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잇따른 내 발언에 플레이어들은 하나 같이 잘못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의문을 정정시키듯 쐐기를 박았다.
“다들 그런 얼굴 안 해도 돼. 제대로 들은 게 맞으니까. 다들 거기에서 떨어지면 돼.”
“하하, 신한별 씨 아무리 그래도 농담이 심한 게 아닙니까. 여기에서 떨어지라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 전원이 힘을 합쳐서 덤벼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대신에 그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의문을 표했다.
“적어도 합당한 근거를 설명해주셔야 할 겁니다.”
“근거라….”
확실히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근거도 없이 뛰어내리라는 말은 그들로서도 쉬이 이해되지 않겠지.
다만 그들이 크게 간과한 점이 있었다.
“그럼 반대로 내가 너희들에게 합당한 근거를 설명해야 할 근거라도 있나?”
“그… 그게 무슨 억지….”
“아니지. 억지를 부리는 건 너희들이지.”
나는 그들의 말꼬리를 자르며 부정했다.
처음부터 그들의 양해를 구하고 진행할 생각이었다면,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해도 되지 않는 순억지에 이기적이기까지 하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탑을 오르는 목적은 개인적인 욕심일 뿐이지, 남을 배려해가면서 자선 봉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딱히 설명은 필요 없을 거야.”
어차피 너희들도 알게 될 거거든.
나는 뒷말을 삼키며 검을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플레이어들은 회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쫘아아앗!
지면을 향해 검을 횡으로 휘두르자, 강렬한 폭음과 함께 그들이 서 있는 땅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플레이어들은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걸로 저들의 목숨은 끝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으나.
〈현재 생존자는 27인입니다.〉
몇 분이 지나도 생존자의 숫자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 시스템창을 확인한 나는 상정 내라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배경은 튜토리얼과 달라진 것은 없나 보네.”
튜토리얼에 있을 당시.
나는 현실을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 절망하며 여러 가지 자살을 실험해봤다.
익사, 질식사, 쇼크사 등등 수많은 사인 중에서도 흥미를 이끈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낙사, 나는 제자리 높이 뛰기나 드높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등 다양한 경우를 실험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도 실험했었지.’
누가 보면 자살 애호가인 줄 알겠어.
나는 끝도 한도 쭉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절벽을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곁으로 보기에도 엄청난 높이일 거 같다고?
“당연하겠지. 실제로도 엄청난 높이니까.”
여기에서 떨어져서 낙사하기까지는 적어도 3일이 꼬박 걸리는 시간이 소모된다.
내가 겪어봐서 잘 안다.
그 말은 즉, 저들은 16층이 클리어되기 전까진 24시간 동안 줄곧 떨어지고 있을 거라는 뜻.
중간에 아사하면 어떻게 하냐고?
뭐, 그것까지는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떨어지는 동안에도 보급은 알아서 되니까. 트롤 짓만 안 하면 별일 없겠지.
그것을 끝으로 나는 절벽에서 시야를 떼며 숨을 돌렸다.
“일단 급한 불도 해결됐겠다. 그럼 본격적으로 가볼까.”
이번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의 얼굴을 보러.
* * *
나는 튜토리얼에 있을 적부터 항상 지니고 있던 의문이 있었다.
과연 괴수들은 어디에서 생성될까?
탑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점.
언뜻 보기에는 복잡한 트릭이 있을 것 같지만 의문을 해결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튜토리얼에 천 년 동안 처박혀 있으면 남는 게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괴수들이 나타난 방향을 타고 역주행해서 찾아봤다.
그리고 그 의문의 답은 비교적 간단했다.
- 이 드넓은 필드의 끝자락에서 생성된다.
“뭐 당연한 얘기겠지.”
이 좁은 장소에서 새삼스럽게 괴수들이 구애 활동을 하며 번식을 할 리는 없을 테니까.
차라리 그랬다면 괴수들의 그 장면을 보면서 시간이라도 때웠겠지.
“X부럴, 아무리 심심해도 그건 아니네.”
혼자 연상하다 말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내둘렀다.
그것도 잠시.
나는 무관심한 눈빛으로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바라봤다.
얼핏 보기에는 수십, 수백 킬로나 쭉 이어진 황야처럼 보여도.
‘어디까지나 눈속임이지.’
땅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 저쪽을 향해 던지자, 돌멩이는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벽에 부딪힌 것처럼 떨어졌다.
돌멩이가 부딪친 허공에는 거미줄처럼 금이 쩌저적 벌어져 있었다.
이렇듯 튜토리얼의 끝자락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괴수는 이 너머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반대로 물어보겠다.
과연 괴수들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튜토리얼에 있을 당시에는 대답할 수 없었던 의문.
하지만 지금은 대답할 수 있었다.
〈이터의 권능으로 흡수한 괴수의 기억을 열람합니다.〉
손아귀에서부터 은은한 보랏빛의 섬광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힘껏 주먹을 쥐곤 계속 눈여겨보던 장소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벽에 주먹이 격돌하자, 거미줄처럼 생겨난 금은 점점 갈래를 뻗어나가며 상당한 크기를 만들었다.
