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발상.
내가 지닌 무한의 포켓 속에 방사능의 원인이 되는 물건 자체를 집어넣는다.
그렇게 하면 24층의 골칫거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
그것도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아주 편하게 말이다.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한가?”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번뜩인 의문을 내뱉다 말고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끄덕였다.
아니, 생각해 보면 못할 것도 없잖아.
분명 시스템의 설명에 따르면 무한의 포켓에는 생명체든 무생명체든 용량과는 상관없이 전부 수납할 수 있다고 했다.
만일 설명이 맞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다.
탑이 고약한 면은 더러 있었지만, 시스템 창에 적힌 설명으로 거짓을 고한 적은 없었다.
“금방 드러날 거짓말이라면 하지도 않았겠지.”
나는 방사능을 내뿜는 알에 다가가며 고민을 반복했다.
이걸 확 저질러? 말아?
정말로 내 추측대로 알을 포켓에 넣어 24층을 끝낼 수 있다면 나야말로 싸게 먹히는 꼴이다.
헌데 이런 간단한 트릭을 탑에서도 모르고 있을까.
만일 괜히 건드렸다가 되려 일만 복잡해지면?
아니면 일이 커지다 못해 건드릴 수조차 없게 된다면?
만에 만의 한에 나비 효과가 일어나 곤란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아씨.”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왜 이런 귀찮은 고민을 하고 있어.
이런 걸로 고민하고 쉽게 포기한다면 탑을 등반하는 것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만일 일이 터진다면?
간단한 일이지.
나는 주먹에 힘을 주며 말을 내뱉었다.
“직접 증명해 보인다.”
그게 내가 탑을 등반하면서 잡은 모토다.
미련할지언정 그걸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 정의야말로 내가 튜토리얼을 탈출해 탑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다짐한 내용이니까.
- 평등하게 탑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시작점은 다르다.
언젠가 읽었던 탑 공략집의 한 소절.
이미 다른 플레이어와의 크게 틀어졌다. 그러니 직접 내 손으로 증명한다. 나만의 가치를, 강함을, 가능성을 말이다.
그러니 될 대로 되라지.
“쓰읍, 그럼 간다.”
숨을 크게 들이켜며 재액의 알을 향해 손을 뻗는다.
능력을 발휘하자 팔에 새겨진 문신에서 강렬한 섬광이 일어난다.
점점 광량을 밝혀가던 섬광은 주체하지 못하고, 공동 전체를 섬광으로 물들였다.
이윽고.
〈재액의 알(SS)이 수납됩니다.〉
거창한 과정과는 대조적이기 짝이 없는 간단한 묘사.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이렇게 간단히 된다고?’
물론 안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안 될 일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제약이나 패널티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없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뭐, 어때.
복잡할 것 없이 깔끔하게 해결했으니 나야 좋을 일이다.
그 증거로 재액의 알이 사라지니, 강력한 기세로 내뿜던 방사능도 깔끔히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도 기존에 방사능에 오염된 대지까지 정화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것만 해도 어디야.
기대했던 것 이상의 상황에 만족하고 있을 그때였다.
⎯⎯⎯!
공동의 저편에서부터 섬찟한 기운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파찰음이 들려왔다.
기척을 최대한 집중해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
이윽고 파찰음은 삽시간에 커졌다.
평범한 청력을 지닌 이도 쉽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뭐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직감한 나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을 뽑기 위해서 손을 올린 나는 문득 허전함을 깨닫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 맞다. 공방에 맡겼었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날파리를 상대할 땐 잘도 있던 게 꼭 이런 거물을 상대할 때만 없다니까.
다시 공방에 들러서 검을 갖고 올까도 싶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바꿨다.
이러는 동안에도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점점 존재감을 과시해 나간다.
상대가 아직 정체가 드러난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빠지고.
닭살이 우수수 돋아난다.
“후… 존나 떨리네.”
나는 급한 대로 바지의 밑단을 찢어 주먹에 칭칭 감으며 호승심을 불태웠다.
튜토리얼에 있는 천 년 동안 다양한 유형의 괴수들과 상대하면서 여러 가지를 깨달은 게 있는데, 지금까지 분전을 겪게 만든 괴수들을 특이하게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존재감.
맞붙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상대를 긴장시킬 만한 한방을 지녔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놈은 심상치 않았다.
존재감 하나만큼은 튜토리얼에서 상대했던 어느 괴수한테도 꿇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리라.
“떨리다 못해서 부랄까지 떨리는 건 간만이네.”
이러다가 없는 애까지 떨어지겠어.
농담을 내뱉기도 잠시,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을 지었다.
상대가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는 강자이니만큼 이번만큼은 장난으로 대할 순 없었다.
“둘리야. 지금 바로 해.”
“알았다!”
때맞춰 건넨 신호에 둘리는 공동의 천장을 향해 흑염의 브레스를 뿜었다.
상당한 화력에 의해 일순 공동이 대낮처럼 밝아진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수십, 수백의 괴수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워어, 무슨 개미 떼도 아니고 뭘 그리 뭉쳐 있어.”
나는 감탄사를 흘리며 허릿심에 힘을 줬다.
이걸로 상대의 위치는 전부 파악했다.
남은 건.
