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그의 발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과연 내가 어떤 선택지를 고를까 하는 불안감과 기대감.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하는 가운데, 나는 아무 말 없이 진행자의 눈을 직시했다.
진행자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곰방대를 입에 물고 길게 연무를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선택에 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비쳤지만, 내 눈썰미를 속일 순 없었다.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입을 뗐다.
“후자로 하지.”
[후자라… 그렇다면 17층에서 19층까지를 한 층으로 통합해서 한 번에 등반한다고 알아들어도 괜찮을까요?]
“어, 그렇게 해.”
무심하기까지 한 내 대답에 진행자는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늘 위에 떠 있는 은하수가 시간을 가속한 것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유성우가 둥근 궤도를 그리며 우리들의 주변을 맴돈다.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듯한 황홀한 광경.
그것을 구경하기도 잠시, 진행자는 손뼉을 쳤다.
그러자 빠르게 재생하던 유성우가 허공에서 정지하더니, 역재생되듯이 뒤로 물러났다.
[잘 알겠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별은 신한별 플레이어의 선택을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고르신 선택지는 다시는 무를 수 없다는 점은 꼭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손으로 입가의 웃음을 가리며 말했다.
언뜻 보기에는 치레로 한 말처럼 보여도 뼈가 있는 발언.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적당한 보험을 들여놓는 것은 사기꾼들의 특징이니까.
다른 이들이었다면 경계하기 마련이겠지만, 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숨기는 게 있으면 뭐 어떤가.
결국 내가 등반하는 것은 탑.
“그딴 꿍꿍이야. 직접 클리어하면 되는 거잖아.”
[호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글쎄?”
[……?]
내가 발언을 가볍게 무시하자, 녀석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녀석이 그러던 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게 건방인지 자신감인진 끝까지 지켜보면 알겠지.”
[자신감이라, 좋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 특히 신한별 플레이어께서 하신 이야기가 무엇인지 말이죠.]
진행자는 능글맞은 미소를 히죽 지으며 손가락을 하늘 위로 치켜세우더니, 땅바닥을 향해 빠르게 내리그었다.
장천에 떠 있는 무수한 별자리가 유백색의 섬광을 빛내며 우리들을 향해 떨어진다.
수천, 수만 개의 별이 폭포수처럼 지면으로 떨어지며 암전이 이어졌다.
<17층~19층의 통합 층으로 이동합니다.〉
* * *
콰아앙!
귀청에서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사방에서 홍염이 휘날렸다.
그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살점이 녹아내릴 것 같은 고온이 전장을 휩쓸었다.
사선을 오가는 전투로 인해 벌써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 이상으로 많은 중상자가 전장 곳곳에서 누워있었다.
당장이라도 치료가 급한 부상자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지만, 이들을 모두 돌볼 순 없었다.
일손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젠장! 어떻게든 성벽을 사수해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일어서서 막아라!”
피해를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 지휘관이 고함을 질렀으나, 그마저도 폭음에 의해 묻혔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폭력.
1분, 1초가 생명인 전쟁에서 성녀라 불리는 실비아는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전장을 뛰어다녔다.
한 명.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노력마저도 소용없다는 듯, 하늘에서 떨어진 화살이 죽음을 또다시 만들었다.
“제발… 제발! 한 명이라도 좋으니까!”
그녀는 언젠가부터 버릇처럼 입에 붙은 말을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을 비웃듯.
사상자의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제야 그녀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죽음의 앞에선 모든 게 소용없다는 것을.
그래도 그녀는 애써 그 사실을 부정하며 양손을 모으곤 신에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제발… 제발… 한 명이라도 좋으니 구원해주소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신에게 청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도 좋으니 어린 양들을 구해달라고.
사상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그녀의 기도는 더욱 길어졌다.
무력도, 기술도, 무엇 하나도 지니지 못한 그녀에게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성녀라는 이명을 지닌 그녀에게는 그것밖에 남은 게 없었다.
허나 그런 간곡한 청을 무시하듯 그녀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흐흐, 이걸로 한 명 더….”
그녀가 얼굴을 돌리자 그곳에는 광기에 가득 찬 남자가 머리끝까지 검을 올린 채, 힘을 실어 검을 휘둘렀다.
인간이 살아가는 일생의 삶은 불공평일지라도.
죽음 앞에선 모두가 공평하다.
그러나 그녀는 최후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신에게 기도했다.
‘만일 내가 죽더라도 구원자님이 우리들을 구해주시길….’
성녀라 불리는 그녀가 죽음을 각오한 그때였다.
파아아앗!
마치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주듯 하늘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전장으로 떨어졌다.
