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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41화 (41/175)

제41화

“끌끌, 젊은 것이 대범하기도 하군. 갑자기 자신이 없다고 해서 뭔가 싶었더니만, 질 자신이 없다는 것이라니.”

“시끄러워.”

새삼스러운 기분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직접 말할 땐 몰랐는데 남의 입으로 직접 얘기를 들으니 묘하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자세를 잡았다.

이러고 있는 도중에도 속속히 등장한 괴수들이 우리들의 주변을 포위했다.

아까 둘리한테 했던 자랑대로 저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별문제 없었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투에 검을 휘두르는 호구가 어딨어.’

그런 의미 없는 싸움에 시간을 소비할 정도로 한가하진 않았다.

16층이 끝나는 3일간 싸우고 있을 순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

나는 괴수들로부터 시선을 옮겨 바로 전부터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노인을 향했다.

“관건은 저놈인가.”

처음에는 긴가민가 싶었는데, 대화를 조금 해보니 이터의 권능을 통해 얻은 기억이 떠올랐다.

괴수를 소환하는 원흉은 바로 저놈.

일단 저놈만 족치면 괴수들이 소환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

간단하네.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면 그 뒤는 한결 쉽다.

“뭐긴 원흉을 족치는 일밖에 남지 않았지.”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고는 둘리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다른 괴수들이 못 끼어들게 알아서 엄호해.”

“한별 알았다! 다른 놈들은 내가 맡을 테니 걱정 마라!”

적당히 손가락을 그으며 지시를 내리자, 둘리는 짧디짧은 팔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대답했다.

명쾌하게 대답하는 건 다 좋은데.

“새꺄, 알았으면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어서 움직여. 그것도 일일이 알려줘야 해?”

그런 사소한 행동 따윈 생략해도 상관없다.

나는 둘리의 양쪽 날개를 잡고는 허공을 향해 세차게 내던졌다.

순식간에 상공 위로 날아오른 둘리는 괴수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브레스를 내뿜었다.

상당한 위력에 의해 괴수들 사이로 자그마한 틈이 벌어졌다.

그걸 놓칠 리 없는 나는 눈을 번뜩이며 지면을 박차고 뛰었다.

엄청난 속도로 배경이 가속한다.

뒤늦게 몇몇 괴수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시간을 끌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좌에서 우로 세차게 긋는다.

촤아악!

마치 폭포수의 물결을 가르듯 거침없이 나아간 검격이 괴수들의 가슴팍을 절반으로 양단했다.

그것들을 대신해 다른 괴수들이 나타났지만, 나머지도 매한가지나 마찬가지였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괴수들을 바라본 채, 노인은 허탈한 얼굴을 지었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네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

“정체가 뭐긴,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야. 그리고 곧 죽을 노인네가 그것까지 알아서 뭐 하려고.”

나는 짧게 뇌까리며 한 번에 목을 베어버릴 각오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달리.

채앵!

그의 앞에서 불사라기가 튀며 검이 허공에서 막혔다.

“마법?”

별의별 것도 많네.

언뜻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의 주변으로 반투명한 방어막이 둘려져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내뺐다.

“크흐흐, 보았느냐. 이게 바로 궁극의 마법인….”

“조잡한 방어막 하나에 숨어 있는 놈이 조잘조잘 말도 많네. 그래서 어쩌라고.”

나도 마법을 상대하는 건 영 익숙하진 않지만, 하나만큼은 알고 있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마법이라고 별수 있을까.

열 번 해서 안 넘어가면 수십 번, 수백 번이나 찍으면 어떻게든 넘어가겠지.

“그게 궁극의 마법이라면서 한번 잘 막아봐.”

나는 지면에 발을 박아 지지한 채,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채앵!

“후후, 그래 봤자다. 아무리 해봤자 힘 낭비밖에 되지 않는 것을 모르겠더냐.”

본격적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그는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었다.

채앵! 채앵!

충격으로 인해 불씨가 사방으로 튀며 방어막의 가루가 휘날린다.

그러자 자신만만할 때는 언제고, 노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히… 힘이 들면 멈추지 그러느냐. 내 특별히 네놈은 안 아프게 죽여줄 터이니.”

채앵! 채채앵⎯

“이, 이제 그만….”

채⎯앵! 파직!

잇따른 강타에 방어막에 금이 가자, 놈은 눈에 띄게 당황한 낯빛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궁극의 마법이란 게 금이 날 줄은 생각지도 못한 탓이겠지.

“머… 멈춰라! 지금 당장 멈추라는 말을 못 들었느냐!”

파지지직!!

노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방어막은 속절없이 깨지기 시작했다.

방어막의 입자가 눈처럼 흩날렸다.

흩날리는 입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노인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린 지 오래였다.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내구력을 보며 노인도 알아차린 것이었다.

내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이윽고.

콰직!

내 검은 노인의 마법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그, 그렇다고 해서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노인은 서둘러 허공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영창을 진행했다.

내가 방어막을 부술 때까지 준비했던 수십 개의 마법진이 사방팔방으로 떠오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광경.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땅바닥에 떨어진 돌을 주워 놈의 턱을 맞혔다.

