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52화 (52/175)

제52화

왕자를 통해 정보를 획득한 나는 곧바로 목적지로 향했다.

왕궁을 침략한 흡혈귀들의 목적은 이 인근에 터를 잡은 왕국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그들만의 터전을 꾸리는 것.

그리고 왕가에서 오로지 왕자만을 살려 두고 허수아비로 내세움으로써 주변 국가로부터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결과적으로는 과거 흡혈귀가 잃었던 영광을 도로 되찾는 것이 그들이 목적이었다.

“대충 그런 뉘앙스였지?”

나한텐 중요한 일은 아니라서 자세한 내막까진 듣지 않았지만, 몰라도 상관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놈들은 내 손으로 때려잡을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누누이 말해 두자면 쓸모없는 정의감이나 연민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이유는 처음부터 하나뿐.

‘흡혈귀의 대장뻘이라는 놈을 쓰러뜨리면 얻을 포인트로는 충분하고도 남겠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욕망으로 뚤뚤 뭉친 채, 목적지에 도달하자 그곳에는 온몸이 핏빛으로 물든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부상투성이인 성녀.

남자에게서는 당장에라도 죽이려는 듯이 흉흉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짧은 판단 끝에 나는 성녀의 머리를 작살내려는 남자의 발을 걷어찼다.

파지지직!

가공할 만한 힘의 격돌에 놈의 주변으로 핏방울이 공진했다.

최초의 격돌.

남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호오, 인간 중에서 이런 실력자가 남아 있을 줄이야. 이만한 실력자는 진즉에 전부 뒈진 줄 알았는데 이건 꽤나 놀라운 일이로군.”

“이 새끼는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앞으로 파고들었다.

한 번에 끝내려는 심상으로 정권을 내질러 놈의 두개골을 박살 내려 했으나.

놈의 주변으로 일렁이던 핏빛에서 더욱 강렬한 빛을 내뿜더니, 내 주먹이 쿠션처럼 빛에 집어삼켜졌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에 나는 지면을 지르밟으며 손을 뿌리친다.

강인한 악력에 의해 고밀도로 뭉친 빛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상대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인간이라면 전부 아둔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보기보다 감이 좋아 보이는구나. 내 혈술에 무작정 뛰어들지 않은 것은 칭찬해 주마.”

“혈술?”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뒤에 있던 성녀가 속삭이듯이 설명을 덧붙였다.

“흡혈귀 일족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전 같은 것이에요. 자기 피나 주변의 피를 활용해 사용하는 기술인데 조심하세요.”

아아, 그런 거였나.

어쩐지 아까 전부터 놈의 주변으로 피가 맺혀 둥둥 떠다닌다 싶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전투로 인해 죽은 기사의 시체에는 피를 한 방울까지 뽑아 갔는지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미라가 되어 있었다.

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수십 구.

보이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수백, 수천 구는 족히 넘어가리라.

내가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흡혈귀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제안을 건넸다.

“크흐흐, 네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드디어 알아챘나 보군. 간만에 나를 즐겁게 만들었으니 상으로 거기에 있는 요망한 계집을 내놓고 무릎을 꿇고 조아리면 특별히 목숨은 살려 주마.”

흡혈귀는 제안하며 양팔을 펼쳤다.

그러자 일대에 있는 모든 피가 뭉치며 거대한 구를 생성해냈다.

가히 하늘 전체를 가릴 정도의 규모.

그 광경을 바닥에 쓰러져서 바라보고 있던 성녀는 아연한 얼굴로 내 옷깃을 붙잡았다.

“저…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니까 한별 님이라도 도망가세요. 상대는 천 년이나 묵은 흡혈귀… 처음부터 승산은 없었어요.”

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덤덤하게 하는 듯 보여도 옷깃을 붙잡은 손은 미세하게나마 떨렸다.

“그래? 그런 거치고는 상판대기를 보니까. 그다지 괜찮은 거 같진 않은데? 거짓말을 치는 자세가 처음부터 끝까지 글러 먹었네.”

“……!”

“타인을 속이려면 먼저 자신부터 속였어야지.”

그런 어설픈 연기로는 속지 않는다.

게다가.

“곁으로 보기에만 웅장해 보이지 저거 자체는 별거 없거든.”

“네넷? 도대체 그게 무슨 뜻……”

“보고만 있어. 직접 보여 줄 테니까.”

