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싸한 분위기가 흐른다.
이루 형용치 못할 정도의 긴장감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공기가 양쪽 어깨를 압박했다.
그럴듯하게 꾸며낸 은유적인 표현 같은 게 아니다.
가공할만한 기운에 황결을 비롯한 이 자리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바닥에 뒹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오롯이 신한별뿐.
황결은 새하얘진 안색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도, 도대체 어떻게….”
그가 지닌 권능 중에는 식물을 이용한 탐색 능력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적어도 수십, 아니 수백 마리나 되는 괴수들한테 포위당했다.
그것도 바로 직전에 상대한 슬라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존재감.
더 이상 이곳은 그가 알고 있는 튜토리얼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플레이어들이 학살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짙은 절망감에 빠져 포기하려던 그때였다.
말도 안 되는 압박감 속에서 누군가가 움직인 것은.
“아까부터 시끄러워서 뭐가 짖어댄다 싶었는데. 너희였어?”
모두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가운데, 신한별만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정면으로 걸어 나간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의 모습에서는 익숙함을 넘어 형용할 수 없는 관록마저 느껴졌다.
마치 이곳이 제집이라도 되는 듯한 여유로움.
처음 겪는 상황.
처음 겪는 전투.
모든 게 처음 겪는 것이겠지만,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움직일 수 있는 플레이어는 오로지 신한별 밖에 없었다.
“역시….”
황결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분하다는 듯 어금니를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똑같은 플레이어로서 튜토리얼을 클리어하고 탑을 등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한별의 행보는 그 어떤 플레이어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이런 게 열등감일까.
마음속 깊이에서 분함이 느껴졌지만, 황결은 손아귀에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지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 * *
괴수를 상대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는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질척한 시선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인데?”
뭐, 상관없겠지.
나는 묘한 기척을 무시하곤, 괴수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포위망을 형성한 괴수들.
한 놈쯤은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튀어나올 법도 한데, 끝까지 먹이를 주시하는 놈들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명색이 탑이라고 튜토리얼과는 다르나 본데.”
튜토리얼에서 나오는 괴수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계략을 짤 정도의 지략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생명체가 보이면 달려가 공격하는 게 전부였었다.
허나 이곳에 있는 괴수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다.
그 뜻은 간단했다.
‘배경만 튜토리얼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건가.’
하긴 튜토리얼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는다는 게 절대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직전에 슬라임에게 당한 플레이어는 튜토리얼에서처럼 부활하지 않고 그대로 죽임을 당했었다.
여기까지만 봐도 16층의 의미는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이 맹점을 잘 파고 들어간다면…
‘그건 나중에 생각해볼까.’
기다리는 손님이 있는데 언제까지고 기다리게 만들 순 없지.
나는 자세를 잡고는 괴수를 향해 검을 쏘았다.
세차게 날아간 검은 곧은 궤적을 그리며 괴수의 두개골을 반으로 갈랐다.
누가 봐도 즉사.
“뭘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어. 그쪽에서 안 덤비면.”
내가 직접 간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수풀에 숨어 있던 모든 괴수가 쏜살같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가슴이 웅장해질 법한 광경이었지만, 나는 괴수의 두개골 깊숙이에 박혀 있는 검을 회수해 재차 괴수의 목을 베었다.
괴수의 가죽은 일반적인 검으로도 베지 못한 적으로 질긴 편이었지만 내 앞에서는 의미 없다.
뭉툭한 비수가 괴수의 가죽을 양단한다.
검이 지나간 장소에는 마치 몽둥이에 의해 터진 듯한 부상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괴수의 머리를 지르밟아 박살 내며 놈들을 향해 말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서 기대했는데 설마 이게 끝이야?”
* * *
“후우, 나도 나이를 먹었나. 은근 빡세네.”
첫 번째 웨이브를 마친 후, 나는 한숨을 돌리며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는 엄청난 양의 괴수들의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괴수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작은 물줄기로부터 시작해 거대한 강을 이뤘다.
자욱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한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상황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코를 틀어막으며 침묵했다.
다들 하나 같이 현타가 온 듯한 표정.
그야 그렇겠지.
“16층에서 이렇게 막힐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까.”
나는 저녁으로 받은 푸석한 호밀빵을 입에 욱여넣으며 중얼거렸다.
저들이 첫 번째 웨이브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전부 내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없었다면 저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16층이 끝날 때까지 저들을 보호할 생각은 나 또한 없었다.
내가 싸우는 목적은 탑을 등반하기 위해서지, 쓸모없는 사회봉사를 할 생각은 없었기에.