고통으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지자, 수식 중이던 영창이 끊기며 마법진이 흩어졌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열 번 두들겨서 안 넘어지는 나무 없다고.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놈의 목을 깔끔하게 베었다.

투둑⎯

놈의 목은 허무하리만치 땅바닥을 굴렀다.

이걸로 끝… 이라고 생각했을 터였으나.

“크어어억!”

대장뻘이기도 한 놈을 죽이면 전부 끝나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소환된 괴수는 어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예상을 벗어난 당황스러운 상황에 나는 뻘한 표정을 지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그나마 놈의 마력이 끊어진 덕분인지 괴수를 소환하던 마법진은 모든 효력을 다하고는 소멸했다.

‘설마 저걸 전부 상대해야 하는 건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나는 멈칫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안은 없었다.

상대하는 수밖엔.

본격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을 그때였다.

〈탑의 보상이 집계되었습니다.〉

“어?”

이건 갑자기 뭐야?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눈앞으로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보길 잠시.

나는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까….’

13층에서 악동과의 사건으로 인해서 탑이 적절한 보상을 주겠다고 했었지.

언제 줄지 몰라서 까먹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지급한다고?

나야 개꿀이지.

“기왕이면 한 방에 일대를 날릴 수 있을 만한 거라도 뜨면 좋겠는데.”

뭐… 굳이 그런 게 아니라도 그 외에도 많잖아.

귀찮은 잡몹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폭탄이나.

짜증 나는 새끼들을 족칠 수 있는 폭탄이거나.

좀 가성비 좋은 핵 버튼 같은 거 있잖아.

나는 한껏 기대하며 시스템 창을 눌렀다.

오색빛깔의 섬광과 함께 내 손 위로 무거운 물체가 떨어졌다.

그리고 기대했던 물건을 확인한 나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야.”

모든 예상을 엎고 보상으로 나온 것은 무색의 가면이었다.

〈재액의 가면(A)〉

- 지정한 대상자의 얼굴과 체형, 목소리를 복사합니다.(제한 시간은 1시간입니다.)

- 일정 이상의 피해를 입을시, 효과가 해제됩니다.

※ 주의! 남의 얼굴을 복사했다고 하더라도 못생긴 얼굴이 바뀔 일은 없으니 착각하지 맙시다!

또 얘는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아티팩트의 설명을 찬찬히 읽어보던 나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뽑기 운은 엿이랑 바꿔먹었나 보다.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걸릴 줄이야.

“뭐… 나중에 사기치기엔 좋겠네……. 어?”

잠시만 사기라고?

신경질적으로 가면을 땅바닥에 버리려고 하다가, 문득 머릿속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에 나는 제자리에서 멈췄다.

왜 이런 좋은 아이디어를 지금 떠올렸을까.

나는 재액의 가면을 오른손에 쥐고는 오히려 괴수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싸우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귀찮으면 직접 동화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 * *

노인의 기억을 이터의 권능을 통해 흡수함으로써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곳이 심상치 않은 장소라는 것이었다.

“그건 탑에 대해서 문외한이 봐도 뻔한 사실이니까 그렇다 치고.”

관건은 그게 아니라.

“이곳엔 수호자가 있다는 거지.”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수호자.

일부 층마다 존재하는 탑의 스페셜리스트로 처치하면 바로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트리거 같은 존재였다.

일전에 1층에서 상대해본 만큼 잘 알고 있었다.

방금의 노인이 괴수를 총괄하는 책임자와 같은 느낌이라면.

‘수호자는 16층 자체를 통괄하는 사령관.’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을 보며 나직였다.

이곳이 적들의 본진.

언뜻 보기에도 괴기해 보이는 건물에 들어서자, 건물보다도 흉측해 보이는 괴수가 창을 내 쪽으로 들이밀며 다가왔다.

한눈으로도 경계심이 보였다.

이전이었다면 입막음을 위해 저 괴수를 죽이고 시작했을 테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방금 써먹은 방식대로 하면 되겠지.”

나는 재액의 가면을 이용해 노인을 복사하고는 착용했다.

우드득!

뼈가 강제로 구부러지는 소리와 더불어 등이 꼽추처럼 굽어진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키와 근육이 제멋대로 수축하더니, 곧이어 노인과 비슷한 체형이 되었다.

외견은 대충 이걸로 그렇다 쳐도 필요한 건 목소리.

“흠, 흠… 크흡!”

성인 남자보다는 얇은 목소리와 청아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껄껄한 성량.

어중간한 사람이 하면 금방 탄로 날 정도의 미세한 조정을 요구하는 작업 끝에 나는 목소리를 구현했다.

일반인이었다면 이런 담력과 미세한 습관을 기억해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이런 것에 익숙한 나한테는 불가능 따윈 없었다.

“거기에서 멈추거라.”

아주 짧은 한마디, 그 목소리를 들은 괴수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제자리에서 멈춰 선다.

내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괴수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괴수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끌끌끌, 집을 지키느라 수고가 많군.”

지금부터 나는 신한별이 아니라.

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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