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바짝 굳은 채 글씨를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무심하게 입을 뗐다.
“에라이, 도대체 뭔지 못 알아보겠네.”
찬찬히 읽어 보고 싶어도 어지간히 악필이라 뭔지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탑에서는 어떠한 문자라도 자동으로 번역이 되어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비유하자면 일종의 번역기와 같은 시스템.
한데, 애초에 이걸 글씨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아무리 좋게 봐줘도 지렁이가 몸에 먹을 묻히고 기어 다닌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정사각형으로 된 큐브는 이리저리 쳐다봐도 당최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시스템에서도 별 반응이 없고.”
뭔진 몰라도 꽝이네.
그것도 전혀 쓸데도 없는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대로 큐브를 땅바닥에 패대기치려는데, 어느샌가 옆까지 다가온 둘리가 큐브를 직시하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음… 아놀드 일파의 통신… 수단으로써….”
“뭐야? 너 이거 읽을 수 있겠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녀석의 능력에 화들짝 놀라며 바라봤다.
그러자 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뭇거렸다.
“너무 악필이라서 어렵긴 한데! 둘리도 읽을 수 있다!”
아니, 이게 그림이 아니라 글씨였어?
상식적으로 이걸 읽을 수 있다고?
그저 놀라운 상황에 나는 입을 쩌억 벌리며 눈매를 가늘게 떴다.
“지금 할 거 없다고 구라 치는 거 아냐?”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많이 이상한 글씨긴 하지만…… 둘리는 정말로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 둘리는 큐브에 적힌 내용을 띄엄띄엄 읽는다.
해독에 있어서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둘리의 말에 따르면 큐브는 아놀드라는 집단에서 쓰이는 통신 기구인 듯싶었다.
‘고작 해봤자 통신 기구가 22층에서 중력을 이렇게 만든다고, 그것도 부품이 쪼개진 상태로?’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둘리의 발언에는 신빙성이 의심스럽긴 했으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저게 통신 기구니 뭐니 하더라도 다룰 줄을 모르는데, 괜히 만져 봤자 박살 나거나 운이 좋으면 고장 날 뿐이다.
갖고 있으면 언젠간 쓸 일이 있겠지.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하등 쓸모없는 기계는 중요치 않았다.
〈23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것보다 곧바로 나타날 다음 층이 중요하지.
나는 포켓 안에 물건을 넣어 두고는 다음 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 * *
〈23층입니다.〉
〈이번 층의 컨셉은 재해- 토네이도입니다.〉
〈23층의 고유 패널티로 인해 착용하신 무구나 지니신 아티팩트의 효과가 70% 감소합니다.〉
〈일정 조건을 클리어하시거나 일주일 동안 버티시면 됩니다. 그럼 건승하기 바랍니다.〉
23층은 수풀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협곡과 같은 풍경이었다.
자칫 발을 잘못 내디뎠다간 끝도 한도 없는 곳으로 추락할 것 같은 비쥬얼.
이런 살풍경이라면 탑의 다른 층에서도 여럿 본 적 있지만, 그것들과의 차별점은 분명했다.
휘이이잉!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떠밀려 내려갈 듯한 강풍이 분다.
거기에서 끝나면 또 모를까.
내 시선이 닿는 끝에는 수십,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토네이도들이 난무했다.
토네이도는 진공청소기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으아아! 두, 둘리 휘말린다!”
막강한 위력의 바람 세기에 하늘을 날던 둘리는 아연해하며 날개를 휘젓는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둘리의 몸은 강풍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자연을 이겨내기에는 해츨링의 짧은 날개로는 역부족이었다.
“뭐 해?”
걷잡을 수 없이 날아가기 전에 나는 둘리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하, 한별! 고맙……”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놈이 토네이도 하나에 쓸려 나가고 있어? 허약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넌 나중에 나랑 특훈이니까 그런 줄 알아.”
“…….”
특훈이라는 말에 둘리의 얼굴은 토네이도에 휩쓸려 나갈 때보다도 더 어두워졌다.
그러기도 잠시, 녀석은 도리질을 힘껏 하며 내 말을 부정했다.
“나, 난 괜찮다! 특훈을 할 바에는 차라리 토네이도와 맞서겠다!”
“진짜로 맞설 수는 있고?”
“……그, 그건 아니지만! 한별은 나를 못 믿겠나!”
“어, 그럼 너라면 믿겠어?”
“부정하지 못하겠다!”
얜 또 뭐라는 거야?
아까는 살려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놔 달라고?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둘리의 머리를 내려쳤다.
“넌 일단 나중에 보자.”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번 층을 클리어하는 것.
플로어의 클리어 조건이 명확했던 22층과는 달리 이번 층에서는 불명확했다.
또 21층에서처럼 언제, 어디서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나, 단 한 가지.
지금까지 탑을 지켜봐 왔던 경험에 따르면….
“결국 저기에 가야 된다는 거겠지.”
뻔하네.