본래였다면 여기에서 끝나겠지만.
같은 장소에 다시금 주먹을 뻗자 고작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작은 개구멍이 생겨났다.
‘빙고.’
역시 괴수의 기억 속에서 본대로다.
손에 묻은 가루를 탈탈 털어내며 균열 사이로 들어서자, 바깥에서 본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 풍경이 펼쳐졌다.
“꼭 음침한 찐따 새끼들이 비밀 기지니뭐니 하면서 뭘 숨겨둔다니까.”
뻔하디뻔하지.
나는 히죽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튜토리얼의 너머에는 마치 모든 생명체가 시들고 나서의 아마존을 연상케하는 삭막한 풍경이 이어졌다.
이곳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16층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모든 플레이어 중에서도 최초로 비밀 구역 16-1을 발견하셨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아아, 비밀 구역이라면 전에 2층에서 봤던 그건가 보네.”
곤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잘됐네.
2층에서 봤던 그곳과 같은 부류의 장소라면 어느 정도 닮아있는 곳도 많을 터.
게다가 괴수의 기억을 통해 대충이나마 내부 환경은 알고 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다만.
그런 나로서도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는데.
“…저건 또 뭐야?”
내 시선이 멈춘 곳에는 상당한 양의 괴수의 군대가 오와 열을 맞혀서 서 있었다.
수백, 아니 대충 어림잡아도 수천은 훨씬 넘어 보이는 괴수의 숫자에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하나하나가 내가 튜토리얼에 있을 적에 상대하던 괴수들과 맞먹을 정도의 강함이었다.
게다가 그중에는 다소 상대하기 곤란해 보이는 개체도 드문드문 보일 정도.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무렵, 옆에서 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별 왜 그런가? 설마 저놈들한테 한별이 지나?”
“새끼 왜, 수가 많아서 쫄기라도 했어? 뭔 일 있으면 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할 테니까. 둘리 넌 신경 쓰지 마.”
저게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야?
쓰벌, 솔직히 말해서 저 숫자는 아무리 나라도 개 쫄리는데.
이미 말로는 뱉어놓고, 속으로 괴수들의 숫자를 세어보던 나는 속으로 경악했다.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절로 부랄이 떨리는 기분이었다.
머리론 정면 돌파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은 멈추지 않았다.
“저딴 것들은 나한테 걸리면 몇 날 며칠은 싸울 자신도 있어.”
그래, 저 숫자랑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면 적어도 몇 날 며칠이 있어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 내 심정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둘리는 불붙은 집에 기름을 부었다.
“그게 정말인가?”
“그래봤자 나한텐 전부 한주먹거리야.”
“오, 진짜인가! 한별 멋있다!”
다소 과장이 섞인 내 말에 둘리는 찰싹 같이 믿은 채, 양쪽 눈을 번쩍거렸다.
이런 순진한 녀석한테 거짓말을 한 건 좀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도.
진짜로 저기에 있는 군대와 맞서 싸울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리고 아예 없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니니 상관없으리라.
“한별 그렇다면 저기에 있는 저 남자도 이길 수 있나?”
“남자라니?”
뜬금없는 둘리의 말에 눈을 돌리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허리가 반쯤 굽은 노인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상대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그것도 내 기억이 아닌 권능을 사용해 흡수한 괴수의 기억에서.
조금만 더 떠올리면 떠오를 것 같았는데, 그걸 방해하듯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끌끌끌, 웬 쥐새끼가 침입했나 싶어서 잠시 들러봤는데 꽤나 재밌는 얘길 하는군.”
노인의 질문에 흐릿하게나마 떠오를 것 같은 기억의 형태가 스치듯 사라졌다.
‘별 상관없겠지? 중요한 인물이었으면 바로 떠올랐을 테니까.’
다소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나는 머릿속에서 상념을 지웠다.
노인은 미소를 일관하며 내게 질문을 건넸다.
“하나만 물어보지. 자네, 이곳에는 도대체 어떻게 들어왔지?”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왜? 알려주면 순순히 물러나기라도 하려고?”
“후후, 미안하게 됐지만 나도 못 본 체하고 넘어갈 정도로 무르진 않아서 말일세.”
그는 지팡이를 꺼내며, 흉흉한 살기를 풍겼다.
누가 봐도 적대적인 상황.
“덤빌 테면 어서 덤벼. 피차 시간 낭비하지 말고 싸울 거면 빨리 싸워야지.
“미안하지만 네놈들이 싸울 상대는 내가 아니라 이쪽이라네.”
노인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지팡이를 땅바닥에 내리쳤다.
그러자 엄청난 규모의 마법진이 바닥에 새겨지는가 싶더니, 마법진으로부터 흉흉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파아아앗!
자욱한 안개의 너머로부터 수백, 수천 개의 안광이 번뜩인다.
기감을 통해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그것들을 지그시 쳐다봤다.
시꺼먼 먹구름 속을 뚫고 방금 전에 봤던 괴수들의 군대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쓰벌, 이래서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니라는 건가 보네.’
그런데 어쩌나.
“그다지 자신은 없거든.”
괴수들한테 질 자신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