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뭐야 아무렇지 않은데?”
나는 멍한 표정으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놈의 몸에서 흘러나온 부정한 기운으로 인해 오염이 됐을 터.
그걸 증명하듯 괴수가 떨어진 주변 지형은 생명력을 잃고 황무지가 되었으며, 푸른 잎이 활짝 핀 거목은 기운을 잃고 쓰러졌다.
수십 미터나 떨어진 곳이 그런데, 놈과 바로 맞닿아 있는 내 몸 상태는 어떻겠는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며칠 간은 골골대면서 아플 것까지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각오와는 달리 내 몸은 멀쩡했다.
‘아, 설마 이거 때문인가?’
나는 걸치고 있는 외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백룡의 갑옷(SS+)〉
〈수백 년 전에 죽은 드래곤로드의 외피로 만든 갑옷으로 어떠한 갑옷과 비교해도 비견할 수 없는 내구력을 자랑합니다!〉
〈모든 상태 이상에서 면역, 용족 친화력+100……〉
하기야 모든 상태 이상에서 면역이라고 하니, 이 효과가 발동해서 몸상태가 괜찮…
〈백룡의 갑옷(SS+)〉
- 현재 효과가 발동 중이지 않습니다.
내 착각을 바로잡기라도 하듯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괴수가 내뿜는 부정한 기운은 상태 이상과는 다른 계열의 것인 듯했다.
그렇다면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뿐.
“…내성이 생긴 건가?”
튜토리얼에서 그런 옵션을 기본으로 달고 있는 놈들을 상대하다 보니까 하도 상대하다 보니까 익숙해진 건가.
에이, 설마 그런 조잡한 이유겠어?
어이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다 말고 제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당황스럽긴 했지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뭐, 어때.”
이런 당황스러운 일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등에 메고 있는 검을 집고는 놈의 심장부에 검을 찔러 넣었다.
괴수의 몸은 근육과 뼈로 인해 철판 같았지만, 내가 힘을 주자 놈의 가슴은 두부를 썰듯 쑤욱 들어갔다.
그대로 손잡이를 쥔 손을 비틀자, 심장이 터지는 감각과 함께 괴수는 숨을 잃었다.
괴수의 심장이 멈추자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가 자연스레 멈췄다.
“드디어 끝냈네.”
검에 묻은 핏기를 땅바닥에 떨쳐 내고는 한숨을 돌렸다.
〈괴수를 처치한 포인트를 얻습니다.〉
〈획득한 포인트가 정산되어 랭킹권에 반영됩니다.〉
〈현재 등수: 신한별 1등 +711P〉
확실하게 괴수의 숨통을 끊은 증거로 막대한 포인트가 들어왔다.
기사를 수십, 수백 명을 쓰러뜨려도 얻기 힘든 포인트가 한꺼번에 들어오며 등수도 엄청나게 큰 폭으로 상승했다.
게다가 1등까지 쟁취했다.
이 정도로 많은 포인트를 가지고 있으면 이번 층이 끝날 때까진 별걱정이 없을 터.
“한동안은 별 걱정 안 해도 되겠지.”
나는 전투를 끝내자마자 시선을 돌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둘리를 향해 다가갔다.
둘리는 괴수가 내뿜은 독기에 중독된 모양인지 몸에는 샛노란 반점으로 가득했다.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둘리는 진땀을 흘리며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하… 한별? 한별인가?”
“어, 나야.”
“여, 역시 한별인 줄 알았다. 한별이면 괴수를 죽이는 것도 반드시 성공할 테니까 말이다. 근데 나, 난 여기 까진 거 같다. 움직이고 싶어도 더는 다리와 팔이 안 움직인다.”
둘리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둘리의 몸에 있는 샛노란 반점은 점점 면적을 넓혀갔다.
녀석은 당장에라도 숨을 멈추고 눈을 감을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녀석의 뇌리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녀석의 다리를 붙잡고는 위로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데 가긴 어딜 가려고? 엄살떨지 말고 벌떡 일어나. 그동안 처먹은 밥값이 얼마인데 그거 전부 갚으려면 수십 년으로도 부족해 새꺄.”
쌩쇼를 한다, 쌩쇼를 해.
나는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서 녀석의 몸에 아무렇게나 끼얹었다.
포션이 닿은 부위에는 새살이 돋아나며 샛노란 반점이 사라졌다.
몇 병을 들이붓자, 둘리는 상처 하나도 없이 깔끔한 상태가 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피로까지도 전부 회복됐는지 활기로 가득했다.
“하, 한별 전부 다 나았다! 이, 이게 도대체 뭔가!”
포션을 난생처음 접한 둘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경악을 내질렀다.
녀석이 호들갑스럽게 반응하거나 말거나, 나는 일전에 유채아한테서 받은 포션을 보며 호기로운 표정을 지었다.
“상처에만 회복되는 줄 알았는데, 독기나 피로회복에도 도움이 되나 보네.”
혹시나 싶어서 이번 기회에 실험을 해봤는데, 생각보다도 포션이 통용되는 범위가 넓은 듯 보였다.
하긴 명색이 여신의 신전에서 떠온 최고급 신물인데 이 정도도 못 하면 서운하지.
이런저런 정리를 하고 있자 바로 뒤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괴, 괴수를 쓰러뜨리다니….”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성녀는 괴수의 시체를 바라보곤 입가를 틀어막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질린 얼굴.
