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이게 뭐야? 이걸로 끝이라고?”
나는 허공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의아스러운 눈을 했다.
시스템의 말에 따르면 이걸로 21층은 끝.
그 증거로 화염으로 가득했던 필드는 차갑게 식었으며 끊임없이 터지고 있을 것만 같은 활화산은 어느샌가 침묵한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열사병에 걸릴 것 같았던 건 언제고, 온도는 미지근한 수준까지 내려갔다.
정말로?
얼떨떨한 상황에 나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선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탑이 숨겨 둔 계략이나 보상이 있을까 싶어 필드를 샅샅이 뒤져 봤지만, 아쉽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 동안 사태를 관찰하던 나는 머지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까 뭔 상황인지 대충 알겠네.”
아아, 대충 알겠네.
그러니까, 탑에서 말한 일정한 조건이 방금 전에 벌어진 화산 분화였던 셈이지?
확실히 위력 하나로만 보면 어지간한 플레이어들은 괴멸할 만한 수준.
화산 분화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지금까지 탑을 등반하면서 단련한 육체와 아티팩트 등 모든 수를 전부 동원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여타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살아남는다’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을 넘어 화산 분화를 일신의 무력으로 막아냈다.
그 정도 업적이면 층을 건너뛰어 넘기에는 충분하단 뜻이겠지.
“흐흐흐, 탑에서 쉽게 넘어가게 해 주겠다는데 오히려 땡큐지.”
이게 웬 횡재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다음 층으로 넘어가겠냐는 탑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강한 빛기둥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21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 * *
〈22층입니다.〉
〈이번 층의 컨셉은 중력입니다.〉
〈22층의 고유 패널티로 인해 착용하신 무구나 지니신 아티팩트의 효과가 70% 감소합니다.〉
〈5개의 아놀드제 부품을 모아 중력을 정상적으로 만들거나 5일간 버티십시오. 그럼 건승하기를 바랍니다.〉
22층 중력 구간.
탑의 시스템이 알려준 대로 중력이라는 컨셉답게 층에 도착하자마자 막강한 중력이 몸을 짓눌렀다.
마치 팔과 다리 그리고 양어깨에 수백 톤에 달하는 무게추를 달아 놓은 기분이었다.
악을 쓰다 못해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쓰고 있던 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미친 거 아냐? 그나마 나라서 버티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깨라고?”
〈22층의 중력 구간에서는 플레이어의 기량에 따라서 중력의 힘이 달라집니다.〉
그런 의문을 해소하듯 시스템 창에선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에이, 씹.”
이것들이 진짜 돌았나.
저도 모르게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머릿속에서 참을 인 자를 열심히 그렸다.
참을 인 자를 세 번이나 그리면 살인을 면한다고 하는데 기왕이니 한 번 참아 보자.
그래, 기량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달라지는 거라면 다른 플레이어들도 이 정도의 고통일 터.
그러니 버티지 못 할 것은…
“한별! 한별!! 화이팅이다! 둘리는 옆에서 계속 응원하고 있을 테니 더 힘을 내 봐라!”
그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바로 옆으로 날아온 둘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말했다.
난 당장 한 걸음 떼는 것도 번거로운데 둘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날아다닌다.
의아스러운 마음에 둘리를 향해 물었다.
“둘리야. 너 안 무거워?”
“무겁다니? 뭐가 말인가? 난 평상시랑 다를 게 없다!”
“……?”
둘리의 말에 나는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그렸다.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시스템창이 연이어 나타나 설명을 이었다.
〈이런! 펫이 고통을 받는 게 너무 안쓰러워 보이신다고요?〉
〈펫을 사랑해 마지않는 당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주인님을 위해 펫의 무게 X10를 얹어서 중량의 크기를 더할 테니까요.〉
어째 일부로 골탕 먹이기 위해 놀리려는 듯한 시스템창을 본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어깨가 빠질 거같이 아팠는데 뭐가 어째?
펫의 무게까지 더해서 붙인다고?
“내가 언제 이놈 무게까지 들어준대? 됐으니까 원래대로 돌려놔.”
신경질적인 내 말에 시간이 흘러도 시스템 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탑은 펫을 배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어떻게든 떨어뜨리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아까 전에 머릿속에서 참을 인 자를 세 번이나 쓰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었지?
“흐흐,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까짓 것도 못 할 건 없겠네.”
호구가 되느니 살인을 저지르겠다.
나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둘리를 노려봤다.
“히, 히익! 한별, 진정해라! 난 아무 죄도 없다!”
시뻘건 안광에 둘리는 몸을 부르르 떨며 날개를 휘저었다.
어떻게든 내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모양이었으나 나는 콧방귀를 뀌며 양쪽 발에 힘을 줬다.
추진력을 더하기 위해 다리를 숙이고 힘을 모은 상태에서 한꺼번에 터뜨리듯이 점프한다!
파앗!
막강한 중력이 몸을 짓눌렀지만, 나는 근력으로 간단히 무시했다.
한 번의 점프로 활공 중인 둘리의 몸을 낚아챈 나는 씨익 웃었다.
그 미소를 본 둘리는 식겁하며 안색이 새하얘졌다.
