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49화 (49/175)

제49화

챙그랑!

접시가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방 안은 정적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에 국왕을 포함한 이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멀쩡한 식사 자리에서 음식이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상황이 벌어질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왕자는 주변의 눈치 따윈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내질렀다.

“무엄하도다! 외지인이 어디에서 감히….”

“무엄한 건 내가 아니고 그쪽이고. 이 나라는 식탁 위에서 음식이 날아다니는 게 기본적인 예의인가 봐?”

“시끄럽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말대꾸를 하느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허례허식에 가득 찬 그의 모습에 옆에 있던 성녀는 이마를 붙잡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부터 답이 없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옷을 붙잡으며 주변에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원래 저런 분이시니, 신한별님께서도 너무 괘념치 말고 넘어가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러니까. 원래 저런 놈이니 괜히 상대하지 말고 그냥 좋게 넘어가자는 뜻.

성안에서 지내면서 볼꼴 못 볼 꼴을 전부 겪어본 그녀였기에 꺼낼 수 있는 말이었으리라.

하지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낸 것부터가 실수였다.

“싫은데.”

“예?”

“사실 내가 이런 거 전문이거든.”

특히 싸가지 없는 새끼들을 바로 잡는 일이라면 말이야.

〈백룡의 갑옷(SS+)〉

- 오물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정화하시겠습니까?

옷에 묻은 얼룩을 손으로 툭툭 털어 내자, 아티팩트의 효과로 얼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성녀는 그 모습을 보고는 놀란 모양인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마.”

그래, 간단하게 손을 보려는 것뿐이다.

나는 손목을 매만지고 있다가 숨을 한번 내쉬고는,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큰 힘을 들이지 않은 간단한 움직임이었으나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날아가 놈의 미간에 부딪혔다.

순식간에 음식물을 뒤집어쓴 왕자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보다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는 편이 이치에 맞으리라.

“도, 도대체 무슨 짓을…….”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던 성녀는 현실을 깨닫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바라봤다.

이 시대의 배경을 생각하면 일국의 왕자한테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건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할 일이다.

그런데 거기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잖아.

어차피 내가 할 일만 전부 끝나면 이곳에서 뜰 몸이다.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지르든 간에 내 마음이지.

“저, 저놈을 잡아라! 이건 왕족 능멸 죄다! 저놈을 어서 잡아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왕자는 길길이 날뛰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은 내 얼굴을 보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전장에서 내 활약을 봤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던 것이다. 이미 압도적인 강함을 봤기에 자신들은 상대조차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뭣들 하느냐! 어서 움직이지 못할까!”

“하… 하지만 저분은….”

병사들이 갈등하는 사이, 나는 손을 가볍게 풀면서 왕자를 향해 다가갔다.

“왜? 보니까 병사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힘을 쓰면 이 방에서 사지 멀쩡하게 나갈 수 있는 놈이 과연 남아 있을까?”

“큭…….”

내 말에 반박할 이야기가 없었는지, 왕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들을 상대로 검을 뽑을 가치도 없었다.

손에 힘을 주자, 가공할 만한 압력이 왕자의 어깨를 짓눌렀다.

“한별 공 그만해주시게. 보아하니 왕자가 잘 모르고 실수한 모양이니 이번 한 번만 관대하게 용서해 줄 수 있겠나. 왕자한테는 내가 처벌을 직접 내리도록 하지.”

내가 흉흉한 압박감을 내뿜자, 이를 방관하고 있던 국왕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한테는 당연한 예의였지만 주변에 있는 인물은 화들짝 놀라며 국왕을 바라봤다.

일국의 왕이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니.

“아, 아버님! 그러한 자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그만,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마라.”

단호하기 짝이 없는 국왕의 목소리에 그는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처벌에 관해서라면 걱정하지 마시게. 한별 공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처벌을 내리도록 할 터이니.”

“귀찮으니까. 알아서 처리해.”

나는 난장판이 된 테이블 위에서 멀쩡하게 남겨둔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대꾸했다.

귀찮은 일을 당사자가 도맡아서 해결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제안에 내가 수락하자, 국왕은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그렇게 됐으니, 끌고 나가라.”

“아, 아버님… 어째서 저자의 말을….”

“그간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그걸 지키지 않은 것은 네가 아니더냐. 네게 더 할 말은 없다. 끌고 나가거라. 추후 별다른 처벌이 있기 전까진 별궁에서 근신하고 있거라.”

엄숙하기까지 한 국왕의 명령에 병사들은 왕자의 팔을 양쪽으로 붙잡고 물러섰다.

그 와중에도 왕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야말로 추하기 짝이 없는 모습.

이쪽을 노려보는 눈길이 뭔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놈에게는 더 이상 볼일도 없었기에 간단히 무시했다.

난장판이 된 테이블에서 나는 홀로 스테이크를 썰며 음미했다.

“으으음, 생각보다 이 고기 맛있네.”

그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어이없어하는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은 착각이리라.

나는 잘게 썬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주변 사람들을 향해 능청스럽게 말했다.

“모처럼의 식사 자리인데 안 먹고 다들 뭐해?”

* * *

“이봐라 명령이다! 어서 문을 열어라!”

