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앞뒤 맥락을 전부 잘라먹은 그녀의 발언에 나는 곁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구원자는 또 뭔데.’
게다가 네이밍 센스조차도 구리다.
공중에서 떨어뜨린 것부터 시작해서 뜬금없이 구원자라니, 다소 당황스러운 감이 있었지만 그 부분은 적당히 넘기기로 했다.
복잡하게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다.
그것도 잠시.
나는 주변 풍경을 둘러보곤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대놓고 전쟁터에 떨어뜨릴 줄은 몰랐는데.”
시스템창의 말마따나 이번 층의 주요 컨셉은 전쟁.
전체적인 틀이 그렇다는 거지.
주어진 상황만 보면 여기에서 알아서 살아 남아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놈의 탑에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이젠 전부 필요없다.
무성의하다 못해 고압적이기까지 한 탑의 태도에 툴툴거리고 있자, 바로 옆에 있던 여자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구원자님 혹시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어, 많아.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전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던 거 같던데.”
“…….”
“혹시 어디라도 편찮으신 건가요?”
“됐어, 별문제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불안한 얼굴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긴 어지간히도 불안할 만도 하겠지. 내가 없으면 이 나라도 끝장일 테니까.
하늘에서 추락하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전황을 내려다본 나는 확신했다.
이 전투는 얼마 못 가서 끝이 날 것이라고.
그것도 이쪽 진영의 패배로 말이다.
그래, 내가 놈들을 대신해서 싸워주고 그걸로 이번 층을 깬다.
다 좋은데 말이야.
“그래서 뭘 줄 건데.”
“네? 그게 무슨 뜻….”
“다 알아들었으면서 무슨 뜻이긴. 내가 대신해서 싸워서 이겨주면 뭘 해줄 거냐고.”
그건 명확하게 하고 가야지.
전쟁에서 내가 활약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탑을 등반하기 위해서 내 목표를 이루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면 전쟁에 참가하는 당사자들은 어떤가?
사실상 그녀는 가만히 서서 남을 부려 먹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뇌까렸다.
“길게 말 안 한다. 대안이 있으면 빨리 말해.”
이대로 확 가버리기 전에.
뒷말을 집어삼키며 말하자, 그녀는 바짝 긴장한 얼굴을 했다.
어쩌면 굳게 믿고 있었던 내가 이대로 홀연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있어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고민을 반복하던 그녀는 내 팔을 붙잡으며 다급히 외쳤다.
“도, 돈은 없지만… 이런 거라면 있어요!”
“포션?”
내 의문에 대답하듯 그녀는 품에서 포션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포션.
자세한 효과를 확인해보기 위해 포션을 손에 쥐자, 자세한 설명이 떠올랐다.
〈성녀의 포션(B)〉
- 곁으로는 보잘것없는 유리병에 담겨 있지만, 성녀의 지극한 기도와 눈물이 담겨 있다.
- 상태 이상을 회복한다. 뛰어난 회복 속도를 자랑한다.
※ 주의! 성녀에게 받은 물건이라고 해서 사심을 품는 행동은 하지 맙시다! (이런, 이미 품어버렸군요.)
설명은 또 왜 이따구야?
포션의 설명을 위에서 아래로 읽어나가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타산적으로 계산하자면 수지는 안 맞지만, 보상으로 보자면 썩 나쁘지 않았다.
포션이라면 일전에 유채아한테 받은 걸로도 두둑했지만 많이 챙겨놔서 나쁠것은 없었다.
다다익선이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뭐, 괜찮네.”
나는 적당히 대답을 건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내 모습을 봤는지 멀리서부터 살육에 중독된 것 같은 안광을 번뜩이며 기사가 달려왔다.
그야말로 본능에 가까운 기행.
짧은 시간 만에 거리를 주파한 기사는 도끼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가속력이 쌓이며 가공할 만한 속도와 위력을 발산했지만, 나는 익숙하다는 듯이 도끼의 반경에 검을 휘둘렀다.
채애앵!
금속이 부딪치며 짜릿한 파찰음과 스파크를 일으켜 낸다.
상대와 검을 맞대던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사의 무기에는 서슬 퍼런 서릿빛을 띈 무형의 기운이 금속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저 기운의 정체는 익히 들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기사 나부랭이가 무슨 검기를 쓰고 있어.”
일명 검기라고 불리는 그것.
커뮤니티의 이야기에 따르면 일정한 수준의 실전 경험과 깨달음을 얻어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하던 거 같았다.
어쩐지 평범한 놈들과는 달리 검을 맞댈 때부터 손에 감기는 감각이 남다르다 싶었다.
정면에 있는 기사와 검을 맞대는 사이, 혼란한 틈을 타 다른 기사가 배후를 덮쳤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미처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속력.
“구, 구원자님! 위험해요!”
쾌검을 목격한 성녀는 아연하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절박하게 목소리를 떠는 그녀를 보며, 나는 한순간이지만 멈칫했다.
‘그 짧은 사이에 저걸 봤다고?’
내 시점에서는 그다지 빠른 공격이라고 부르기에도 어중간한 공격이었지만.
그래도 어중간한 실력을 지닌 플레이어였다면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절명했을 만한 검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전긍긍하던 그녀가 보고 말했다.
