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53화 (53/175)

제53화

“주, 죽였다니 무슨 영문 모를 소리를…”

“아,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놈의 반응을 지켜보던 나는 뒤늦게 실수를 알아차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없던 일로 치자고.”

“…….”

“아까까지 한 말은 농담이니까 별로 신경 쓰지 마.”

사실은 없던 일이다.

그렇게 치부하고 넘기려는데, 놈은 잔뜩 분노한 얼굴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걸 지금 내게 믿으라고 하는 말인가. 괴수의 봉인은 오로지 내 피에만 반응한다. 한데 반응이 없는데 네놈의 말이 농담이라고? 아무래도 한참 얕보인 모양이군.”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듣자 하니 말의 앞뒤가 안 맞아서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이 정도로 미친놈이었나?

“잠깐만, 네가 말했잖아. 그 괴수는 조종하기 힘들어서 바위산에 봉인해 놨다고,”

“분명 그랬었지.”

“근데 그 괴수를 쓰러뜨린 나를 네가 직접 상대할 수 있긴 하고?”

“…으음?

핵심을 파고들자 놈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알았다는 얼굴.

우습기까지 한 그 꼴을 지켜보던 나는 맥이 빠지는 기분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얜 또 뭐 하자는 거야?

아무리 나를 쓰러뜨리는 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해도 이 정도로 간단한 이치를 잊을 정도로 멍한 놈이었나.

이런 놈이 왕가의 탈환을 꾸리고 있다고.

좆 까는 소리나 하지 말라고 해라.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

간만에 손맛이 날 놈을 상대하나 싶었는데, 막상 까고 나니 이런 놈일 줄이야.

촤악!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어서 놈을 향해 나아간다.

놈 역시 대응하기 위해 주특기인 혈술을 발동했으나.

잇따른 전투로 인해 이전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기척이다.

처음 놈을 상대했을 때가 횃불이라면.

지금은 흩날리는 바람에 의해 꺼지기 직전의 촛불. 확실히 방금 전에 비하면 놈의 몸은 앙상해졌다.

“원망은 하지 마.”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바닥을 강하게 박차고는 뛰어든다.

일순간 사라진 내 신형에 놈은 극히 당황한 안색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급히 몸을 지키기 위한 혈술을 발휘하는 듯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간격 안에 들어간 나는 검을 휘둘렀다.

씌잉!

단조로운 검격과 함께 놈의 머리는 허무하리만치 바닥에 떨어졌다.

놈은 뒤늦게 혈술을 사용해 떨어진 머리를 목에 봉합하려는 듯했으나, 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주먹으로 박살 냈다.

아무리 떨어진 목을 붙일 정도로 기행을 펼치는 놈이라도.

‘대가리 자체가 박살 나면 아무것도 못 하겠지.’

내 예상이 틀어 맞았는지 놈에게서 풍기던 피의 잔향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주 깔끔한 결말이다.

〈흡혈귀의 수장을 쓰러뜨림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했습니다.〉

〈승리 포인트를 얻습니다.〉

〈획득한 포인트가 정산되어 랭킹권에 반영됩니다.〉

〈현재 등수: 신한별 1위, +1034P〉

놈을 쓰러뜨렸다는 증거로 시스템 창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수백에 가까운 포인트가 한꺼번에 들어오며 1위로 급부상했다.

일전에 괴수를 쓰러뜨렸을 때보다도 높은 포인트.

바로 밑에 있는 순위권과 비교해도 상당한 격차였다.

‘이 정도로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이번 층이 시작될 때부터 정해진 결과였다.

다른 플레이어 앞에서 그렇게 큰 소리를 내놓고 이 정도 결과도 못 내놓는다면 그것대로 못 볼 꼴이니까.

게다가.

“이것도 못 하면서 구원자 행세를 하기엔 쪽팔리지.”

따지고 보면 그것도 그럴듯하게 꾸며 낸 구라지만.

적당히 둘러댄 거짓말을 진짜로 이룰 줄은 몰랐지만, 사소한 건 뭐 어떤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결국 해냈으면 된 거잖아.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순위로 이번 층을 클리어했으니, 과연 탑에선 어떤 보상을 내려 줄지 기대됐다.

“흐흐, 진행자 그 새끼가 어떤 낯짝을 지을지 벌써 기대되는구만.”

나는 히죽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최종 보스로 보이는 놈도 클리어했겠다.

이번 층이 막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멀리 떨어진 위치였으나, 다가오는 사람의 정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성녀?”

갑자기 저 녀석이 여길 왜 와?

아까 전에 흘낏 봤던 부상으로는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텐데.

그렇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목적이 있을 터.

그녀가 움직이는 속도만 보면 한참 걸릴 듯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움직이면 되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그녀가 서 있는 장소까지 점프했다.

쿠웅!

단번에 그녀의 앞에 도달한 나는 손으로 메케한 모래 먼지를 날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얼굴을 본 그녀는 극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한별 님? 흡혈귀는 어디에?”

처참하게 변한 현장을 둘러보던 그녀는 경계심을 쉽사리 거두지 못하며 물었다.

뜬금없이 왜 저런 표정을 짓나 싶었는데, 그것 때문이었나.

그녀의 물음에 수박처럼 으깨진 흡혈귀의 머리를 가리키며 답했다.

“네가 찾는 놈이라면 저기에 있네.”

“…흡!”

으깨진 형체를 알아본 성녀는 입가를 두 손으로 가리며 경악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피가 반쯤 섞였다고 해도 그녀의 일족.