나는 웅장한 규모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자산의 힘을 과시해 나를 굴복시키려는 생각이었겠지만, 그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면 한참 글러 먹었다.

나는 검을 뽑아 들며 놈이 있는 방향으로 한 발짝 걸어 나갔다.

뽑은 검을 양손으로 붙잡고는 상단에서 하단으로 구를 가른다.

씌이이이잉! 쿠⎯⎯웅!

날카로운 절삭력과 함께 하늘에 부유하던 구는 반쪽으로 쪼개져 지면에 떨어졌다.

상상을 아득히 벗어난 무위에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성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혼란스러운 지금이 기회.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지면을 박차고 핏빛의 구가 떨어진 장소를 지났다.

혈술로 인위적으로 만든 물질이라 그런지, 그 속을 지나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모공 하나하나에 피가 들어가 세포를 헤집는다.

일반인이었다면 상당한 고통을 못 이기고 쇼크사하고도 남겠지만, 상관없다.

이 정도 고통이면 익숙하다 못해 평상시와 같았기에.

파밧, 핏빛의 안개를 무작정 뚫고 나아가자 그곳에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얼빠진 놈의 얼굴이 있었다.

“어, 어째서?”

“뭘 그리 놀란 것처럼 그래? 그렇게 얕잡아 보던 한낱 인간한테 방심한 네 탓이지.”

탓을 할 생각이면 스스로한테 해라.

나는 이번에는 확실히 끝낼 작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놈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뒤늦게 내 검격을 맞받아치기 위해 높은 농도의 피로 만들어진 붉디붉은 검이 그 앞을 가로막는다.

괴수를 사냥하는 것에 특화된 내 검에 비하면 상당히 정교한 짜임새로 만들어진 검.

보기에도 명검이라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나.

“그게 명검이면 어쩌라고.”

명검이든 뭐든 박살 나면 아무 의미 없잖아.

나는 정면으로 뻗어오는 수십 발의 피의 탄환을 맨몸으로 받아내고는 참격을 날렸다.

검의 경로에 놈의 검이 부딪히면서 불티가 튄다.

막상막하라고 불러도 될 만한 힘의 격돌이었으나, 힘겹게 유지하던 균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졌다.

무게의 추는 내게 실렸다.

채앵!

검신을 유지하고 있던 피의 내구도가 닳으며 절반으로 쪼개졌다.

그 영향으로 목표한 궤도가 다소 벗어나긴 했지만, 올곧게 날아간 참격은 머지않아 놈의 팔뚝을 날리고는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다.

“크윽!”

한순간, 빠른 판단으로 몸을 뒤로 날리며 낙법을 시전한 놈은 피를 울컥 토했다.

나름대로 충격을 줄인다고 노력한 모양이지만, 내 힘을 전부 흘려 내기는 무리였다.

“허억허억… 어, 어째서….”

놈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쉰다.

누가 봐도 놀란 표정.

나는 바닥에 떨어진 부러진 검을 발로 박살 내며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어째서긴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 하겠어?”

네가 약한 거고 내가 강한 거다.

입가를 짜악 늘어뜨리며 능글맞은 미소를 짓자, 놈은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것도 잠시.

“젠장! 젠장! 제기랄!! 감히 인간 따위가… 뭣도 안 되는 인간이… 크으윽, 크흐흐… 푸하하하핫!!”

놈은 눈을 깔고 파르르 격앙하다 말고, 그 분노는 이내 희열로 바뀌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놈을 내려다봤다.

‘저 미친놈은 왜 화내다가 갑자기 웃고 지랄이야.’

설마 저 새끼 알고 보니까. 마조히스트 그런 건가.

아무리 마조히스트라도 팔이 절단됐는데 그걸로 쾌감을 느끼기도 하나?

진지하게 성향에 대한 고찰을 하려는데, 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절단된 놈의 팔뚝으로부터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던 피는 거짓말처럼 멈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지면을 잔뜩 적시던 피는 뭉글뭉글 맺혀 허공에 떠오르더니 마치 역재생이라도 한 듯이 제자리에 돌아갔다.

엽기적이기까지 한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혀를 내둘렀다.

“시발, 그 혈술이라는 게 출혈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였어?”

가히 놀라울 법한 상황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자. 놈은 야릇한 미소를 띠며 손가락을 튕겼다.

“꽤나 놀랐나 보지? 그래, 다른 인간은 몰라도 네놈만큼은 이 몸이 직접 나서서 인정하마! 그리고 상처만 있다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따악!

