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났다.
짧은 시간 동안 그렇다 할 정도로 변한 일은 없었다.
구태여 손을 꼽으면 왕자를 가뒀었던 독방에선 분뇨 냄새가 지독하리만치 진동하고, 그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성내에서 크나큰 이슈랄 것도 없이 매일 똑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 즈음.
나는 시스템창을 켜서 이번 층의 랭킹을 확인해봤다.
〈현재 등수: 신한별 4등 +711P〉
등수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며칠 새라곤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쉽사리 따라잡지 못할 포인트를 확보해냈다고 생각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1위를 탈환 당한 뒤였다.
그걸로도 못해 순위권은 4등까지 뚝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1위하고는 별로 차이는 안 나네.’
차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의 점수.
따지고 보면 큰 폭은 아니었지만, 놀랄 만한 일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내가 쓰러뜨린 괴수와 맞먹을 만한 강함이나 혹은 비례한 숫자의 괴수를 상대해서 포인트를 얻었다는 뜻이니까.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재빨리 손가락을 밑으로 드래그했다.
그러자 충격적인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17등밖에 안 남아 있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현재 생존자는 17명, 그 짧은 새에 10명에 가까운 플레이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었다.
관점에 따라 겨우 10명이 죽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 수십 명을 간단히 상대할 수 있는 초인이 그만큼이나 죽었다는 거다.
그동안 한 번도 전례 없던 일이었다.
‘분명 이번 층에서는 플레이어마다 차원의 시간대가 다르다고 했었지?’
나는 커뮤니티에서 봐왔던 정보를 머릿속에서 되새김질했다.
이번 층은 말만 단체층이지, 사실상 각자 다른 차원에서 활동하기에 개인층이나 다름없었다.
그 시간대에서 가장 후발 주자로 있는 게 나였고.
며칠 내로 범상치 않은 사건이 펼쳐질 예정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사건이라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보나마나 흡혈귀에 관련된 일이겠지.’
나는 일전에 상대했었던 왕자를 떠올리며,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둘리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한별? 표정이 어둡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문제라… 확실히 네 말대로일 지도 모르겠는데.”
“음…?”
내 말에 둘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영 시원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무렵, 한 손에는 로자리오를 쥔 성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안에 들어선 그녀는 둘리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손잡이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 제가 방해한 거 같은데 다시 나가 볼까요?”
“방해는 무슨, 상관없으니까 그대로 들어와. 잘됐네, 안 그래도 너한테도 물어볼 게 있었거든.”
“물어보실 게 있다고요?”
내 말에 관심이 동했는데 성녀는 손잡이를 놓고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저한테는 뭐가 궁금하신가요?”
“어, 다른 건 아니고 흡혈귀라는 종족에 대해서 궁금해서.”
“……!”
챙그랑!
뜸 들일 것도 없이 직구에 가까운 질문에 그녀는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곁으로 보기에는 애써 감정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상당히 당혹스러워 보이는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포크를 낚아챈 나는 그녀에게 물건을 건네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왜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
“아, 아니에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라 그래서 놀라서요. 흡혈귀는 저도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내게서 전해 받은 포크를 사용해 그녀는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과일을 자연스레 씹고 삼키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잘 꾸며낸 연기.
그녀는 입가를 가리며 씹는 척을 하더니 형체 그대로 꿀꺽 삼켰다.
턱 근육의 움직임을 계속 관찰하고 있던 내 눈썰미는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그녀에게 손을 건넸다.
“그러면 내게도 알려 줄 수 있지?”
“아무렴요. 사람을 해치고 피를 흡혈하는 흡혈귀는 교회에 반하는 존재, 저희들을 관철하는 신께서도 흡혈귀를 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까요.”
화장에 가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의 흡혈귀는 괴수와 다를 것 없는 취급이라지만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흡혈귀는 이 일대에서 융성한 문명을 꾸리고 있었어요.”
“…….”
