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자, 자네 지금 뭐라…”
“아저씨는 거기에서 보고만 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뒤에서부터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한 채 정면으로 나아갔다.
길게 늘어뜨린 검이 바닥을 쓸며 긴장감을 만든다.
마치 늑대와 같이 생긴 괴수들은 나를 노려보면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놈들을 보며 나는 실소를 흘렸다.
‘이놈들이 어중간한 플레이어들보단 훨씬 낫네.’
그래도 괴수들은 자신의 주제라도 알지, 그놈들은 주제 파악도 전혀 못하잖아.
뭐, 그래 봤자 결과는 변함없을 테지만 말이다.
괴수와의 사이에서 긴장감이 돌기도 잠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괴수와 나는 동시에 움직였다.
“크르릉!”
하울링과 함께 괴수의 주둥이에서 유황 냄새가 진동한다.
입에서 잔뜩 머금은 유황은 어느새 시뻘건 화염으로 바뀌어 이쪽을 향해 파도처럼 쏟아진다.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익을 것 같은 온도에 내 뒤에 숨어 있던 남자에게서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나는 간단히 무시한 채 검을 앞으로 내세웠다.
촤악!
정면으로 내세운 검에 의해 화염의 파도가 반으로 갈라진다.
어지간한 강철조차도 간단히 녹일 만한 화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 달궈지지 않은 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나는 검을 아련하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튜토리얼에 있던 그놈보단 못하네.”
내가 지닌 검은 튜토리얼에 있을 당시에 상대했던 괴수의 뼈를 갈아서 제작했었다.
그놈을 잡기 위해서 꼬박 몇 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했었는데, 확실히 탑에 들어와 괴수들을 겪다 보니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겠다.
씌이이잉!
검집에서 검을 빼 들고는 괴수들의 정중앙으로 파고든다.
전광석화에 가까운 속도에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린 괴수들은 우악스럽기 그지없는 손톱을 날렸다.
어지간한 철근은 두부처럼 짓이겨질 만한 위력이었으나 나는 콧방귀를 뀌며 검을 360도로 휘둘렀다.
둔탁한 검이 괴수들의 손톱을 찢어 낸다.
“크에에엑!”
한 찰나에 팔을 잃은 괴수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주.
방금 전의 공격보다도 더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 여럿 연출되었지만, 나는 손으로 툭툭 쳐내며 가볍게 무시했다.
고도의 전략이나 블러핑 따윈 전혀 보이지 않는 무작정 달려드는 공격.
“별거 없네.”
나는 무심하게 툭 내뱉었다.
놈들에게선 신경 써서 상대할 만한 가치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끝이지.’
보잘 것도 없는 놈들한테 시간을 낭비할 여유는 없다.
빠른 속도로 놈들의 코밑까지 다가간 나는 심장에 검을 박았다.
내 검에 당한 괴수는 짙은 선혈을 내뱉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군더더기 없는 한 방.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여러 괴수의 목이 잘려 나간다.
단 1분도 안 되어 자리에 있는 괴수를 학살한 나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후우, 생각보다도 꽤 시간이 걸렸네. 그래서 그쪽에 있는 아저씨는 괜찮고?”
“…네, 넵!”
그 광경을 넋 놓고 보고 있던 남자는 내 부름에 황급히 대답했다.
처음 봤을 때는 ‘뭐 하는 놈이지?’라는 눈이었다면 지금은 바짝 긴장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역시 실력 행사만큼이나 대화를 하기에 좋은 건 없다니까.
나는 이터의 권능으로 괴수의 스탯을 흡수하며 그를 훑어봤다.
얼마나 씻지 못했는지 꾀죄죄한 몰골에 지닌 무기는 이가 나간 지 오래였다.
적어도 몇 달은 이곳에서 썩은 듯한 얼굴.
분명 23층의 클리어 조건이라면 일주일만 버티면 될 텐데?
그런 의문이 머리를 스치기도 전에 남자는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탑을 등반하는 분 같은데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잇따른 그의 말을 듣고는 눈을 번쩍 떴다.
어쩐지 뉘앙스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6층에서 만났던 영감이나 와이번처럼 탑에 속한 자였나.
비유하자면 NPC 격인 존재.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부담스럽게 뭘 그렇게 반응하고 있어. 갚아야 할 은혜가 있으면 지금 갚으면 되지.”
“네?”
내 말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손짓으로 배낭을 가리켰다.
“이제 와서 입 닦으려고 하면 곤란하지. 그거 있잖아.”
“이… 이건 안 되오!”
“사내새끼가 뭘 그리 꿍쳐 두고 있어. 잔말 말고 내놔 봐.”
“정말로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안 된다 말이오!”
애절하기까지 한 그의 외침을 무시하고 배낭을 열어 보자, 각종 고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곁으로 보기엔 이리저리 녹이 슬고 전부 찌그러진 고철.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라면 모를까.
고철 속에서는 아득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쩐지 아까 전부터 배낭 속에서 묘한 느낌이 난다 싶었는데 이것들 때문이었나.
고철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는데, 남자는 황급히 손을 놀려서 배낭에 고철을 집어넣었다.
“은인께는 정말 외람된 말이다만. 꼭 이뤄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로 양보할 수 없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니까.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여기에서 이룰 게 뭐가 있어서 저러는 거야.
