 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41층에서 무서워할 거라면 진즉에 뒈져야지.

그 채팅을 끝으로 유채아와의 연락을 끊었다.

그대로 커뮤니티를 끄려고 손을 뻗던 도중,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이윽고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나는 어색하게 목덜미를 매만졌다.

“아, 신협단인가 하는 새끼들에 관해서 물어봤어야 했는데.”

분명 유채아도 신협단에 가입했다고 했다.

그래도 단체의 내부에 있으면 물어볼 것도 많을 텐데.

나는 다시 쪽지를 보내려다 말고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다음에 일 있으면 다시 물어봐야겠네.’

이미 인사도 끝낸 마당에 다시 연락하는 것도 모양새가 애매했다.

영상 속에 나온 새ㄲ… 아니 그 플레이어도 유채아와 같은 층에 있을 터.

일단 위로 올라가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신협단의 행세를 하는 놈들은 죄다 내 얼굴이 박힌 옷을 입고 있다고 했었지?

설마 유채아도 지금쯤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하하, 그래도 사람들이 보는 눈이 있는데.”

아니, 따지고 보면 못할 것도 없지 않나?

이미 신협단이라는 집단이 나사가 하나씩 나갔다는 것은 일전의 영상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괴수와 맞서 싸울 때조차 나지 않던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니겠지?

가능하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머릿속 한편을 차지하는 불안감을 애써 날려 버렸다.

사실을 외면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모르는 것도 때론 약이리라.

나는 옷을 챙겨 입으며 방 안을 둘러봤다.

지금까지 수많은 활약을 하면서 휴게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 역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나저나 여긴 변한 게 없지?”

대충 눈대중으로 방을 훑어본 나는 확신했다.

역시 이전에 왔을 때와 비교해 방의 크기는 변함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방 한 칸에 냉장고도 있고 온천도 생긴 마당에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하나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실망을 감출 수도 없었다.

“그나마 저게 있으니까. 다행이지.”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벽 한쪽에 붙어 있는 또 다른 문.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까닭에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어느샌가부터 방의 구석에 달려 있었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자 둘리가 얼굴을 불쑥 내밀며 외친다.

“한별! 드디어 이곳에도 내 방이 생기는 건가!”

“네 방은 무슨…”

짤막한 발을 동동거리며 설레발치는 둘리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저 녀석도 프라이버시가 있을 텐데, 이 좁은 공간에서 나와 생활하고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겠지.

까짓것 뭐 어때.

“빈방이면 둘리 너 줄게.”

“하, 한별! 그게 진짜인가! 혹시 어디에서 머리라도 맞고 왔나? 우리 한별이 착할 리가 없는데….”

빈말이 아니었는지, 둘리는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내 머리를 툭툭 찌른다.

이놈은 사람이 기껏 좋은 마음을 먹었는데, 분위기를 초 치고 있긴.

“싫음, 말고.”

“농담! 한별 농담이다! 한별이 피곤한 거 같아서 한 번 농담해 봤다, 헤헤….”

그나마 얻은 걸 뺏어갈까 봐, 눈시울을 붉히는 둘리.

그래도 다른 해츨링에 비하면 애를 부족한 건 없이 키운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방 하나로 왜 이렇게 짠하게 보이지.

다음에 뭐 있으면 하나라도 더 챙겨 줘야겠다.

“뭐, 안에 뭐가 있는지는 직접 확인해 봐야겠지만.”

“그래도! 한별, 어서 열어 보자!”

둘리의 재촉에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밀실의 손잡이를 돌렸다.

끼이익!

뻑뻑한 느낌과 함께 미지의 공간이 열렸다.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본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문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응?”

여긴 뭐 하는 공간이야?

성인 두 명이 들어서도 좁은 규모.

3평 아니 2평이라도 될까.

아무리 탑이 답이 없다고 해도 원래 있던 방의 크기를 넓혀도 될 걸, 구태여 작은 방을 따로 만드는 융통성 없는 짓은 안 할 텐데?

“한별! 한별! 도대체 안에 뭐가 있길래. 그런가!”

둘리의 통통한 엉덩이가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간다.

힘겹게 방 안에 발을 들인 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똑같은 얼굴을 했다.

“한별? 뭐 하는 곳인가…?”

“그러게.”

낸들 알았으면 이렇게 있지 않았겠지.

아무리 봐도 일반적으로 쓰는 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한순간에 내 방 마련의 꿈을 잃은 둘리는 현실을 깨닫고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둘리한테는 안쓰럽게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안에 두 발을 들어서자 천장에서 뻗어 나온 불빛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이윽고.

〈식별 확인, 신한별 플레이어님 환영합니다.〉

〈이곳은 AI 훈련장입니다.〉

갑자기 들려온 시스템의 목소리.

아무래도 나한테만 보이는 모양인지, 둘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AI 훈련장?’

의문을 가지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설명이 잇따랐다.

〈네, 이곳에서는 플레이어의 데이터를 수집해 과거에 쓰러뜨린 괴수와 다시 겨룰 수 있는 훈련장입니다.〉

“아, 그래?”

시스템의 설명에 나는 눈을 흘겼다.

안 그래도 탑에서도 괴수랑 싸우기 바쁜데, 꿀 같은 휴게 공간에서마저 괴수와 싸우라니.

과연 저 시스템을 사용할 플레이어들이 과연 있을까.

헛수고였네.

방을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도 잠시,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잠깐만… 괴수를 다시 소환한다면….’

나는 곧바로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여기에서 소환된 괴수를 이터의 권능으로 흡수할 수 있어?”

에이, 설마 가능하겠어?

말을 내뱉어 놓곤, 곧바로 부정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사기를 탑에서 용납할 리가 없을 테니까.

〈가능합니다.〉

짤막한 대답.

시스템의 답변에 나는 잡은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미친. 이게 된다고?”

이거라면 지금까지 부족했던 내 성장을 메꾸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다음 층에 이동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20분 남짓.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씨익 지으며 시스템에게 말했다.

“튜토리얼에서 상대했던 괴수 999마리 당장 소환해.”

아, 이건 못 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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