“하지만 흡혈귀의 특수한 특성으로 인해 일대에서 쫓겨나 괴수가 있는 변경으로 물러났죠. 그간 역사서에서도 흡혈귀들이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은 걸 보면 어쩌면 괴수와의 싸움에서 졌을지도 모를 거예요.”
사뭇 진지한 그녀의 설명에 나는 절반은 귓등으로 흘려서 들었다.
그러니까 이 설명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 하자면.
“요컨대 집주인이 세입자한테 쫓겨났는데 길바닥에서 아사했다는 뜻이네.”
“네? 도대체 그게 무슨….”
“뭐야? 지금까지 그 말 한 게 아니었어?”
“아, 아니…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설명은 아니지만요.”
“거봐 그럼 됐잖아.”
간단한 설명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둘러서 말하고 있어.
“네, 하하….”
단도직입적인 내 어조에 성녀는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접시에 올려진 방울토마토를 포크로 푹푹 찍는가 싶더니, 영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흡혈귀와 관련된 이야기는 왜 궁금하신가요?”
“그냥 앞으로 벌어질 일을 대비해서 미리 대비해두는 편이 좋은가 싶어서 말이야.”
“네? 앞으로 벌어질 일이라뇨?”
“별 건 아냐. 가령 예를 들자면⎯”
콰과광!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막을 몽둥이로 때리는 듯한 폭음이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성녀는 제자리를 박차고는 창가를 향해 달려갔다.
창밖을 바라보자, 궁궐의 곳곳으로부터 진홍빛의 화마가 간헐천처럼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중무장을 한 기사들이 뛰쳐나왔지만, 어디에서 날아온 화살이 기사의 경동맥을 정확히 맞혔다.
누가 손쓸 새도 없이 갑자기 벌어진 상황.
나는 어깨에 짊어진 검을 들며 방금 전에 끊었던 말을 마저 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까 봐.”
“이게 도대체….”
적잖게 놀란 모양인지 그녀는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창틀 밖을 내다봤다.
그야 그렇겠지.
단순한 폭도들의 반항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체계적이었으며 압도적인 강함이었기에.
그러던 와중이었다.
“서, 성녀님 어서 피하십시오! 밖에서 침입자가…!”
바깥에서부터 문을 부술 기세로 박차고 들어온 호위병은 이내 힘을 잃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등에는 두꺼운 갑옷을 뚫고, 깊은 부상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채찍을 이용해 때린 듯한 길쭉한 자상.
그것을 바로 눈앞에서 본 그녀는 곧바로 기사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몸에서 샘솟아 나온 신성력이 기사의 몸을 감쌌다.
성녀라는 이명답게 기사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어디까지나 응급처치, 곁으로 보이는 외상은 치료했다지만 기사가 입은 내상을 단기간에 치료할 방법은 없었다.
“성녀님 어서 피해주십시오. 뒤… 뒤에….”
그녀가 기사의 회복에 온 힘을 다하는 사이, 문의 너머로부터 수십 발의 촉수가 쇄도해 들었다.
단번에 성녀와 기사를 처리할 속셈이었지만.
“누구 앞에서 헛짓거리야.”
나는 재빨리 도약해 수십 발의 촉수를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마치 피를 연상케 하는 기분 나쁜 감각에 나는 눈을 찡그리며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촉수는 모든 힘을 잃고는 내 손아귀 안에서 터졌다.
“이건 뭐 하는 새끼야.”
나는 촉수를 뒤로하고는 제자리에서 주먹을 뻗었다.
언뜻 보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주먹을 들이미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변이 일어났다.
씌이이익!
파공음과 동시에 아무것도 없을 터인 허공에서 붉은 눈동자와 뾰족한 송곳니를 지닌 남성이 나타났다.
“호오, 이걸 한 번에 간파해내다니 꽤나 운이 좋군.”
그의 정체는 다름이 아닌 흡혈귀.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에 성녀는 뒤로 주저앉으며 얼굴이 샛노래졌다.
자연스레 성녀에게 시선을 옮긴 흡혈귀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흐음? 뭔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서 왔더니 여기엔 반쪽짜리도 숨어 있었나? 배신자 년이 낯짝 한번 두껍군.”