아무래도 내가 괴수를 실제로 쓰러뜨릴 줄이라곤 전혀 상상치도 못한 모양이었다.
괴수의 내뿜는 기운으로 인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실제로도 괴수의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람은 죽었을 정도니.
그런데.
나는 흔하디흔한 자상조차 없는 그녀의 몸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괴수가 좀 화려하게 날뛰었는데도 괜찮았나 보지?”
가볍게 떠보기 위해서 말을 걸자,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양손을 한데 모으며 대답했다.
“그야 전부 신의 은총 덕분이죠. 신의 권능을 빌려 쓰는 저에겐 삿된 힘은 위협적이지 않아요.”
“그래? 기사가 내두른 검에는 벌벌 떨면서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힘 앞에선 멀쩡하다는 거지?”
“…….”
“뭐, 어느 의미론 대단하네.”
거참 어떤 신을 모시는진 몰라도 대인배 납셨네.
묵묵히 내 비아냥을 듣고 있던 성녀는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혹시 구원자님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있는 곳에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감사 인사를 포함해 이것저것 해 드리고 싶어서요. 그리고 국왕 폐하께서도 국가의 은인을 보시면 좋아하실 거예요.”
“흐음….”
그녀의 제안에 나는 손을 턱에 가져다 대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딱히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긴 기껏 전쟁를 마무리 짓고, 갑자기 등장한 괴수까지도 처리해줬는데 포션 한 병으로 대신하는 것도 이치에 안 맞았다.
이런 달콤한 제안을 구태여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또 이번 층이 언제 끝날지도 몰랐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여기에선 딱히 할 것도 없으니까. 그럴까.”
* * *
그녀의 인도를 따라 성벽의 내부로 들어가자, 살풍경이 펼쳐졌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거리 곳곳에는 부상자와 이름 없는 시체나 난무했으며, 여기저기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짐짓 암울한 표정으로 거리를 지나가던 성녀는 의외라는 듯이 말을 건넸다.
“이런 풍경을 처음 보는 분들은 놀라시거나 심하면 구토까지 하던데 구원자님은 괜찮으신가 보군요.”
“그야 이런 풍경이라면 이젠 싫증이 날 정도로 많이 봐왔으니까.”
“그, 그렇군요….”
그녀는 상당히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좀… 많이 놀라서 그래요. 어지간해서는 겪을 수 없는 풍경이니까요.”
“그런가?”
까놓고 말해 이런 풍경조차도 나한테는 약한 축에 불구했다.
지구에 있을 때나 튜토리얼에 있을 때는 이것보다도 더한 것들도 봐왔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왕궁에 발을 디뎠다.
전쟁으로 인해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었지만, 성녀의 지위인 그녀가 직접 나서서 증표를 보이자 통과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살풍경한 거리와는 달리 왕궁의 안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그야 당연하겠지.’
바깥이 어떻게 되든 말든, 권력자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권력욕과 명예를 중시하니 말이다.
그건 어떤 시대와 차원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
그녀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쯧, 벌써 와 있었나.”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호위병을 거느린 뚱뚱한 남성이 복도에 서 있었다.
‘저 돼지 새끼는 뭐야?’
얼마나 처먹고 운동을 안 했는지 툭 튀어나온 지방이 인상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끌어내기엔 충분한 비주얼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자애로운 미소로 그를 마주했다.
“왕자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오래간만이군”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와중에도 끈적한 시선으로 그녀의 몸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느긋하게 훑었다.
그러다 보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나올 것 같은 그의 눈은 한참이나 그녀의 흉부에 머물렀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시선.
매너 따윈 엿이랑 바꿔먹은 듯한 저 돼지 새끼가 왕자라고?
방금까지만 해도 이 나라가 왜 망한지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충분히 말아먹을 만도 했네.’
곁으로 보기에는 어디 돼먹지 못한 돼지가 일국의 왕자인데, 안 망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한참 동안이나 혀를 날름거리며 성녀를 보던 그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람은?”
“아, 이분은…….”
“설명은 되었다. 보나 마나 별 볼 일 없는 손님이겠지.”
그녀가 내 소개를 하기도 전에 왕자는 제멋대로 말꼬리를 끊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무시.
나를 보는 그의 시선에는 자연스럽게 아랫것을 깔보는 느낌이 들어 있었다.
그 중간에 애매하게 끼어있던 성녀는 다급히 중간에 끼어들었다.
“하하… 저는 또 뒤에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칫, 종교쟁이가 약속이 있어봤자. 뭐가 대단하다고… 됐다. 나도 볼 일이 있으니 가보마.”
“네, 왕자님 나중에 또 뵐 일이 있으면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그는 다시 성녀의 몸을 훑어보는가 싶더니, 인사를 건네며 가던 갈 길을 마저 청했다.
복도에서 왕자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게 돼서야 성녀는 난색을 표하며 조심스럽게 사과를 건넸다.
“하하… 구원자님 죄송합니다. 이 왕자님께선 워낙 그러신 부분이 있어서.”
“됐어. 별로 신경 안 써도 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저런 저급한 도발 가지곤 별 감흥도 없다.
“그, 그러신가요.”
“어, 나도 상관 안 써.”
그래, 그러니 별로 신경은 안 써도 된다.
왜냐하면⎯
나는 왕자가 지나갔던 복도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봤다.
굳이 그렇게 수습을 하지 않아도 저 돼지 새끼하고는 나중에 볼일이 꼭 생길 거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