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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43화 (43/175)

제43화

“어디에서 감히 나를 능멸하려 드느냐! 다른 놈은 몰라도 내 눈은 못 속인다.”

군주는 벽에 걸쳐진 배틀 엑스를 들고는 흉흉한 기운을 내뿜었다.

나는 놈의 얼굴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역시 거짓말은 안 통하나.”

하긴 지금까지 아무 탈도 없이 순조롭게 속인 것도 용케 한 거다.

아쉽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만, 그다지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놈과 싸우게 되면 내가 노인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꿰뚫어 볼 터.

나는 등에 짊어진 검을 빼 들며 놈을 마주했다.

본격적으로 맞서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압박감이 주변을 맴돈다.

싸움의 시작을 알린 것은 나였다

“후읍!”

나는 발로 테이블을 걷어찼다.

순간적으로 내 인영을 놓친 놈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재빨리 배틀 엑스를 휘둘러 테이블을 반으로 쪼갰다.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상당한 악력.

하지만.

“그게 전부냐? 새꺄.”

검을 상단으로 휘둘러 놈의 일격을 막아낸 나는 피식 웃으며 도발했다.

누가 봐도 뻔한 도발.

자신하는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는 것에 있어서 분노한 놈은 쉽게 휘말렸다.

“개새끼가⎯”

놈은 다시금 큰 동작으로 배틀 엑스를 위에서 아래로 찍는다.

배틀 엑스를 한 손으로 쥘 정도의 악력과 중력 가속도가 붙으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상당한 절삭력을 발휘했다.

나는 날이 바짝 서 있는 배틀 엑스를 보며 고민했다.

‘이대로 피할까?’

위력 하나만큼은 튜토리얼의 어떤 괴수를 막론할 정도로 상당했지만.

피하려고 하면 충분히 회피할 수 있다.

회피하고 그 틈을 타서 놈의 허를 되레 찌른다.

분명 머릿속에서는 완벽할 정도로 모든 시츄레이션이 그려졌지만, 왠지 모르게 내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수싸움과 같은 전략적인 복잡한 이유가 아니다.

단지.

“내가 피한다고?”

아주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로.

상대가 본격적으로 맞부딪치는데, 이걸 피하면 오히려 얕잡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맞선다고 해서 질 것 같진 않거든.”

나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폭포수를 가르듯 세차게 검격을 뻗는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굉음과 더불어 배틀 엑스와 내 검이 격돌하며 새파란 불씨가 사방으로 튀었다.

분명 위치상 유리한 것은 군주였을 터였으나, 강한 물줄기를 타고 오르는 연어처럼 내 검은 배틀 엑스를 밀고 올라갔다.

아주 일순의 접점.

찰나의 순간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 순간에 우위를 누가 점하고 있는지 판단한 군주는 고함을 내질렀다.

“제… 젠장!! 질 수 없….”

악에 받치듯이 필사적이었으나 놈은 말꼬리를 이을 수 없었다.

카아아앙!

그것보다도 더 큰 파찰음이 사방을 울렸다.

단순한 진동을 넘어 그 이상의 파급력으로 인해 방안의 모든 유리가 와장창 깨진다.

앞으로 발걸음을 뻗을 때마다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만한 소란이면 상황을 파악하고 경비병이 나타날 법도 했지만, 건물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아, 참고로 이럴 일을 대비해서 모든 전력을 밖으로 빼돌렸으니까. 괜한 기대는 하지 마.”

내 말에 놈은 배틀 엑스를 양손으로 붙잡고는 이를 빠듯 갈았다.

그것도 잠시.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 같더니, 미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폭소하기 시작했다.

“흐흐, 푸흐흣… 크하하핫!!”

거의 발작을 연상케 하는 놈의 모습에 나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서 그만둘 법도 했지만 놈은 더욱 미친 듯이 웃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착잡하게 굳은 얼굴로 놈을 바라봤다.

“저 새끼는 갑자기 왜 빠개고 있어.”

도대체 저거 뭐야? 나도 무서워.

예로부터 미친놈하고는 상종하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시발 이거 잘못 걸린 건가.

여러모로 찜찜한 상황이었으나 내가 할 일은 변치 않았다.

우선 저놈의 멱을 따는 것.

16층의 수호자이기도 한 놈을 쓰러뜨리면 3일간 여기에서 머무를 필요도 없이 바로 다음 층으로 향할 수 있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민은 짧았다.

당장이라도 목을 베기 위해 검격을 뻗으려는데, 마치 놈의 갑옷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그 위에서 솟아난 촉수 다발이 검을 얽어맸다.

“시발! 이건 뭐야.”

반사적으로 손날을 휘둘러 촉수를 끊어낸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촉수는 마치 자아를 지닌 것처럼 기괴하게 움직였다.

지렁이를 연상케 하는 혐오적인 모습에 나는 입가를 틀어막았다.

“우욱, 왜 저딴 식으로 생겨 먹었어.”

온갖 혐오적인 것에 대해 내성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버티기 버거울 정도의 광경이었다.

나는 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칼자루를 다시 되잡았다.

이젠 저놈을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걸 계속 보고 있다간 내 멘탈이 버티지 못하겠다고 판단한 나는 자세를 잡았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놈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크흐흐, 이제 알았더냐. 이것이 바로 나의 본신! 이제 네놈은 나를 이길 수 없…….”

“응, 좆 까.”

혐오적인 외견부터 시작해서 무슨 소년 만화의 삼류 악당이 할 만한 오글거리는 대사까지.

음, 이건 패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야.

