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그녀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왕국과 타국 간에 전쟁이 벌어진 원인은 서부 평야에서 군락을 꾸리고 있던 괴수들 때문인 듯했다.
모종의 원인으로 괴수가 범람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군락이 커지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괴수는 식량뿐만 아니라, 영주민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점점 황폐해지는 영토에 위기를 느낀 타국은 왕국을 침략하게 되었다.
그것이 현재 상황.
혹자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괴수가 문제라면 타국을 침범하는 게 아니라, 그 병력을 가지고 괴수를 토벌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기엔 섣불리 손을 대기엔 괴수의 규모가 끝도 한도 없다고 했었던가.’
그래서 왕국을 약탈해 물자를 보급한다.
그야말로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는 어리석은 전략.
여기까지가 그녀의 입에서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걸 말한 요지가 뭔데.”
머릿속으로 정보를 정리하기도 잠시, 나는 인상을 구기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네? 그냥 구원자님께서도 궁금해하실까 봐. 겸사겸사 얘기해 드렸는데요.”
“딱히 관심 없으니까 됐어.”
그녀의 대답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지구에 있을 때도 역사 지식 따윈 엿이랑 바꿔먹었는데, 이런 곳의 역사를 알아봤자 쓰잘데기 없었다.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지적을 더 했다.
“그리고 그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 그만둬.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불리는 건 쪽팔리니까.”
유행 지난 인터넷 소설도 아닌데, 그런 낯간지러운 네이밍을 붙여서 계속 불리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럼 뭐라고….”
“자질구레한 호칭은 됐으니까. 그냥 신한별이라고 불러.”
“신한별이라… 네, 그럼 앞으로는 그렇게 부를게요.”
간단명료한 내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짧은 탄식을 흘렸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저기 저녁 기도할 시간이 되어서 먼저 실례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내 수락이 떨어지자, 그녀는 창가 앞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그동안 멀뚱히 서 있는 것도 뭣했기에 나는 의자에 앉아서 경건한 자세로 기도하는 그녀를 눈여겨 살펴봤다.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종교쟁이 같은데.’
곁으로 보기엔 매일 같이 기도를 꾸준히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자세부터 경건한 신앙심이 엿보였다.
게다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호흡이 망가지거나 흐트러지는 것은 없었다.
그것만 보면 그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성실한 종교인.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희미하게나마 풍기는 피 냄새를 맡았다.
피가 흐르는 전장에 오랫동안 머무른 탓에 몸에 밴 냄새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백옥 같은 그녀의 손아귀에서는 적어도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을 학살한 살인마의 냄새가 풍겼다.
‘내가 차이를 모를 리가 없지.’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 온몸에 성수를 뿌리고, 향수를 이용해 가린 모양이었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눈썰미와 미각 앞에서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천, 수만 명의 피 냄새를 어떻게 숨길 수 있으랴.
명색이 성녀라고 추앙받는 그녀가 알고 보니, 전부 연기였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온몸에 서릿발이 우수수 돋는 기분이었다.
혹시 몰라 커뮤니티를 확인했지만 다른 플레이어 중에서도 이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싶었다.
‘지금이라도 죽일까.’
기도에 정신이 팔린 지금이라면 당장 목을 베어도 모를 터.
만일 알아차려서 공격을 회피한다고 해도 그녀를 간단히 처리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왠지 모를 촉이 들었다.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그녀가 핵심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나는 오른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다 말고 힘을 풀었다.
역시 섣불리 결정을 내리기엔 이르단 생각이 들었다.
긴장을 풀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기도가 끝났는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버, 벌써 시간이… 죄송합니다. 기도하는데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기다리고 계시는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괜찮으신가요.”
“괜찮긴 무슨… 네 눈엔 괜찮은 걸로 보이나 봐? 안 그래도 ㅈ빠지게 기다린다고 짜증 나던 참인데.”
얜 뭐하러 뻔한 걸 물어보고 있어?
내가 날카롭게 대답하자, 그녀는 새하얗게 질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유의를 기울이겠습니다.”
“됐고. 슬슬 배도 출출한 참인데 뭐 준비해 둔 거 없어?”
별 기대 없이 건넨 질문이었는데, 그녀는 박수를 짝하고 치며 해맑게 대답했다.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 이후에 국왕 폐하와 왕자님하고 식사 자리가 예정되어 있어요. 나라를 구해주신 분인데 폐하께서도 구원… 아니, 신한별 님께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도대체 그 자리는 뭐야. 듣기만 해도 체할 거 같은 자리잖아.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하기엔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였기에 나는 곁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도 싱그럽게 웃으며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식사 자리에 나가기 위해 방을 나서려는데, 그녀는 문의 손잡이를 지그시 잡은 채 곤란하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항상 이 시간에 먹는 약이 있어서 그런데….”