“어떻게 여길….”
“아~ 걱정 마. 보다시피 널 처리하려고 온 건 아니니까. 내가 맡은 건 네년같이 시답잖은 떨거지를 처리하는 게 아니다.”
흡혈귀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시작해, 진지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단순한 경고.
허나 성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벌벌 떨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그녀를 옆을 지나쳤다.
“하, 그럼 그렇지. 야 넌 방해되니까. 그놈 데리고 적당히 피해 있어.”
지켜야 할 상대가 있으면 오히려 전투에서는 발목을 잡을 뿐이다.
“네… 네! 알겠어요.”
재빠르게 판단과 더불어 명령을 내리자, 성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가 여기에 있어봤자 별 쓸모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
흡혈귀는 끝까지 그녀를 쫓으려는 듯, 수십 개의 촉수를 이용해 내 눈을 속인다.
일반인이었다면 눈속임에 반응하지 못하고 당하기엔 충분했을 테지만…
쫘악!
가볍게 손을 휘젓자, 촉수는 마치 비눗방울처럼 터졌다.
“무, 무슨 힘이….”
“미안한데 힘뿐이 아냐.”
나는 자욱한 피안개 속을 뚫고 놈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뒤늦게 피의 힘을 사용해 방어하는 놈이었으나, 내 움직임을 막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그대로 팔뚝까지 날려버린 나는 생기 없이 너덜거리는 놈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이걸 두고 어딜 가려고?”
* * *
“젠장!! 저런 괴물이 성내에 있을 거라곤 한 번도 듣지도 못했다고!”
한 차례의 격돌 직후, 이름 모를 흡혈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을 튀었다.
인간에 의해 오른팔이 팔뚝 채로 날아갔지만, 그따위 부상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 괴물과 맞서서 싸워 목숨을 잃을 바에는 팔을 하나 양보하는 게 더 나았기에.
그리고 본격적으로 괴물과 맞서 싸우려면 목숨이 수십 개여도 부족할 것이라는 막연한 본능이 들었다.
‘쯧, 어서 할 일부터 끝내야겠어.’
생각 외로 상황이 많이 비틀어졌지만,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처음부터 단 하나뿐이었다.
성 내 어딘가에 숨어 있는 왕자를 발견하고 보호하는 것.
그 임무만 마치면 그 괴물이 뭘 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는 이 궁궐에서 뜰 생각이었으니까.
한참 동안 성내를 샅샅이 뒤지던 그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찾았다!”
미리 기억해둔 왕자의 채취가 강하게 풍겼다.
그는 짧은 고민 끝에 냄새가 풍기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도착한 장소는 두꺼운 쇠창살로 막혀 있는 작은 독방.
왕자의 위치는 바로 이곳이리라.
흡혈귀는 피로 만든 채찍으로 단숨에 쇠창살을 날렸다.
곁으로 보기에는 빈방이었으나 단순한 인간이 흡혈귀의 코와 기척 감지 능력을 숨길 순 없었다.
“어딨었나 싶었더니, 침대 밑에 숨어 있었나.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고 고작 생각해낸 은신처가 침대 밑이라니.”
인간도 별게 없네.
역시 아까 전에 상대했던 인간이 비정상적인 거다.
흡혈귀는 서둘러 일을 끝마칠 생각으로 침대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 밑에 숨어 있는 왕자를 직면한 그는 숨을 죽였다.
“시… 시발 이게 뭐야.”
그는 바로 눈앞으로 직면한 상황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왕자는 처음부터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침대 밑에 있는 왕자는 온몸이 꽁꽁 포박된 상태로 며칠 동안이나 굶었는지 그가 기억하고 있던 두꺼운 지방층마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멸치에 가까운 몸.
게다가 며칠 동안 이 모양이었는지 왕자의 몸에서는 온갖 분뇨 냄새가 진동했다.
“서, 설마 이거….”
그렇다.
처음부터 그는 아까 전에 상대했던 남자에게 낚시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