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42화 (42/175)

제42화

다행히도 건물에 들어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침입자를 대비하기 위해 마법으로 만들어진 빽빽한 감시망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재액의 가면을 통해 경계망을 통과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확실히 A급 아티팩트의 명성답게 효과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사람의 체형과 지문, 심지어는 홍채까지도 전부 복사한다.

그야말로 사기적인 능력의 아티팩트.

게다가 이터의 권능으로 기억까지 흡수했기에 들킬 걱정은 없었다.

“끄르륵.”

건물의 내부에는 바깥에 있는 것 이상으로 강력한 괴수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나에 대해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나는 뒷짐을 지고는 복도를 느긋하게 걸으며 씨익 웃었다.

‘이거 잘하면 무난하게 가겠는데.’

괜히 힘을 쓸 일도 없다.

지나가는 경비병들한테는 자연스럽게 인사만 건네면 될 뿐.

괴수들한테 경례를 받는 건 묘한 기분이긴 했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이래서 다들 권력을 얻으려고 난리인가 보다.

끝도 한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복도를 걷다 말고 나는 멀리에서부터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고는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지금까지 만났던 괴수들과는 전혀 다른 기운.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대어를 한 번 낚아볼까.”

나는 머릿속에서 준비하고 있던 시나리오를 재차 점검하고는 정면으로 발을 뻗었다.

재액의 가면을 벗었다가 다시 착용한다.

그러자 팔과 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며 새하얀 뼈가 살점을 뚫고 튀어나왔으며.

멀쩡한 살점이 폭발하며, 온몸에서 상당한 출혈량이 일어난다.

당장 의식을 잃어도 이상한 것 없는 부상.

‘오, 생각보다도 현실적인데.’

나는 놀란 표정으로 팔과 다리를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당연히 현실적이겠지.

이건 그럴듯한 분장 같은 게 아니라 진짜니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재액의 가면에는 죽기 직전의 놈까지 전부 복사했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놈의 껍데기를 복사했을 뿐이지,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보면 연기라는 점은 금방 들통날 터.

그러기 위해선…

나는 안색을 싹 바꾼 뒤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이런 발연기로는 한참 부족하다,

다리가 부서진 감각을 떠올리며 자기 체면을 시킨다.

뼈가 근육과 핏줄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그 뒤로 살점을 뚫고 솟아 나온 뼈가 절단되며.

뼛조각이 치밀한 신경 조직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기억을.

고통스러운 감각을 신체의 감각에 동화시킨다.

“크헉!”

자기 체면을 극한까지 몰아세우자, 실제로 고통스러운 듯한 상황에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고통을 몸에 되새기곤 양손으로 벽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인식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상대방은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 단장님? 도…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내 연기에 그대로 속은 모양인지, 복도 너머로부터 다가온 여인은 말을 더듬거리며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무래도 내 정체를 노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상대방의 관심을 끌었다면 첫 번째는 성공이다.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목소리로 여인을 진정시켰다.“허억허억, 이 늙은이는 신경 쓰지 말게나.”

“신경 쓰지 말라니… 당치도 않은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이런 부상을 보고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크흑, 자네의 말은 고맙다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는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단장님의 몸보다 중요한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내게 되묻는 여인.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결계 내부에 침입자가 들어왔다.”

“치, 침입자라니!”

“침입자는 총 2명이다.”

“두, 두 명이라니!”

“그중 하나는 새끼긴 하지만 드래곤이다.”

“드, 드래곤이라니!”

설마 이 새끼 모자란 년인가?

앵무새처럼 내 끝마디를 반복하는 놈을 보며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소 우습긴 했지만, 오히려 치밀한 것보단 낫다.

모자란 년이면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으니까.

나는 얼음 발이 돋을 듯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전권을 전부 네게 위임할 터이니, 네가 모든 군대를 지휘해서 일을 해결하거라.”

“지금 전권을 위임하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흐음, 그렇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그녀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흐리멍덩한 눈빛과 멍청한 얼굴을 할 땐 언제고.

그녀는 앞으로 한 발짝 다가오더니 내 몸에 묻는 피를 손가락으로 슥 문지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었다.

“흐음… 단장님이 갑자기 부상을 입고 오신 것도 의아스럽지만, 그거 저한테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신가요?”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는다.

완전히 예상밖에 상황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발, 멀쩡히 잘 가다가 갑자기 왜 저래?’

혹시 내가 말실수라고 했나?

내가 했던 말들을 다시 되새겨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한 부분은 없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여인은 내 손에 묻은 혈흔에 혀에 가져다 대며 재차 물음을 건넸다.

“일전에 군주님께서 직책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 자는 직책을 막론하고 엄벌에 취하신다고 하셨는데, 그게 진심이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군주?

그의 발언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권능을 사용해 노인의 기억을 찾아본 결과, 그녀가 지칭하는 상대를 파악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 싶었는데 그놈이었나.’

