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한편 시간은 거슬러 올라서 신한별이 이번 플로우에 도착하기 직전.
커뮤니티에서는 갖은 이야기들이 한창 올라오고 있었다.
〈채널 16에 접속했습니다.〉
- 지금 단체 층에서 신한별 파티에 속해 있는 놈들 거수ㄱㄱ
⤷ 손
⤷ 손22
⤷ 발
⤷ 아, 눈치 없는 쉑;;
- 싯팔, 17층~19층 통합층이래서 빨리 끝날 줄 알았는데 ㅈㄴ 어렵네
⤷ ㄹㅇ 전쟁터에 떨어지자마자 기사들 오러 써서 뒈질 뻔
- 님들 그거 앎? 플레이어들마다 이번 층에 도착한 순서 다르다던데 그리고 이번에는 개인층 비스무리한 거여서 혼자서 진행해야 함
⤷ 어쩐지ㅅㅂ 이번 층에 도착하자마자 1등이 150P인 거 보고 에러 난 줄
⤷ 편애하는 거 개노답. 선 씨게 넘네
커뮤니티에서는 통합층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많은 주제는 플레이어마다 플로우에 도착하는 시간이 제각각이라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한별처럼 공중 수백 미터에서 떨어진 플레이어는 없었지만.
그런 패널티가 존재하는지 모르는 그들에게는 누가 마지막에 플로우에 도착했는지가 쟁쟁한 화젯거리였다.
그 화젯거리는 며칠간 커뮤니티를 활활 태울 정도로 나오는가 싶더니.
며칠 간의 토론 끝에 결론이 나왔다.
- 속보 떴다! 야, 지금 막 신한별 5P라고 떴음
⤷ 와 그럼 이제 도착한 거임?ㄷㄷ
⤷ 신협 얘 탑한테 찍힌 거라도 있나
- 솔직히 지금까지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해
⤷ 킹만해ㅋㅋ
- 본인 20등인데 신협 이겼음ㅋㅋㅋㅋ
그리고 하루가 되지 않아 또다시 커뮤니티에서는 불이 붙었다.
- 신협, 애 뭐 했는데 벌써 포인트 100 넘음?
- 아까 전에 20등인데 신협 이겼다고 말한 놈 오열 중ㅋㅋㅋㅋㅋ
- 진행자 그 쉑 멱 따러 가고 싶은 사람 거수
⤷ 꿈도 크다 그게 가능하겠냐ㅋㅋㅋ 진짜 하면 머리 밀고 인증한다
⤷ 정보: 신협은 이미 진행자 목 땄음
⤷ ㅋㅋㅋㅋ 캡쳐 했으니까. 삭제하지 마라
⤷ 이 새끼 이미 탈모 아님?
- 아앗, 탈모는 건드는 거 아닙니다ㅠㅠ
* * *
바위산에서 갑작스럽게 출몰한 괴수.
튜토리얼에서 상대했던 여느 괴수와 다를 바 없이 성벽을 아주 간단하게 찢어발길 듯한 두꺼운 손톱과 하늘을 뒤덮을 만한 날개.
그리고 괴수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들 정도의 위압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단 하나.
지금까지 상대했던 괴수들과 다른 점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주변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생명력을 빼앗는 독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저건 꽤 까다로워 보이네.”
나는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괴수를 관찰하며 시큰둥한 감상평을 내놨다.
괴수의 근처에 다가간 새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생명력을 빼앗겨 미라가 된 상태로 바닥에 떨어졌다.
다소 위협적인 광경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리 문제 될 것까지는 아니었다.
저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비슷한 류의 괴수와는 맑고 닳도록 상대해봤으니까.
튜토리얼 당시에는 어떻게 공략했었냐면.
“음… 그냥 될 때까지 달려들었던가.”
분명 그랬었지?
나는 희미한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턱을 매만졌다.
어차피 생명력을 빼앗긴다 한들 튜토리얼에서는 죽기 직전까지만 가지, 죽지는 않는다.
대신에 당장에라도 뒈질 것 같은 역병에 시달려 며칠간 앓을 뿐이다.
공략 방법은 간단하지만, 여긴 튜토리얼이 아니니 그때와 같은 방법을 쓸 순 없었다.
“괜히 또 골골거리면서 아팠다간 쪽팔리니까.”
기왕이면 안전한 루트를 택하자.
저놈한테서 도망쳐서 다른 루트를 이용해 포인트를 모으는 거?
아니, 틀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략하는 방식이 이번과는 다를 뿐이지 괴수를 쓰러뜨리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그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어, 어째서 저게 벌써… 봉인이 풀리기까진 한참 남은 게 아니었⎯”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듯한 얼굴의 성녀가 멍하니 서 있었다.
물론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압도적인 괴수의 등장에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실제로 그중에는 겁에 질려서 자리에서 뛰쳐나가는 이 역시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감정과는 궤가 다르다.
다른 사람들은 괴수의 등장에 겁에 질린 듯한 반응이라면.
그녀는 괴수의 존재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
‘흐음.’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훑어봤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저번에도 그렇지만 역시 그녀에게는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느껴졌다.
“왜? 저 괴수랑 서로 안면이라도 있어? 뭘 그렇게 눈여겨보고 있어?”
“아, 아닙니다. 조금 놀라서….”
뒤늦게 내 시선을 알아차린 성녀는 샛노래진 얼굴로 감정을 추슬렀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살고 싶으면 다른 기사들처럼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봐?”노골적으로 던진 질문에 그녀는 한순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이내 옅은 웃음기를 얼굴에 띠었다.