왜? 책임감도 없이 잔혹하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원래 탑이 그런 거다.
그것은 탑뿐만 아니라 지구에서조차 직결되는 이야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은 결국 도태되기 마련이다.
인간관계에서나 조직의 사회생활과도 다를 게 없다.
게다가 남의 뒷바라지를 할 생각은 일절도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짜증 나는 것은 탑이나 진행자의 속셈대로 진행되는 것.
탑은 어떻게든 플레이어들의 수를 줄이는 것이 목표다.
그렇다면…
“일단 저놈들을 어떻게든 해야겠네.”
그러기 위해선 앞으로 저들이 방해되지 않도록 배제하고, 진행자의 손도 쉽사리 닿지 않을 장소가 필요했다.
분명 이곳의 배경은 튜토리얼과 다를 게 없을 테니 내 기억과도 달라진 것이 없을 터.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나는 먹다 남은 호밀빵을 땅바닥에 집어 던지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맛도 더럽게 없네. 이딴 걸 어떻게 먹으라고 준 거야.”
하여튼 센스하고는…
나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에 가시나요?”
돌발적인 내 행동에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음을 건넸다.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내가 너희들을 버리고 도망이라도 칠까 봐? 겁이라도 나나 봐?”
“…그, 그게.”
내 대답에 그는 정곡을 찔렸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당연히 할 말이 없겠지.
정말로 그렇든 아니든 간에 놈들의 머릿속에서는 내가 당연히 지켜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원래 인간은 불리한 상황에선 자기 입맛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참 우습기도 하지.
당사자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반면에 그들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까놓고 말하자면 나를 이용해 먹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강자가 한 번 호의를 베풀면 약자에게 그것은 곧 당연하게 인식하고 이윽고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마치 약자라는 게 하나의 권력이라는 듯이.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가… 권리라고 여기는 건 한순간이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였으나.
까짓것 못 어울려 줄 것도 없잖아?
오히려 이번 건에 관해서라면 나야말로 환영이다.
“뭐… 그렇게 부탁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
“아, 그런가요. 정말로 다행입니다. 신한별 플레이어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이번 층 역시 편하게 깰 수 있을 겁니다.”
나는 한껏 꾸며낸 얼굴로 그의 웃음에 화답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너희들을 지켜주는 대신에 너희들도 하나는 약조를 해줘야지.”
“어떤 약조를…?”
“이번 층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말에 협조하는 것으로.”
“그… 그건 왜?”
뜬금없는 내 발언에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지구에서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본 나로선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의 물음에는 은연중에 불신이 담겨 있다는 것을.
새끼 감도 좋긴.
그 질문에 관해서라면 미리 대답할 것도 생각해놨기에 당황할 것은 없었다.
“그거야 이렇게나 인원이 많은데 내 몸은 하나잖아. 만약에 누구 한 명이라도 돌발행동을 하면 책임은 누가 지려고? 네가 지겠다면야 말리진 않을게.”
“아! 그렇다면 문제없겠군요! 알겠습니다. 반드시 협력하겠습니다.”
그 역시도 책임을 지는 것은 사양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수긍했다.
이내 모든 플레이어를 통솔한 그는 대형을 짰다.
이리저리 봐도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급조한 것치곤 제법 나쁘진 않았다.
나는 그들 전원을 이끌고는 자리를 이동했다.
이윽고 제법 긴 시간이 흘러, 우리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가 그 사실을 밝히자 플레이어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긴… 절벽이 아닌가요?”
그의 말대로 우리들이 도착한 장소는 끝도 한도 보이지 않는 가파른 절벽.
물론 탑에서 이런 지형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기에 그닥 놀라울 것은 없었다.
다만.
나는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을 직시했다.
그곳은 바로 절벽 너머의 풍경.
지금까지 16층에서 봤던 풍경과는 달리 검디검은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시간이 해가 지기 전의 이른 저녁이라는 것을 감안 하면 이질적이라면 상당히 이질적인 풍경.
나도 여기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엔 저들처럼 상당히 놀랐었지.
그들의 의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맞아. 여기가 제대로 온 게 맞아.”
“혹시 여기에서 괴수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이거나 혹은 함정을 설치하실 생각이신가요?”
“음? 아닌데?”
“예?”
간단명료한 대답에 그는 다소 당황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의문이 가득한 그들의 물음에 나는 검에 손을 짊어졌다.
“긴말 안 할 테니까. 딱 3초 준다. 전원 여기에서 뛰어내려.”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