내 목표이기도 한 16층의 관리자.

아무래도 놈은 이런 상황까지도 전부 상정해 대비한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별문제는 없었다.

이에 대한 대답이라면 생각해뒀으니.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대답을 회피하거나 동요하면 그것을 긍정하는 꼴이다.

나는 최대한 담담함을 유지하며, 고압적인 어조로 그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후우, 내가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어이가 없군.”

“……?”

“나를 의심하는 겐가? 아무래도 전시 상황이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 이건 군주님이 직접 내린 전언이다. 아니면 내가 부상을 입었다고 조그마한 꼬투리를 잡아 내 목을 취할 생각이렷다? 만일 그런 의도였다면 나도 많이 얕잡아 보였군. 이 노인네가 네년한테 당할 법 싶더냐.”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거죠?”

내 몸에서 일어난 은은한 투기를 본 여인은 곤란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의문에 나는 간단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끌끌, 간단하지 않은가. 어쩌고 자시고 네가 못 믿겠다면 군주님께 직접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또 무슨 일이 있으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지.”

책임?

그딴 건 좆까라고 해라.

어차피 책임을 질 놈이라면 이미 뒈지고 이 세상에 없거든.

하지만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그녀는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에 눈빛을 돌변하며 고개를 숙였다.

“새, 생각이 짧았습니다! 군주님의 전언에 따라서 저는 서둘러 전력을 소집할 테니 나머진 맡겨주십시오.”그래, 못 믿겠다면 되돌아가서 확인하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대고 못 믿겠다곤 대답을 못 하겠지.

뭐 실제로 되돌아가서 확인하겠다고 했으면 계획이고 자시고, 정면 돌파할 생각이었지만.

“남은 일은 잘 부탁하마.”

“헌데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무엇이지?”

“지금부터 단장님은 어떻게 움직이실 계획이십니까. 아…! 단장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혹여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단장님의 위치를 알아야 할 테니….”

그녀는 말하다 말고,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수습했다.

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목적지를 입에 담았다.

“난 군주님을 뵈러 집무실에 가겠다.”

* * *

“대충 위치는 여긴가?”

나는 권능을 통해 얻은 노인의 기억과 대조하며 목적지에 다다랐다.

혹시나 모종의 이유로 길이 바뀌거나 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문 앞에 도달하자, 두 마리의 괴수가 앞을 가로막았다.

“크르르, 거기서… 멈… 춰라.”

“크릉, 아무리 단장… 이라고 하더라도… 이 앞은 출입할… 수 없다.”

미약하게나마 소통이 가능한 괴수들은 내 앞으로 손톱을 들이밀었다.

“출입할 수 없다고?”

“그렇…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괴수.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에서 안 비키겠다는 거지?”

“그렇다. 군주…님을 제외하곤… 출입할 수 없다.”

재차 물었지만 괴수는 물러갈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방금까지는 이곳에 도달하기 전까진 쓸모없는 힘 낭비는 피하고 싶어서 싸움을 피했을 뿐이지.

여기까지 도착했으면 무슨 일이든 간에 상관없다.

“미리 경고는 했어.”

후회는 하지 마라.

나는 괴수들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아앙⎯!

상당한 폭음과 함께 괴수들은 문을 박살내고 방 안으로 날아갔다.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땅바닥에 떨어진 괴수는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쓰으으벌, 사람이 들어간다고 하면 들여보내 줘야지. 누구더러 오라 가라 명령이야.”

나는 손목을 탈탈 털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군주라고 불리는 놈이 어떤 상판대기를 하고 있는지 한번 보자고.

방의 중심부에 들어서자 중갑 차림을 한 남자가 있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움츠러질 만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한눈에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본 나는 씩 웃으며 나직였다.

“찾았다. 내 사냥감.”

군주라고 불리는 놈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궁금했었는데, 보기보다 별거 없잖아?

주변을 둘러보며 방안의 구조를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자, 군주는 가공할 살기를 내뿜으며 이쪽을 노려본다,

당장 이쪽을 향해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

뜬금없는 살기에 의아해하고 있자, 군주는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네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단장의 행색을 하고 있지?”

단장?

그건 또 뭐 하는 놈이야.

밑도 끝도 없이 말을 건네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건넨 질문의 요지를 파악한 나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이거 내 얼굴이 아니었지.’

현재 내 얼굴은 재액의 가면을 써서 구현해낸 노인의 면상.

어쩐지 적이 침입했는데 곧바로 달려들지 않나 싶었다.

분명히 적으로 보이는 자가 부하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 경계하기 마련이겠지.

잘됐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에 나는 입꼬리를 귀에 걸쳤다.

“어서 대답하지 못하겠느냐! 네놈의 정체가 뭐냐고 지금 물었다!!”

“군주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시는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이름은 단장입니다.

신한별이라는 이름은 이번에는 양보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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