놈이 손가락을 튕기자, 일전의 전투로 인해 생긴 부상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급히 지혈하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댔으나, 피는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크하하하! 이건 가능하면 안 쓰려고 했는데, 잊으면 곤란하지. 혈술은 피를 다루는 기술. 이걸로 네놈도 끝이….”

놈은 의기양양하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으나, 놈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보다도 먼저 이변이 일어났기에.

의도적으로 힘을 주자, 부상 주변의 근육이 수축하며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줄어든다.

그것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그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넋을 잃었다.

“그게 끝이야?”

그럼 이젠 내 차례지?

나는 쥐고 있던 검을 집어던지고는 주먹을 쥐었다.

혈술이라는 능력으로 상처의 봉합과 베인 부상으로부터 자유롭다면, 죽기 직전까지 주먹으로 패면 끝이다.

그 잘나긴 기술이라도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파열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테지.

간단한 해결 방법이다.

“자… 잠깐….”

“싸우는데 잠깐이 어딨어, 병신아.”

순식간에 놈의 코앞에 도달한 나는 놈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미리 바닥에 박아 둔 검의 손잡이를 박차고, 충격으로 인해 날아가는 놈의 머리에 양손을 마주 잡은 주먹을 내리꽂는다.

곧바로 지면에 떨어지는 놈.

가공할 만한 위력에 크레이터가 만들어진다.

지하로 수십 미터.

상당한 깊이까지 파고 들어갔지만, 그것까지도 상관없다.

“후읍!”

숨을 가다듬고 지하를 향해 점프한다.

바로 밑으로 보이는 놈의 인영.

나는 지하의 벽과 벽을 박차며 속력을 더해 놈의 옆구리에 손날을 날린다.

으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갈비뼈가 박살 나는 손맛이 느껴졌다.

어림잡아도 대여섯 개.

이걸로 폐를 찔렀으니 호흡조차 버거울 터.

마지막으로 허공에서 온몸을 비틀어 옆으로 제비 넘기를 하며 회전력을 더한 다음.

놈의 머리를 발로 내리찍었다.

현란한 타격 끝에 저만치 나가떨어진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타격 입은 부위를 양손으로 부여잡는다.

그 짧은 사이에 알아차린 것이다.

나와 놈과의 격차를 말이다.

“쿨럭! 제, 젠장…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힘…이야.”

방금 전의 공격으로 온몸의 뼈가 박살 났는지, 놈은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반쯤 쓰러져 있었다.

혈술인가 뭔가 하는 기술로 최대한 치료하려고 해도 당장은 불가능하리라.

가루가 된 뼈를 수습하긴 어려울 테니까.

누구보다도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는 놈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허억허억,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나.”

위험 부담은 커도 여기에서 일을 그르칠 순 없다.

놈은 뒷말을 중얼거리며 품속에서 흑도로 된 짧은 단검을 꺼내 자신의 심장에 박았다.

“흐흐흐, 다른 놈은 몰라도 이놈만큼은 제어하기 힘들어 봉인했었는데 네놈을 상대하기 위해선 이 정도 위험 부담이야 충분하겠지.”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는 흑도를 타고 화르르 불타올랐다.

흑도에 새겨진 문양에 피가 스며들며 섬광이 발했다.

“크하하! 보거라 네놈을 쓰러뜨리기 위한 비장의 괴수가 지금…!”

놈이 자랑스레 말하고 있을 무렵, 흑도에서 뿜어지던 섬광은 점멸하는가 싶더니 이내 꺼진다.

“어? 이게 왜?”

거짓말처럼 소멸한 섬광에 놈은 심장에서 흑도를 빼며 아연한 얼굴을 지었다.

놈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흑도를 사용해 자신의 심장을 수십 번이나 넘게 찔러 댔다.

상당한 고통을 버텨내며 반복해서 의식을 진행했으나, 흑도의 빛은 계속해서 점멸하다 꺼질 뿐.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허무하리만치 섬광이 사라졌다.

상당한 출혈에 사색이 된 흡혈귀를 바라보며 나는 머쓱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질문을 건넸다.

“일단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네가 말하는 놈이 바위산에 봉인된 괴수를 말하는 건 아니지?”

“네… 네놈이 그건 어떻게…!”

아무래도 정곡이었는지 놈은 두 눈을 번쩍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내가 한 실수를 깨달았다.

“아, 그놈 죽이면 안 되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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