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뭐라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엔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다시 보니 내 눈은 틀림없었다.
만약 내가 들은 게 잘못 들은 거라면 무릎을 꿇고 정수리를 보이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검 대신 손에 쥔 괴수의 뿔에 힘을 줬다.
‘이대로 목을 벨까?’
직접 주먹을 맞대고 싸우진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척으로는 나 못지않은 힘을 지녔다.
이만한 강자를 쓰러뜨릴 수 있는 기회는 무방비한 지금밖에 없다.
물론 기습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강자를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안 한다.
하지만.
‘유의미한 피해는 줄 수 있겠지.’
그것만으로도 기습할 만한 가치로는 충분하다.
분명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게 옳은 판단임이 틀림없다.
한데,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과는 정반대로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그게 정령 최선인가?
누군가 그렇게 물어본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니지.’
저 존재와 맞서 싸운다면 다른 건 몰라도 2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나는 내가 그녀의 목을 베고 승리를 쟁취하리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24층은 확실하게 탑에서 사라지겠지.”
나는 아무도 안 들릴 정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본격적으로 맞부딪친다면 NPC건 탑이건 공방이건 상관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거만큼은 기정사실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NPC의 목숨이 아까우냐고 묻는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당장 탑에 나를 집어넣은 개새ㄲ… 아니, 관리자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탑에 있는 NPC의 목숨 따윈 내 알 바는 아니다.
다만 지금은 심장보단 머리가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수십,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 끝에 내놓은 최선의 결과.
나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얼굴을 지었다. 남을 속이는 것에 있어선 도가 텄기에 그녀를 속아 넘기는 것에 있어선 자신 있다.
사뭇 다른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렇게나 늦을 줄이야. 실망했다.”
당장 그녀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면.
저년의 골수까지 뽑아서 이용해 먹어야지.
“히, 히끅! 주군이시여 송구하옵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은 거짓말이라는 듯, 그녀는 딸꾹질과 함께 몸을 한껏 움츠렸다.
마치 포식자 앞에 놓인 먹잇감 같은 모습.
그 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내 말의 여부에 따라 그녀는 아주 유용한 가치를 지닌 떡두꺼비가 될 수도 아니면 빛 좋은 개살구가 될지도 모른다.
그걸 만들어 가는 건 나다.
나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누가 주군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허락했지?”
“그, 그것이….”
“약한 놈을 부하로 둔 기억은 없다.”
“…….”
그저 말만 건넸을 뿐인데, 그녀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숨을 몰아쉬었다.
어지간히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연기를 이었다.
“참고로.”
“……?”
“여기에 있는 놈들은 약해 빠졌었지. 그래서 따분해서 여흥으로 죽였다.”
“으흣!”
괴수들의 시체를 발로 툭 건들며 대꾸하자, 그녀는 몸을 경련했다.
얜 또 왜 이래?
갈수록 상태가 점점 이상해지는 거 같은데.
새빨개질 대로 빨개진 그녀의 양쪽 볼은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 없이 보였다.
농담이 아니라 저거 툭 건들면 터지는 거 아냐?
진짜로 툭 쳐 볼까 하는 욕구가 들 즈음, 그녀는 교태스러운 손짓으로 나풀거리는 치마를 붙잡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하신다면 언제든 힘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5분만 시간을 주신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목을 따서 앞에 대령하겠습니다.”
화려한 기품과 한없이 우아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어지간한 남자라면 저 외모에 속아 넘어갈지도 모르지, 그녀의 입에서 내뱉은 살벌한 이야기만 아니라면 말이다.
“어엉?”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목을 기이할 정도로 꺾었다.
지금쯤 공방에선 내 검을 제련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장인이 피땀을 흘리고 있을 텐데.
그걸 내 앞에서 대놓고 망치겠다고?
웬만해선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이년이 대가리가 깨지고 싶어서 환장했나.
대놓고 살기를 흩뿌리며 노려보자,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소저가 실수를 범했으면 죄송하옵니다!”
“수준은 대충 알았으니 됐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연기를 이었다.
“그 많고 많은 장소 중에서 나를 어떻게 찾았지?”
“주군께서도 농이 지나치시군요. 지금도 당장 그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심오한 기운을 어찌 숨길 수 있겠나이까.”
그녀는 내 팔에 새겨진 문신을 가리켰다.
영문 모를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혹시 저년이 나를 재액이라고 착각하는 이유가….’
포켓 안에 재액의 알을 수납해 놔서 그런 거였나.
설마 했는데 포켓에 넣어 둔 내용물 때문에 나를 알에서 부화한 재액이라고 착각하다니.
그제야 그녀의 태도가 모두 이해되기 시작했다.