* * *
〈17층-19층의 통합 층입니다.〉
〈이번 플로우의 주요 컨셉은 전쟁입니다. 귀하의 건투를 기원하겠습니다.〉
간단명료한 메세지가 눈앞으로 떠오른다.
아직 섬광이 가시지 않은 탓에 바로 앞이 보이진 않았지만, 메케한 화약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었다.
그와 더불어 쇠붙이가 맞붙이는 소리와 치열한 고함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그래,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 따윈 없었다.
다만 하나만 정정하자면.
“어?”
나는 발밑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익히 보는 풍경과는 달리 주변이 새하얀 구름으로 가득했다.
그와 동시에 공기를 가르는 파찰음과 함께 내 몸이 새파란 장천 사이로 빠르게 낙하한다.
빠르게 현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벙찐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
그러니까. 이 새끼들이 나를 수백 미터 상공에 드랍 시킨 거지?
지금까지의 탑의 행실을 고려하면 한 번쯤은 이런 일이 터질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그게 오늘이 될 줄이야.
하다 못해서 이렇게까지 엿을 먹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기가 막혔지만,
별수 없지.
불만을 토로하고 있을 새는 없었다.
이러고 있을 새에도 지면과는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머리를 굴려서 거리를 가늠하다 말고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진짜로 잘못하면 좆되겠는데.”
튜토리얼에서 수도 없이 자살을 시도해본 나로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충분히 낙사하고도 남을 만한 거리였다.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낙법으로 충격을 줄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나는 남은 방법을 떠올리고는 서둘러 이름을 불렀다.
“둘리야!”
“알겠다!”
이제는 척하면 척이라는 듯, 둘리는 우렁차게 대답하며 날개를 휘둘러 활공을 시도했다.
타이밍에 맞혀서 내가 둘리의 양발을 손으로 붙잡자.
“우에엑!”
둘리는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나와 함께 지면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살기 위해 뒤늦게 자세를 잡아보려 했지만,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마당에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나 참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새끼가 드래곤이라니.
이대로라면 누구 하나 살지 못하고 다 같이 죽는다.
서둘러 대안을 찾던 나는 그동안 까먹고 있었던 물건을 떠올렸다,
〈역사의 파편(D)〉
- 한때는 SS급 물건이었지만 시간에 흐름에 따라 상당히 낡게 되었다. 역사에 해당하는 물건에 거울 부분을 비추면 과거의 현상이 현현함.
※ 1회용이니 취급에 바람!
※ 못생긴 사람이 거울로 사용한다면 거울이 박살날 지도…?!
바로 12층을 클리어하면서 얻었던 보상.
지금까지는 사용할만한 곳이 영 마땅치 않아서 주머니 속에 짱 박아두고 있었는데, 지금이야말로 사용할 기회였다.
고민할 틈은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지면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기에.
나는 과거에 황결한테서 받았던 유물을 꺼내 역사의 파편을 비췄다.
그러자.
〈거울이 대상을 비춥니다.〉
〈유물의 진품 여부를 확인합니다.〉
〈진품 확인 완료! 적임자 검토 완료!〉
〈무신, 을지문덕의 영혼이 현세에 현현합니다!〉
파지지지직!
은하수보다도 더 높은 너머로부터 강렬한 뇌광이 번뜩인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릴 것만 같은 강렬한 존재감.
전체를 화려하게 밝히던 별은 짜릿한 섬전과 동시에 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금방이라도 의식을 잃을 듯한 격통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무신, 을지문덕은 당신에게 이번 한 번만 자신의 격을 빌려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찬란한 별의 기운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장군의 형상을 한 빛은 구름 사이를 뚫고 내 몸을 휘감았다.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 샘솟았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곤, 빠르게 가속하는 지면을 두 발로 가볍게 지르밟았다.
덕분에 부상 하나 없이 지면에 착지한 나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진짜 큰일 날 뻔했네.”
그 순간에 아티팩트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진짜로 장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음 층에 도착하자마자, 낙사 해서 죽는 건 모양 빠지잖아.
한숨을 내쉬며 안도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떨구자, 무슨 이유에선지 갑옷을 입은 남자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아씨, 설마 이거 진짜로 죽은 건 아니겠지?
남자는 온몸을 경련하다 말고 제자리에서 축 늘어졌는데, 저게 사후경직이라 불리는 그건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시선이 닿은 곳에는 순백의 백의를 입은 여인이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 설마 당신은 저희들의 구원자이십니까?”
백의를 입은 여자는 내 얼굴을 보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을 더듬거린다.
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분명 이건 이번 층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이 기회를 발로 걷어차지 않고, 잘 이용해 먹으면 향후 벌어질 일에 유리하게 작용 되리라.
짧은 순간에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나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래, 난 구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