일족의 수장이 처참한 꼴이 되어 죽었으니, 나를 원망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건넬 말을 신중하게 선택하려고 하는데, 그녀는 내 다리를 붙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래, 너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저 새끼가 먼저 덤볐으니 마땅한… 어? 지금 뭐라고?”

“비록 제가 흡혈귀의 피를 갖고 있다지만, 한별 님께서는 그런 저를 알면서도 차별 없이 대해주셨잖아요.”

어…. 사실 아무것도 몰랐는데?

“게다가 아무런 보상도 원치 않은 채, 저희들을 구원해 주셨으니 감사한 일이죠.”

“그, 그런가?”

뭐 사실 너희들이 보상을 주지 않아도 탑에서 지급할 보상을 노리고 한 일이다.

그걸 그대로 밝힐 순 없는 노릇이니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저쪽에서 멋대로 은혜를 받았다고 오해하는데 그걸 구태여 정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눈망울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품에서 꺼낸 물건을 내게 건넸다.

“저… 딱히 드릴 건 없지만… 그래도 제 마음이라고 생각하시고 받아 주세요!”

그녀가 건넨 것은 은으로 된 작은 크기의 로사리오.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물건을 심드렁히 받았다.

들고 다녀봤자 짐만 될 거 같은데….

〈은빛의 로사리오(B)〉

- 성신 카르텔의 갸륵한 은혜가 깃들어 있는 아티팩트. 삿된 힘을 물리친다.

- 카르텔의 은혜가 맞닿아 있는 층에서 유용하게 쓰일 거 같다.

“어?”

역시 비싼 물건은 한 번 봐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법이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보상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쾌재를 불렀다.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뭐하러 이런 걸 다 줘. 어려운 사람을 구하고 돕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마땅히 할 일을 하고 보상을 바라는 것은 신께서도 바라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그래도! 이걸 건네준 사람의 성의를 거절할 순 없으니. 이건 내가 잘 받아 뒀다가 또 어려운 사람들한테 쓰도록 할게”

암,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면 그것대로 벌 받을 짓이다.

옷으로 로사리오를 닦아서 주머니 속에 고이 넣어 두자, 그녀는 환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도 아주 잠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럼 한별 님께서도 이곳에서의 볼 일을 전부 마쳤으니, 다른 곳에 가시게 되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겠지.”

나는 의문형으로 대답했다.

이번 층도 이걸로 끝일 테니, 곧 다음 층으로 올라가게 되리라.

헤어짐을 직감했는지 그녀는 시원섭섭하단 듯이 내 손을 놓는다.

“하긴 그렇겠죠.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은 이곳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많을 테니까요.”

아쉽지만 놓아줄 수도 없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그녀는 기도하며 내 안녕을 기원했다.

“따라갈 순 없겠지만, 저도 이 자리에서 한별 님의 앞길이 무탈하길 빌게요.”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눈앞으로 이번 층이 끝이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17층~19층의 통합 층을 클리어했습니다.〉

〈플레이어들의 업적을 정산합니다.〉

〈20층으로 이동합니다.〉

* * *

〈20층은 휴게 공간입니다.〉

〈휴게 공간은 플레이어님의 업적을 기반으로 구성이 됩니다.〉

〈1시간 30분 뒤에 21층으로 전이됩니다.〉

이전 층을 클리어 한 직후, 휴식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갔다.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꿈도 꾸지 못할 환경이지만, 압도적인 성적으로 클리어한 덕에 얻을 수 있었다.

비록 노천 온천이라고 부를 정도로 거창한 것은 아니었으나.

꽤나 그럴듯하게 꾸며진 온천은 노곤해진 내 몸을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좋은 점이 있다면.

“흐흐, 엄청 넓어졌다는 거지.”

나는 넓다 못해 쾌적한 온천의 규모를 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일전에는 욕실이 좁아서 한 명밖에 못 들어갔었는데, 지금은 대여섯 명은 들어갈 정도로 크기로 커졌다.

그래서 겸사겸사 둘리도 불렀었는데…….

“한별, 한별! 봐라! 욕조가 엄청나게 넓어져서 이젠 헤엄도 칠 수 있다!”

첨벙첨벙, 어디에서 들고 왔는지 둘리는 허리에 튜브를 끼고는 팔과 날개를 흔들었다.

사방팔방으로 물방울이 튀기며 단숨에 물이 흘러넘친다.

‘그래, 정신연령으론 아직 애인데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역경을 치렀다고 하더라도, 해츨링은 해츨링.

원래였으면 드래곤의 둥지 안에서 보호받고 있을 나이였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애새끼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비누를 주워 둘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정확하게 들어간 강직구에 머리를 맞은 둘리는 기절한 채로 온천 위를 둥둥 떠다녔다.

“하여튼, 정신 사납게 하긴.”

꼭 이렇게까지 경고를 해야지 알아듣는지 모르겠다니까.

이제야 조용한 환경 속에서 온천을 즐기려고 할 때쯤이었다.

〈개인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한가로이 커뮤니티를 둘러보고 있는 도중.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인 쪽지?

탑에 이런 기능도 있었던가.

아니, 그 이전에 나한테 쪽지를 보내올 상대가 있었던가.

문득 드는 의문에 쪽지를 확인했고.

[유채아]- 한별 씨^^ 커뮤니티에서 신협 팬클럽이 만들어졌던데 알고 계시나요?

“푸읍! 쿨럭쿨럭, 시발 팬클럽은 또 뭔데.”

나는 입에 머금고 있던 콜라를 뿜어내며 불길함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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