“당연하죠. 신을 믿는 신자로서 부상자가 남아 있는 전장에서 먼저 벗어날 순 없으니 말이죠.”
“그래? 그럼 그러던지.”
그녀의 대답에 나는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곁으로는 건실한 신자 노릇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그럴듯하게 꾸며낸 얼굴.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둘뿐이 아니지만, 우선 그녀는 나중이다.
그보다도 먼저 목표로 삼은 것이 있었기에.
그러기 위해선…
“한별… 나는 와이번보다도 못한 거 같다. 그것도 날지 못하다니! 난 새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자 그곳에는 둘리가 서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드래곤인데, 날지도 못하고 하늘에서 추락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는지 둘리는 자책하며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반성하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계속 저 모양인 것도 곤란했다.
나는 일부러 둘리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말했다.
“새꺄, 뭘 그렇게 풀 죽어 있어. 원래 새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법인데 드래곤도 떨어질 수 있지.”
“그… 그런가? 한별의 말대로 드래곤도 하늘에서 떨어지나?”
내 말에서 용기를 얻었는지 둘리는 두 뺨을 발그레 붉히며 질문했다.
“아니, 드래곤이 하늘에서 추락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 보지 않은 거 같은데?”
“…….”
그러고 보니까 그렇네?
애초에 난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를 둘리 말고는 만나본 적도 없지만.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에 둘리는 꼬리를 축 늘어뜨린다.
“누가 뒈진 것도 아닌데, 뭘 궁상맞게 그러고 있어? 원래 드래곤이나 와이번이라고 구별해봤자 등에 날개 달리면 새나 마찬가지야.”
탑을 등반하는 혹자가 들으면 까무러칠 소리긴 했지만 뭐 어떤가.
어떤 종족이든 간에 날개만 달려 있으면 내 앞에선 새나 다를 게 없다.
그 말에서 용기를 얻었는지 둘리의 입가에서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한별 말대로 나도 한번 해 보겠다!”
“그래, 잘 생각했어. 그러면 저기까진 갈 수 있지?”
“음…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건 힘들 거 같다!”
장천을 배회하는 괴수를 가리키자, 둘리는 조금 어두워진 낯빛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소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둘리의 이름을 불렀다.
“둘리야.”
“한별! 알았다!”
내 부름에 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날았다.
둘리의 다리를 잡고 타자 상당한 속도로 괴수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놈의 근처로 갈수록 오염된 공기로 인해 폐가 짓눌렸다.
나는 괜찮았지만, 둘리한테는 버거웠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더…… 조금 더 버틸 수 있다!”
방금 전의 실수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둘리는 한계를 돌파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르러서 힘이 빠진 둘리는 힘겹게 하던 날갯짓을 멈추고 공중에서 떨어졌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잘 버텨줬어.”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나머지는 문제없다.
나는 둘리를 뒤로 하고 공기를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에서 끓어오르던 힘이 약해졌다.
아티팩트를 발동한 이래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기에 을지문덕의 권능이 희미해졌기 때문이었다.
“을지문덕 영감, 나랑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갈 거야?”
〈무신, 을지문덕이 당신이 한 질문의 의도를 궁금해합니다.〉
“뭘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어. 저 성격 더러워 보이는 괴수를 쓰러뜨리는데 도우란 뜻이지.”
〈을지문덕은 당신의 명령을 듣긴 싫지만, 정의를 위해 저 괴수만큼은 쓰러뜨려야 된다고 말합니다.〉
〈찬란한 별이 마지막 불꽃을 활활 불태웁니다.〉
다 꺼져가는 불사라기가 화르르 불타오르며 온몸에서 힘이 샘솟았다.
내가 검을 붙잡자 그 위로 검은 갑옷으로 된 무형의 기운이 덧씌워졌다.
이윽고 손아귀에서 흘러나간 기운은 검에 영향을 끼치더니, 검신을 타고 진홍색의 겁화가 활활 불타올랐다.
그대로 괴수의 등에 올라탄 나는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기다리고 있었지?”
걱정하지 마. 나도 이 순간만큼을 손꼽아서 기다리고 있었거든.
이렇게 직접 마주할 순간을.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놈을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검신에서 응축된 진홍색의 겁화가 검기의 형태가 되어 놈의 목을 베었다.
“캬아아아약!”
상당한 고통에 의해 괴수는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괴성을 내질렀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일격.
하지만 안타깝게도 괴수의 덩치가 덩치인지라 한 방 가지고는 괴수의 목을 전부 베어 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유의미한 타격을 입혔는지. 괴수의 목이 절반으로 잘려 나갔다.
괴수는 동맥에서 검붉은 피 분수가 쏟아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것과는 반대로 그 이상으로 부정의 힘이 강해졌다.
부정의 힘은 점점 넓이를 넓혀가더니, 하늘뿐만 아니라 지면까지도 영향을 미치며 동식물들의 생명력까지도 앗아갔다.
오죽하면 무한한 생명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드래곤인 둘리조차도 고통스러운 얼굴을 자아낼 정도.
하물며 멀리 있는 녀석도 그런데, 괴수와 직접 몸을 맞닿고 있는 나는 어떻겠는가.
괴수의 등에 탔을 때부터 이미 각오했던 바였다.
튜토리얼에서 느꼈었던 최악의 고통을 떠올리며 비명을 내지르려는데.
그 순간 나는 양손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음? 별로 안 아픈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