“한 놈, 한 놈 정성 들여서 죽도록 패는 거지.”
입가에 번지는 능글스러운 미소를 삼킨 나는 지면을 박차고 괴수들을 향해 포탄처럼 날아갔다.
단순히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포탄이 아니었다.
빠르게 날아가는 가속력을 붙여 정권을 내찌르자, 한 방에 수십 마리의 괴수가 피떡이 된 채 쓰러진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이걸로 마무리였겠지만, 쓰러진 괴수들은 무덤덤하게 일어났다.
그걸로도 모자라 괴물 같은 재생력으로 부상이 수복된다.
‘역시 여간내기는 아니라는 건가.’
얼굴에 묻은 피를 손으로 스윽 닦으며 머리를 굴렸다.
상대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무엇을 목적으로 이곳에 나타난진 모른다.
그렇지만 미지의 존재라는 이유로 꼴불견스럽게 도망치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누가 신호를 준 것도 아닌데, 수십 마리의 괴수가 이쪽을 향해 한꺼번에 돌격한다.
“오냐, 누가 먼저 나가떨어지는진 한번 해보면 되지.”
〈자이언트 종족의 반지(B+)를 해제합니다.〉
나는 넘치는 힘을 억제하기 위해 착용하고 있던 아티팩트마저 해제한 채 주먹을 휘둘렀다.
한 방이 사지에 내몰만한 힘을 지닌 괴수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상하좌우로 덮치는 그 상황에선 치밀한 계산이나 교묘한 수작 따윈 헛수고였다.
그딴 계산을 할 시간에 주먹을 한 번이라도 더 내지르는 게 이득이었기에.
피가 튀기는 전투는 간만이라 그런지 엔도르핀이 쉼 없이 분출한다.
쫘아아악!
괴수의 괴수가 분수처럼 솟아나고 피가 흩뿌려진다.
그야말로 원초에 가까운 막싸움.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가장 먼저 기절초풍할지도 몰랐으나.
나한테는 제집처럼 익숙한 광경이었다.
천 년에 가까운 튜토리얼, 이게 바로 내가 지닌 강함의 본질이었으니까.
“우선 한 놈… 아니, 열 놈인가 스무 놈인가. 쓰읍, 막 싸우다 보니까 모르겠네.”
괴수들의 시체 위에서 개수를 세다 말고, 오른손으로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바닥을 접으며 괴수들에게 말했다.
“야, 멀뚱멀뚱 보고 뭣들 하고 있어? 감질나려고 하니까. 이참에 한꺼번에 덤벼.”
* * *
전투가 시작된 이래.
나는 간만에 본능이 휘두르는 대로 괴수를 손으로 때려잡았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고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시야를 덮치던 피 안개가 가시자, 폐허가 된 일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엉망진창.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공동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백용의 갑옷의 능력을 사용해 몸에 묻은 피를 깨끗하게 씻어내며 주억거렸다.
“결국 이것들은 뭐 하는 놈이야.”
직접 주먹을 맞대고 상대했던 나로선 확신할 수 있었다.
괴수들은 24층에서 나타날 만한 수준은 절대로 아니라고.
무엇보다도.
“맨 처음에 느꼈던 존재감은 이놈들이 아니라는 것이지.”
분명 지금까지 상대한 괴수들은 내 진심을 끌어낼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들이 튜토리얼에서 상대했던 괴수보다도 강했냐고 물어보면 나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절대 아니지.’
처음에 느꼈던 존재감은 이것들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있었다.
그저 기척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서게 만드는 기분.
“여간 놈이 아니라는 건가.”
나는 지면에 떨어진 괴수의 뿔을 검 대용으로 붙잡았다.
불과 수십 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마치 내가 층을 이동할 때마다 느끼는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차가운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후후, 상상 이상이네요. 혹시나 몰라서 부하들을 앞장세웠는데 벌써 일이 이렇게 되다니.”
차원을 뚫고 나타난 존재는 우아한 웃음을 내뱉으며 이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절로 감탄이 나올 만한 고혹적인 외모.
보는 것만으로도 남녀불문하고 반해 버릴 만한 외모였으나 등에 달린 두 쌍의 날개만이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상대의 기척을 확인한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뭐 저런 숫제 괴물이 다 있어?’
물론 여간 놈이 아닐 거라는 예상은 했다.
한데.
이렇게 마주하니 약간의 불안감이 스멀스멀 치고 올라왔다.
내가 지닌 힘이라면 완전히 박살 낼 수 있지만, 탑의 억제력으로 인해 본래의 상태에서 절반의 힘도 내지 못한다.
불리하다곤 할 수 없으나 승산을 장담할 수도 없다.
공방에 맡기고 온 검이 다시금 떠오를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무기를 놓고 왔다는 핑계 하나로 내가 저년한테 질 거 같냐고?
“개소리도 풍년이지.”
쫄리면 뒈지시던가.
언제 내가 싸울 때 가능성을 따지면서 상대한 적이 있었나.
방심은 안 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자세를 취하려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존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는 더 일찍 배알하려고 했으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생겨 늦은 소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전에 외람되옵니다만, 죽음을 무릅쓰고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당신은 재액의 알에서 부화하신 저의 주군이 맞으시옵니까?”
“네?”
아닌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