놈을 이 이상으로 상대했다간 내 손발이 오그라들 거 같단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일 각오로 한다.

재액의 가면을 벗고, 본래대로의 신체로 돌아온 나는 가벼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놈의 어깻죽지부터 시작해 허리춤까지 길게 검을 그었다.

가공할만한 위력에 놈의 몸통은 대각선으로 이등분되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지.”

이등분된 몸통을 한데 모으기 위해 촉수들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나는 발을 뻗어 촉수를 뭉갰다.

허무하리만치 터진 촉수는 모든 힘을 잃고 바닥에 축 처졌다.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헛수작을 부려도 이미 알아차렸기에 안 통한다.

애초에 몇 번이고 부활하더라도 놈을 이길 자신은 가득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검을 재차 휘둘러 놈의 목을 절반으로 뎅강 쪼갰다.

이걸로 모든 생명력을 잃은 군주는 숨을 거두었다.

〈수호자를 쓰러뜨렸습니다.〉

〈따라서 16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플레이어 일괄 메시지: 16층의 최대 MVP는 신한별 플레이어입니다. 또한 최종 생존자는 27인입니다.〉

〈곧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수많은 상태창이 겹겹이 쌓이면서 시야 전체를 가렸다.

이걸로 16층도 전부 마무리였다.

검에 묻은 혈흔을 떨쳐내고 있자, 상당히 멀리 떨어진 장소로부터 수십 개의 빛기둥이 하늘 위에서 떨어졌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신호.

이터의 권능을 사용해 수호자의 스탯을 흡수하고 있을 무렵, 하늘에서 떨어진 섬광이 시야 전체를 암전했다.

〈띠링!〉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 * *

파아앗!

언제나처럼 대기실에 도착하자, 새하얀 섬광이 시야를 점멸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16층에서 도착한 플레이어들이 나를 한데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모든 플레이어를 통틀어 내가 맨 마지막으로 대기실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시선에 나는 퉁명스럽게 무시했다.

‘뻔하지 뭐.’

16층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그 일 때문에 쓸모없는 원한을 산 모양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나한테 와서 직접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 일전에 있었던 일의 책임을 따지기엔 할 말이 없겠지.

내 덕분에 모두가 수월하게 저번 층을 클리어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니까.

그들도 지나고 보니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 빼고는 저번 층이 끝나기 전까진 계속 떨어지고 있었으려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말고, 구역질을 하며 쓰러진 플레이어를 보곤 피식거렸다.

일부 플레이어한테는 PTSD로 남았겠지만, 뭐 어쩌겠어.

다들 좋자고 한 일인데.

다른 이들 역시 내 공로를 부정할 수 없었는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다들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렇고, 언제 봐도 경치 하나만큼은 장관이네.”

나는 플레이어에 대해선 신경을 끄곤 끝도 한도 없이 펼쳐진 은하수를 구경했다.

탑에서는 피와 살육만이 가득할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이런 풍경도 썩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하긴 이 정도 여흥 정도는 있어야지 등반하는 맛이라도 있지.

이거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한창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은하수의 별에서부터 세련된 곰방대를 입에 문 진행자가 나타났다.

진행자의 등장에 플레이어들은 하나 같이 긴장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16층을 겪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이 부분은 어쩔 수 없으리라.

16층은 단순히 오류라고 불러도 무방할 테니까.

내 이야기를 통해 튜토리얼이 배경이 될 거라곤 그 누구도 예상치도 못했을 거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보자… 이 중에서 탈락자는 한 명뿐이군요. 다소 특이한 방법으로 이번 층을 클리어하긴 했지만…]

진행자는 플레이어들을 둘러보다 말고, 내가 있는 장소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다 말고, 숨을 크게 들이쉬곤 새하얀 연무를 내뱉었다.

[오히려 좋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자신만의 특이점을 살려서 새로운 관점과 방식으로 클리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니까요.]

진행자의 발언에 일부 플레이어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완전히 저희들의 출제미스라고 해도 무방하군요. 사실 16층에서 난이도가 이렇게 어려워질 줄은 저희조차 예상을 못 한 일이거든요.]

그는 탑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하며 중절모를 벗었다.

본래 탑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본 나였기에 그 누구보다도 그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탑의 잘못을 인정했다.

이는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지만, 간과할 순 없었다.

‘뭔가 있어.’

내 촉이 말했다.

저건 잘못을 인정하는 쪽이 아니라. 이번 사고를 빌미로 더 큰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이건 같은 동류를 만났을 때의 기분이었다.

진행자는 옅은 웃음기를 띠고는 다시 양팔을 펼쳤다.

[그래서 말입니다. 저희들은 사죄의 의미로 여러분께 두 가지의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는 선택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이대로 예정된 수순에 따라서 층을 진행할 것이냐. 혹은 남은 17층, 18층, 19층을 한데 모아서 한 번의 층으로 클리어할 것이냐!]

그가 제안한 파격적인 선택지.

그 파급력은 상당했는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여러분의 수가 많으니 뜻을 모으긴 어렵죠. 그래서 16층의 MVP인 신한별 플레이어께 선택권을 드리려고 합니다.]

은하수의 수천, 수만 개의 별의 빛이 내 쪽으로 모였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진행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내게 유혹을 건넸다.

[자, 이제 신한별 플레이어님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하실 겁니까.]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나는 놈과 같은 동류로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면에 엄청난 함정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저건 분명 사기다.

그것도 잘못 걸리면 빼도 박을 수도 없는 러시안룰렛.

‘그렇다면….’

나는 아주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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