“하… 한별? 날 잡아먹진 마라!”
“아까 전부터 나불나불 뭐라는 거야?”
“……?”
“잡아먹긴 누굴 잡아먹어. 너 같은 도마뱀은 구워 먹어도 질기기만 하고 별로 맛없어.”
나는 녀석의 정수리에 주먹을 내리꽂으며 단정지어 말했다.
그러자 둘리는 짧디짧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글썽였다.
“그, 그럼 한별 날 쫓아온 이유는 뭐냐!”
“뭐긴 뭐겠어. 이번 층을 빨리 깨야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등 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목표와의 거리를 대략적으로 계산한 나는 검격을 길게 뻗었다.
씌이이이잉! 콰앙⎯
반달과 같이 길게 뻗어 나간 검풍은 천장의 한가운데를 직격했다.
막강한 위력의 검풍으로 인해 천장은 완전히 힘을 잃고는 폭삭 내려앉는다.
그것과 동시에 중력으로 인해 추락하는 내 몸.
다 같이 떨어지는 잔해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나는 둘리의 몸을 상공으로 던지며 외쳤다.
“저거 주워 와!”
내가 힘들면 다른 놈한테 시키면 된다.
둘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듯싶었으나, 이내 눈을 번뜩이고는 날개를 활짝 펼친다.
떨어지는 잔해들 속에서 녀석은 옥빛을 띠는 원석을 손에 쥐었다.
녀석의 손에 들어간 원석은 일순 휘황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나는 서둘러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이리로 던져!”
“알았다!”
내 명령에 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껏 원석을 던졌다.
그대로 바닥에 추락하기 직전에 원석을 손에 쥐자, 아까 전보다도 더욱 강한 섬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옥색 빛을 띠던 원석이 주변을 훤히 밝히더니, 중력이 아래에서 위로 역전되었다.
거꾸로 역전된 중력.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 새도 없이 나는 무너진 천장의 잔해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중력가속도와 합쳐져 잔해들은 샷건과 같은 흉기가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미치겠네!
안 그래도 중력 때문에 무거워 죽겠는데,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까지 바뀐다고?
뭐가 어떻게 된진 몰라도 하나만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놀드제 부품 수집률(1/5)〉
방금 전에 손에 얻은 물건이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열쇠라는 것을.
나는 억지로 몸을 비틀어 몸을 돌리고는 쏟아지는 잔해를 향해 주먹을 날린다.
강력한 파장에 의해 잔해들 사이에 거대한 구멍이 생긴다.
그 틈을 통해 바닥에… 아니, 천장에 착지한 나는 숨을 다시 내뱉었다.
“대충 알겠네.”
그러니까.
부품을 수집할 때마다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이 달라지는 듯했다.
보니까. 중력이 작용하는 무게도 좀 무거워진 거 같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힘을 낭비할 바엔 빠르게 클리어하는 거밖에 없겠지.”
공중에 떠 있으면서 기감을 통해서 부품의 위치는 대충이나마 파악했다.
그렇다면 그걸 죄다 수집하면 될 뿐이다.
나는 부품 중 절반의 위치를 둘리한테 일러둔 다음, 천장을 박차고 다시 뛰었다.
중력으로 인해 도약력이 다소 부족하지만, 잔해를 지르밟고 부품들을 손에 넣는다.
두 번째 부품을 손에 얻을 때엔 가로로 중력이 바뀌고.
세 번째엔 대각선으로 중력이 바뀐다.
네 번째엔 지금까지 줄곧 무거웠던 중력이 역행되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가벼워졌다.
그야말로 복잡함의 극치.
나는 거의 종일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 마지막 다섯 번째 원석을 손에 얻었다.
“후우, 힘들어 뒈지는 줄 알았네.”
나는 원상 복구된 중력을 확인하며 식은땀을 훔쳤다.
온종일 상하좌우로 중력이 바뀌고, 천장과 지면이 구분이 안 되는 벽을 박살 내면서 주변은 개판이 된 지 오래였다.
나조차도 너무 심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뭐 어때.’
어차피 끝날 플로어인데 상관없잖아?
내 집도 아닌데 뭔 상관이야.
나는 얼굴에 철면피를 깔기로 했다.
이렇게 돼 봤자 머리 아픈 건 탑일 테니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나저나 진짜 빡세게 일했네.”
나는 끝내 손에 얻은 부품들을 확인하며 이를 빠득 갈았다.
그 덕에 이번 층 역시 빠르게 넘길 수 있었다.
〈아놀드제 부품 수집률(5/5)〉
〈부품들로 인해 엉망이 된 중력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모든 서버 최초로 22층에서 부품을 전부 모으셨습니다.〉
〈특전으로 부품이 아티팩트로 변합니다.〉
시스템창이 연달아 생겨나는가 싶더니, 가지각색의 빛을 내던 부품은 서로 엉키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열기와 압력 속에서 부품들이 합쳐져, 이윽고 한 손에 들어올 만한 크기의 큐브가 되었다.
큐브를 눈여겨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탑에 대해선 여러 지식을 가진 나로서도 처음 보는 물건.
큐브의 하단에는 바짝 집중해야지 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글을 읽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음,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