“죄송합니다. 국왕 폐하께서의 칙령이라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명할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불려주십시오.”“머, 멈춰라! 이 문을 당장 열어…….”

끼이익! 쿠웅!

왕자의 말이 전부 잇기도 전에 두꺼운 철문이 닫혔다.

방안은 침대와 탁자 하나가 나란히 있는 무미건조한 풍경이었다.

게다가 빛이 드리우는 장소도 두 칸짜리 크기의 창문뿐.

그마저도 탈옥을 막기 위해서 두꺼운 쇠창살이 막고 있었다.

그야말로 감옥을 연상케 하는 주변 환경에 그는 모멸감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콰득⎯

그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못 참고 탁자를 걷어찼다.

‘어디에서 굴러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놈이 주제도 모르고 이런 일을 벌여?’

항상 누군가로부터 떠받치는 경험에 익숙한 그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먹을 쥔 손에서 손톱이 살결에 파고들며 피가 주르르 흘렀다.

여기까지만 해도 곱게 넘어간다 치더라도.

문제는 다음이었다.

“그 년… 망할 년이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거지?”

그는 신한별 옆에 앉아 있던 성녀를 떠올렸다.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큼은 자신을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그녀가 내비쳤던 눈빛은 아직까지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오물을 보는 듯한 혐오감.

성녀의 눈빛에는 그것이 전부였다.

치가 떨릴 일이지만, 왕자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침을 주르르 흘렸다.

“흐흐, 그래 조급해할 것은 없지. 어디까지나 약점은 내가 갖고 있으니까.”

오랜 조사를 통해 성녀의 ‘정체’에 관해서라면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자마자 성녀의 앞에서 정체를 실토하면 반항하지 못할 터.

원래대로라면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계획이었지만.

예정을 조금 앞당겨도 상관없었다.

약점을 가지고 협박한다면 성녀의 그 아리따운 몸도 마음도 전부 자신의 것이다.

여신조차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외모와, 백옥같은 새하얀 살결.

조물주가 직접 연성한 것과 같은 그 유려한 몸매까지도.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순결을 탐할 수 있었다.

그 결과물을 위해서라면 이곳에서 썩히는 시간이야 언제든지 참을 수 있었다.

“고년이 추악하기 짝이 없는 흡혈귀의 반신이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그거만큼 재밌는 일은 또 없겠지.”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희열을 주체하지 못했다.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한 기분을 즐기고 있을 때쯤이었다.

“어디에 계신다 하여 한참을 찾았는데, 의외의 장소에 계셨군요.”

“쯧, 웬 놈인가 싶었는데 너희들이었나.”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검은 인영이 말을 걸었다.

분명 방은

그는 익숙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상대는 몸 전체를 덮는 외투를 쓰고 있어 전체적인 외형은 알 수 없었지만, 어두운 실내임에도 번뜩이는 붉은 동공과 특출나게 튀어나온 송곳니는 그의 정체를 설명했다.

‘흡혈귀.’

인간의 피를 빨아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역겨운 존재.

원래대로였다면 종족의 특이성 때문에 인간들의 사이에서 멸족의 대상이었지만, 왕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를 대했다.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여기까지 왔지?”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슬슬 진행할까 싶은데… 왕자님의 의견은 어떠신가 하여 그걸 들으러 왔습니다.”

“벌써 그 일을 진행한다고? 아니,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시기적절한가.”

혼자서 사색에 빠진 듯 나직거리기도 잠시.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화답했다.

“그래, 망설일 이유는 없지. 너희들의 말대로 계획을 실행하도록 하지.”

“타당하신 결정이십니다. 그럼 당초의 계획대로 시작하겠습니다.”

“알겠다. 그러도록 하지.”

짧디짧은 대답.

그것을 들은 검은 인영은 이곳에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으나 왕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넘겼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두툭!

또다시 느껴진 사람의 인기척에 그는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또 무슨 일로 왔지? 분명 방금 전에 계획에 관해선 전부 일러뒀을 터인데 같은 말을 반복하려고 하면 썩 꺼지… 어?”

왕자는 고개를 돌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말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까 전까지 검은 인영이 서 있던 자리에는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다른 인물이 있었기에.

단번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본 왕자는 뒤로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시, 신한별… 네놈이 왜 여기에….”

“다른 건 아니고 조금 볼 일이 있어서 들렀는데, 우연찮게도 좋은 걸 들어서 말이야.”

“……어디까지 들었지.”

”그러게 어디서부터 얘기하면 좋을까? 성녀가 실은 흡혈귀였다는 거? 아니면 네가 흡혈귀와 손을 붙잡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거? 어떤 거부터 말해 줄까.“

태연하게 대답하는 신한별의 모습에 왕자는 굳었다.

왜냐하면 그가 입에서 내뱉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였으니까.

”네, 네놈… 도대체 뭘 꾸미는진 몰라도 그걸 알고 있으면 곤란해질 것이다.“

왕자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다 못해 그대로 힘을 잃고 침대 위로 넘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 위로 휘영청 떠 있는 초승달 아래에서 신한별은 차갑게 뇌까렸다.

“네 말대로면 아주 곤란해지겠지. 근데 말이야. 여기에서 목격자는 너하고 나, 우리 둘밖에 없잖아?”

그렇다면 목격자가 꼭 두 명일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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