단순히 눈이 좋다고 치부하기엔 애매한 감이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뭐 어때.’
다소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일단 기억해두고 넘어가자.
당장 그녀에게 어떻게 봤냐고 추궁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문제없어.”
그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이런 상대가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덮친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위협은 되지 않았다.
나는 두 눈을 빛내며 앞에 있는 남자의 다리를 걷어찼다.
갑옷의 결점을 노려 적당히 관절기로 쓰러뜨릴 생각이었는데.
우드드득⎯
다리에서 들려선 안 되는 소리가 들리며. 기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흡?”
그 광경을 바로 뒤에서 목격한 또 다른 기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헛숨을 들이켰다.
뒤늦게나마 검기를 응용해 뒤로 내빼려는 것 같았으나.
그러기에는 한참 늦었다.
채찍처럼 쇄도한 검은 기사의 허리를 반쪽으로 접었다.
기사는 찰나의 순간에 가까스로 방어해 몸이 반쪽으로 쪼개지는 참사는 막았지만, 우악스러운 힘에 의해서 수백 미터나 넘는 거리를 나가떨어졌다.
〈기사 두 명을 쓰러뜨렸습니다.〉
〈처치한 포인트를 얻습니다.〉
〈획득한 포인트가 정산되어 랭킹권에 반영됩니다.〉
〈현재 등수: 신한별 25위, +5P〉
기사를 쓰러뜨리자마자 연달아서 떠오른 시스템창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야?”
랭킹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대뜸 나타난 시스템창.
나는 곧바로 자세한 설명을 읽어나갔다.
보아하니 이번 플로우에서는 전쟁터에서 적들을 쓰러뜨리면 쓰러뜨릴수록 그에 합당한 점수를 획득하는 시스템인듯했다.
그 포인트로 다른 플레이어들과 경쟁하고 말이다.
‘그럼 1위는 누구야.’
시스템을 이리저리 조작하자, 이번 층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전체 등수가 떠올랐다.
나는 재빨리 손가락으로 리스트를 내렸다.
〈1위: 황결, 435P〉
아니나 다를까.
모든 플레이어 중에서도 현재 1등은 황결.
그 녀석이 1위일 거라고는 어느 정도 지레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벌써 백 단위가 넘는 점수라고?
하긴 녀석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이런 전장일수록 진가를 발휘하리라.
은신 능력을 사용해서 몸을 숨기고, 적군을 교란한 다음에 식물을 소환해 일망타진한다.
“대충 각 나오네.”
와씨, 내가 봐도 사기적인 능력이잖아.
입만 벌리고 감탄하고 있을 새는 없다.
이러는 동안에도 순위는 계속해서 변동되고 있을 테니.
그 증거로 내 순위는 실시간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이 자존심이 있는데 넋 놓고 있을 순 없지.
내가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하자, 이를 지켜보던 성녀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훑어본다.
“구원자님…?”
“별거 아냐. 넌 거기에 앉아서 잘 보고 있어.”
이딴 전쟁 따윈 금방 끝낼 테니까.
나는 온몸에 흐르는 힘을 만끽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전장에 떨어지면서 발동한 아티팩트의 효과는 여전히 유효했다.
을지문덕의 격이 심장 중심부를 타고 팔다리로 흘러내렸다.
혈관 속의 혈액이 빠르게 이동하며 온몸이 펌핑한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마치 검기처럼 유백색의 기운이 검의 겉면을 코팅했다.
“후우우.”
천천히 호흡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넓은 반경으로 쏘아진 참격은 기사들의 목을 베고는 저 너머에 있는 바위산을 일격에 양분했다.
쿠구구궁!
바위산의 정상이 깎아져 내리며 잇따라 발생한 산사태가 적의 진영을 덮친다.
놈들이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자연의 위용 앞에선 별수 없겠지.
그 증거로 상대편 진영은 한순간에 매몰되었다.
그와 동시에 적들을 처치하면서 들어오는 포인트.
〈처치한 포인트를 얻습니다.〉
〈획득한 포인트가 정산되어 랭킹권에 반영됩니다.〉
〈현재 등수: 신한별 6위, +311P〉
포인트가 한꺼번에 집계되며 상당히 높은 순위권에 정착한다.
이전과 비하면 만족할 정도로 점수가 많이 올랐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까진 안도할 수 없었다.
1등을 노리기에는 여전히 100점이 넘는 점수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번 플로우에 도착한 플레이어들과 점수를 메꾸기엔 부족했다.
남은 점수를 차지하기 위한 큰 한 방이.
뭔가 큰 게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쿠오오오⎯
검격에 의해 붕괴한 바위산에서부터 짜릿한 감각과 함께 괴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바위산의 일부가 붕괴하며 그곳에서부터 우람한 날개와 뿔을 지닌 괴수가 활공했다.
‘아, 방금 전의 그걸로 둥지를 망가뜨렸나?’
어쩐지 싸한 예감이 든다 싶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괴수의 등장으로 전장에 있는 기사들은 피아를 가릴 것도 없이 도망치기 시작한다.
괴수의 세력 범위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공할만한 위세를 떨치는 괴수를 바라보며 나는 손가락을 접었다.
“보자, 대충 기사 한 명에 2포인트에서 3포인트가량 줬으니까.”
저놈은 얼마나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