얼추 견적도 나왔겠다. 나는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며 스트레칭을 했다.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어떻게든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악을 쳤을 테지만, 그렇게 해서는 영원히 탑을 클리어할 수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 평등하게 탑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시작점은 다르다.
그래그래, 처음 탑에 들어왔을 때의 초심을 잃으면 곤란하지.
내 시작점은 그 썩을 놈의 튜토리얼이었는데,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지금은 약과다.
그런 의미에서 토네이도가 휩쓸고 있는 장소를 직시하며 두 눈을 빛냈다.
타앗!
두어 번의 발돋움 끝에 토네이도를 향해 점프했다.
워낙 강력한 토네이도인지, 바람의 기류에 탔을 뿐인데도 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지간한 플레이어였다면 토네이도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도 전에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으리라.
이런 고통 따위엔 익숙했던 나는 강풍에 휘날리는 바위를 지르밟고 공중을 활보했다.
“옛날에 봤던 무협지에서 하는 허공답보가 대충 이런 건가 봐.”
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지만.
농담을 툭 던지며 피식거린 나는 토네이도의 중심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왠지 모르게 이번 층에서는 특별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23층에 들어온 지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분명 이번 층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떠 있었는데, 어느새 뉘엿뉘엿 졌다.
주변이 뻥 뚫린 협곡이니 경치 하나는 끝내 줬지만, 나는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이 닿은 곳에는 수십 개의 토네이도가 몰려 있었다.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겁이 날 풍경.
그러나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몸을 던졌다.
타앗! 타앗! 타앗!
토네이도의 사이를 가볍게 밟으며 순식간에 활보했다.
한 번의 점프에 뒤에서 날아온 강풍이 더하며 수백, 수천 킬로를 움직인다.
평평한 지면을 걷는 것보다도 안정적인 자세.
처음에도 익숙지 않다 보니 실수로 미끄러지기도 했으나, 같은 상황이 몇 시간째 반복되면 익숙해질 만도 했다.
나는 지겹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후우, 분명 이번 층엔 뭔가가 있는 거 같은데.”
아씨, 이거 진짜로 때려치워야 하나.
내 촉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잘 없었다.
적당한 장소에 피신해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전선에 뛰어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실마리도 보이지 않고 헛바퀴만 돌고 있다 보니, 오죽하면 이번에야말로 착각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냥 포기하고 물러날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할 즈음이었다.
쿠웅!
저 멀리서부터 폭발음과 함께 화마가 솟아오른다.
자연적인 발화는 아니다.
애초에 초목 없이 바위로 이뤄진 황폐한 협곡인데 불이 날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혹시나 싶어 기감을 넓히자, 저 멀리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괴수나 들짐승이 아닌 인간의 형태.
‘그렇지!’
역시 내 예감이 틀릴 리가 없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발로 충격파를 내어 상공으로 튀어 올랐다.
상대방의 위치를 가늠한 뒤, 거대한 바위 조각을 밟고는 방향을 향해 쇄도한다.
상대의 실루엣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간 나는 상황을 지켜봤다.
혹시나 모를 특이점을 확인해 두기 위해서.
막상 상대와 마주쳤는데 이상한 놈이면 곤란하잖아.
‘물론 제압하는 건 별문제 없지만.’
실소를 흘리며 상대방의 기척을 확인하기도 잠시.
나는 눈가를 가늘게 떴다.
어떻게 된 모양인지는 몰라도 그의 주변으로 상당한 숫자의 괴수가 포위하고 있었다.
구해 주지 않았다간 당장에라도 잡아먹힐 듯한 분위기.
“음…. 저걸 구해 줘, 말아?”
보니까. 23층에 있는 것치곤 그렇게 경지가 높아 보이는 것도 아니다.
끽해 봤자 10층대 초반에 있을 만한 실력.
다소 특이한 게 있다면 그의 배낭에는 심상치 않아 보이는 물건이 잔뜩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직접 보진 않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사기꾼… 아니, 남을 많이 속여 본 나로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자신한테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보나마나 상당한 값어치를 지닌 물건이거나 혹은 재화이겠지.
자, 이제 어쩔까.
잠시나마 고민을 반복하던 나는 결론을 짓고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어디 있었나 싶었는데 여깄었네.”
내 돈통이 말이야.
나는 일절의 고민도 없이 싸움의 중심부로 뛰어들었다.
쿠웅!
목적지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착지하자, 남자를 비롯해 괴수들의 시선이 한데 모인다.
괴수들은 경계하는 하울링을.
남자는 내 등을 보고는 경계심과 더불어 약간의 희망이 섞인 목소리로 부른다.
“…그, 그쪽은 뉘시여.”
그의 부름에 나는 입가를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뭐긴 뭐야. 아저씨를 구해 주려고 일부러 왔지.”
그리고.
“그쪽은 등에 짊어진 내 물건 잘 지키고 있어.”
목숨을 구해 준 보상으로는 충분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