‘근데 재액의 알이 도대체 뭔데 저 난리야.’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지.
나를 알에서 부화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알의 정체가 뭐냐고 물어볼 순 없으니.
어쨌건 간에 포켓 안에 들어 있는 건 어지간한 물건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도 시스템에서도 SS급이라고 분류하지 않았던가. 둘리가 나왔었던 알이 S급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름대로 명분을 지어 수긍하고 있을 무렵.
그녀는 양손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그렇게 됐으니, 예정대로 남은 여독은 저쪽에서 푸시지요.”
손가락의 방향이 가리키는 장소에는 누가 봐도 섬뜩한 형태의 문이 있었다.
왠지 저길 따라갔다간 더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
무엇보다도.
내 감이 소리친다.
다른 곳은 몰라도 저긴 따라가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흠, 영 탐탁지 않구나.”
“예?”
“네가 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하더냐?”
“그, 그릇이라니… 제가 감히 그럴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다. 네가 나를 담을 수 있느냐?”
“……아닙니다.”
적당히 머릿속에서 떠오른 말을 내뱉었을 뿐인데,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기회라고 판단한 나는 단숨에 동아줄을 붙잡았다.
“필요해지면 다음에 또 부를 테니, 그때까지는 혼자 다니도록 하지.”
“하오나!”
“이견이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내 물음에 그녀는 순순히 수긍하는가 싶더니, 눈을 희번덕 떴다.
“다만 소저와도 약조해 주시지요. 만일 주군께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때는 저를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알겠다.”
“그럼 다음에 만날 그날을 고대하고 있겠사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녀는 다음을 기약하며 왔던 방향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이 장소에서 그녀의 기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갔나?
저거 확실하게 간 거 맞지?
옛말 중에는 돌다리도 몇 번이고 두들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한참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확신한 나는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후, 시발 중2병 짓도 못 해 먹겠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손에 쥔 나무 막대기를 신경질적으로 부러뜨렸다.
말하는 도중에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닭살이 일어나서 죽는 줄 알았다.
살아생전 탐탁지 않다느니,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느니 그딴 말을 잘도 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신체적 나이는 그렇다 쳐도.
정신적인 나이로는 강산이 백 번 가까이 갈아치우다 못해 산이 민둥산이 되고, 작은 샘이 거대한 해양이 될 정도로 처먹을 대로 처먹었는데, 도저히 맨정신으로 할 말은 아니었다.
다음에도 이 짓거리를 할 바에는 차라리 손에 장을 지지고 말지.
“그래도 딱히 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누가 봤으면 쪽팔렸을 거….”
“…….”
“…….”
말함과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둘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 생각해 보니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 말 할 줄 아는 금수… 드래곤 새끼 한 마리는 있었네.
“둘리야.”
“응? 한별 왜 그런가!”
진지한 안색으로 묻는 나와는 달리 둘리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한다.
“너 어디에서 어디까지 들었어.”
“음… 한별이 괴수를 따분해서 죽였다거나 그릇이 엄청 크다는 것은 들었다!”
“…….”
나 참 환장하겠네.
어디에서 어디까지라는 수준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듣고 있었네.
마치 가장 숨기고 싶은 흑역사가 만천하에 전부 까발려진 기분.
지금이라도 입막음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을 즈음,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TIP. 펫은 주인의 손으로 죽일 수 없습니다! 만일 삿된 마음을 품었다면 포기합시다!〉
나도 안다! 알려 주지 않아도 누구보다도 알고 있다.
꼭 필요할 때는 없다가 이런 쓸모없는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고 있긴.
나는 둘리의 입을 낚아채 꽉 붙들어 잡았다.
“지금부터는 넌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거야. 알겠어?”
“읍읍! 을릏다! 느드 을긋다!”
몸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살기를 직면한 둘리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녀석에게서 확답을 받아 낸 나는 숨을 돌리며 주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산처럼 쌓여 있는 괴수의 시체와 공동의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폐허가 눈에 들어온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환경이었으나,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흐흐흐, 답지 않게 움직였더니만 이게 웬 떡이야.”
보자, 이것들을 전부 옮겨서 공방 놈들한테 팔아먹으면 값어치가 얼마나 되려나.
그리고 24층의 주요 원인이기도 한 방사능까지도 직접 해결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일을 값어치로 계산하려고 해도 쉬이 가늠이 안 될 정도다.
‘크으!’
역시 사람은 좋은 일을 하면 돈이 된다니까.
보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전율이 들었다.
짝!
나는 뺨을 양손으로 세게 내리치며 운을 뗐다.
“우선,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그 거만한 노인네가 어떤 낯짝을 하고 있는지부터 보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