내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작은 크기의 알약을 꺼냈다.
곁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생긴 캡슐형 알약.
까득!
그녀는 물도 없이 알약을 몇 번 씹고는 바로 삼켰다.
얼핏 보면 평범하게 약을 복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은은하게 풍기는 특유의 냄새는 속일 수 없었다.
‘피?’
처음에는 잘못 본 건가 싶었으나 나는 머지않아 확신했다.
그녀가 먹은 것은 인간의 피가 고농도로 동봉된 캡슐이었다.
인간의 피를 먹는 것은 어디까지나 괴수들이나 할 법한 짓.
명색이 성녀라고 추앙받는 그녀가 인간의 피를 탐하는 괴수와 똑같은 짓을 한다는 사실은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그렇다고 하기엔 신에 대한 신앙심은 거짓은 아닌 거 같고.’
꺼림칙한 상황에 눈가를 찌푸리고 있자, 그녀는 소매로 입가를 스윽 닦고는 머쓱한 얼굴로 다시 문을 열었다.
“하하… 항상 이 시간에 약을 먹어야 하는데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럼 늦었지만 식사 장소까지 안내해드릴게요.”
* * *
그녀의 안내에 따라 복도 거닐자, 이윽고 화려한 문양이 돋보이는 문 앞에 도착했다.
보기에도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철문이었으나 그녀가 힘을 주고 손잡이를 당기자 문은 생각 외로 가볍게 열렸다.
끼이이익-
기나긴 복도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는 거대한 크기의 방이 펼쳐졌다.
수십 명의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넉넉한 방에는 가로로 길쭉한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호화스러운 음식들로 가득했다.
바깥에는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와 사상자로 인해 즐비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상반된 풍경.
그런 낯부끄러운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성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착했어요. 약속 장소는 여기예요.”
“그래? 생각보단 평범하네.”
방금 상대했었던 왕자를 생각하면 이것보다도 더 막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뒷말은 삼키고는 아무 좌석에나 앉았다.
그녀 역시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내 옆에 다가와 착석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기다리길 잠시, 곧이어 문이 열리며 국왕으로 보이는 자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일행에는 복도에서 마주했었던 왕자 역시 있었다.
“이거야. 기껏 국가를 구원해주신 위대한 손님을 모셨는데, 기다리게 만들다니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그들 전원이 테이블에 착석하자, 그제야 국왕은 과장하듯이 양손을 하늘로 뻗으며 말했다.
진심 따윈 일절 전해지지 않는 형식적인 대사.
그한테는 별생각 없이 건넨 인사치레 같은 거였으리라.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알면 됐어.”
“……크흠, 역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전의 용사답게 털털하시군요. 그럼 한참 기다리셨을 테니 식사를 시작할까요.”
이렇게 대답하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지 국왕은 헛기침을 하며 식사를 건넸다.
왠지 모르게 왕자 쪽에서부터 다가오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나는 간단히 무시하곤 적당히 자른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것이 그리도 분노할 일인지, 이전보다도 매서운 시선이 느껴졌다.
물론 그래봤자 의미 없는 기싸움이겠지만.
그렇지만 놈을 충분히 써먹을 가치는 있었다.
“으음, 이거 맛있는데. 너도 한 입해 봐.”
“시, 신한별 님? 저는 괜찮은데….”
“됐어, 딴말 하지 말고 지금은 주는 대로 그냥 넣어둬.”
챙그랑!
내가 일부로 보란 듯이 성녀의 입에 샐러드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자, 테이블이 흔들리며 왕자가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당연히 그렇겠지.
아까와 지금의 반응을 통해 확실히 알았다.
왕자는 성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것을.
‘그런데 어디에서 온지 모를 놈이 이러고 있으니까. 화낼 만도 하겠지.’
놈의 행동 패턴이라면 잘 알겠다.
그걸 잘 이용하면 써먹어 볼 만도 하겠지.
나는 가소롭다는 듯이 왕자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풀때기 아니, 샐러드가 맛있다고? 그럼 고기 빼고는 전부 줄 테니까 마음껏 먹어.”
“저… 저기 신한별 님? 거긴 제 입이 아니라 코인데 그리고 볼에도 소스가 다 묻었….”
옆에서 조금 시끄러운 소란이 일어나는 기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쿠웅! 챙그랑!!
이전보다도 더 큰 소음과 함께 놈으로부터 음식물이 날아왔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속도.
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몸을 움직여 가슴팍에 소스가 묻도록 만들었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접시는 땅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났다.
나는 가슴팍에 묻은 소스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정당방위라고 해도 무방하겠지.”
한 번은 몰라도.
나치고 두 번이면 많이 봐준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