뭐 그래 봤자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관심이 동했기에 나는 툭 던지듯 질문을 건넸다.
“그건 둘째치고 넌 여기에서 뭘 하는데.”
“그게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찾는 물건이 있어서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데 유일한 연락 수단인 통신기가 토네이도에 휩쓸리는 바람에….”
“그래서 그 통신기를 찾는다고 여길 계속 돌아다니고 있다고?”
“예,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오.”
그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어이없는 웃음기를 흘렸다.
나 참 이놈은 미련한 거야? 아니면 진짜 멍청한 거야?
그의 말대로 토네이도에 통신기가 휩쓸렸다면 찾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했다.
애초에 통신기를 찾는다고 한들 쓸 수 있을지조차 모른다.
‘사람도 저기에 휩쓸리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탑에 속한 놈들은 머리에 나사라도 하나 빠졌나. 만나는 놈들마다 왜 죄다 이 모양이야.
됐다.
이런 정신 나간 놈들하고 계속 대화하고 있다간 이쪽도 머리만 아파진다.
그간 탑에서 겪었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놈들은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고.
그렇게 옆을 지나가려는데, 남자는 대뜸 고개를 숙이더니 인사를 건넸다.
“다소 늦었지만, 감사 인사를 드리오! 대협이 아니었다면 분명 이곳에서 살해를 당했을 터! 아눌드 공방의 이름을 걸고 감사 인사를 드리오!”
“됐어, 사람 쪽팔리니까. 고개는 안 숙여도 돼. 나중에 보상만 적당히 쳐 주면… 음?”
시큰둥하게 반응하다 말고 그의 소속을 머릿속으로 되새기곤 눈을 번쩍 떴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눌드… 아눌드라. 분명 비스무리 한 이름을 최근에 들은 거 같은데?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고민하기도 잠시.
문득 일전에 꺼냈던 둘리의 말을 떠올리곤 손뼉을 마주쳤다,
“아, 맞다!!”
“대, 대협…? 갑자기 왜 그러시오?”
갑작스러운 내 목소리에 남자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어쩐지 아까 전부터 뭔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거 때문이었나.
내 손이 허공을 가르자. 팔뚝에 새겨진 문신에서 연보란 빛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손이 어둠으로 푹 들어간다.
이윽고 팔을 빼자, 한 뼘 크기의 큐브가 손에 쥐어졌다.
혹시 몰라서 22층에서 챙겨 왔던 아티팩트.
튜브의 하단에 작게 쓰여 있는 아눌드라는 명칭을 본 남자는 눈을 번뜩였다.
“대, 대협… 도대체 이건 어디에서….”
“어디에서긴 오다 주웠어.”
“…제가 찾던 것이 통신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거렸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이걸 잃어버려서 거의 반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23층을 돌아다녔다.
발견한 것만으로도 쾌재를 부르기에는 충분하겠지.
그보다도 이곳의 토네이도가 얼마나 강력하길래, 여기에서 잃어버린 물건이 22층에 가 있지?
자잘한 의문은 뒤로하고 나는 귀를 후비며 물었다.
“그런데 이 물건은 도대체 어떻게 되먹었길래. 조금 박살 났다고 층 하나를 난리법석으로 만들어.”
“그, 그게 도난 방지 시스템으로 넣었었는데 그게 잘 작동됐나 보네요. 큼큼, 대협께 민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게 됐소.”
그는 머리를 긁적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푹 숙인다.
원래라면 책임을 물으며 구박하려고 했는데, 저자세로 나오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턱을 긁적였다.
“그래서 아눌드 공방이란 곳은 뭐 하는 곳인데.”
“하하, 탑에는 여러 공방이 있지만 저희들은 그중에서도 제일로 가는 공방입니다! 오죽하면 웨이팅이 몇 년 단위로 쌓여 있을 정도니 말은 필요 없을 정도요!”
어지간히도 자신이 속한 공방에 대한 프라이드를 가진 듯한 모습.
내가 호기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자, 그는 눈을 번뜩이며 말을 덧붙였다.
“아! 대협께서는 저를 구해 주셨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혹시 맡기실 물건이 있다면 저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제련해드리겠습니다!”
강한 자신감이 돋보이는 그의 대답.
그러려니 생각하면서 넘기기도 잠시, 나는 남자의 앞으로 검을 건네며 물음을 건넸다.
“그렇다면 이 검을 날카롭게 제련할 수 있겠어?”
“흐음… 잠시만요. 한 번 살펴보겠소.”
그는 가방 속에서 꺼내든 안경을 끼고는 내 검을 면밀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가 대장장이로서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한들.
괴수의 뼈를 이용해서 수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검의 형태로 최대한 갈고 닦은 게 지금 갖고 있는 내 검이다.
나조차도 실패했는데, 이 남자가 가능할 리는…
“곁으로 보기에는 검인 줄 알았는데 괴수의 뼈로 만들었구만, 다소 시간과 인력을 필요로 하겠지만 못할 거는 없소.”
“그래, 나도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 어? 지금 뭐라고?”
잠깐만 내가 잘못 들었지?
방금 전에 이상한 환청이 들린 거 같은 느낌이…
“된다고 했소. 아눌드 공방의 기술력이라면 대협이 건네주신 검이라도 레이피드든 단검이든 전부 가공할 수 있소. 설사 젓가락이라도 말일세.”
…이게 진짜로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