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38화 (38/175)

제38화

〈16층의 장소는 탑의 튜토리얼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잠시 후 신한별 플레이어 외 28명의 플레이어가 16층으로 이동합니다.〉

내 희망과는 달리 벌서 확정이 나버린 모양인지, 우리들의 눈 앞으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그것을 본 다른 플레이어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당연하겠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튜토리얼은 매끼 밥도 나오고, 죽지도 않는 천국 같은 공간으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나 또한 처음까지만 해도 그들과 다를 것 없이 느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반대로 말하자면.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매끼 똑같은 호밀빵과 물.

괴수들에게 배때기에 구멍이 뚫리고, 사지가 절단되는 중상임에도 죽지 않는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수천, 수만 번이나 반복되는 그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무언가 많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파아앗!

빠른 속도로 확장해 나간 별의 빛은 이미 우리의 몸을 뒤덮은 뒤였기 때문에.

[그러면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의 건투를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진행자는 파이프를 깊게 들이마시며 우리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 * *

〈이곳은 16층입니다.〉

나는 허공 위에 떠오른 시스템창을 뒤로 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지겹도록 익숙한 풍경.

지겹도록 익숙한 지리.

지겹도록 익숙한 흙내음과 수풀의 냄새.

어딜 둘러보든 간에 익숙한 장면밖에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 수백 번이나 부정하고 싶어도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한다.

이곳은 내가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그 장소가 맞다는 것을.

“이게 뭔 지랄 같은 상황이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어쩌겠나.

탓하고 싶어도 내가 직접 내 손으로 뽑은 장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번 층의 클리어에 집중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사뭇 진지한 나와는 반면.

“와씨, 16층으로 튜토리얼이 뜬다고? 이거 개꿀이잖아. 이번 층도 그냥 깨겠는데.”

“진짜 개꿀이네.”

“튜토리얼에는 절대로 못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전보다도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16층을 둘러보고 있었다.

기나긴 악연의 장소였던 나와는 달리 그들한테 튜토리얼은 어떤 의미로선 추억의 장소일 테니 그럴 만도 하겠지.

지금은 분위기를 깨지 말고 즐길 수 있도록 해주자.

‘추억팔이는 얼마 못 가서 끝나겠지만.’

고난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그걸 미리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으리라.

경계를 늦추지 않고 검의 손잡이를 툭툭 만지고 있자, 어느샌가 내 옆으로 다가온 황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뭘 그렇게 경계하고 있어. 어차피 튜토리얼인데 설마 별일이 생기겠어?”

“괜히 풀 죽은 것보다도 자신만만한 건 좋은데 말이야. 전쟁은 언제 일어나는지 알아?”

“…전쟁? 그야 상대방이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

녀석의 어리둥절한 표정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만 정정해주자면.

“원래 일은 사람이 방심한 틈을 타서 발생하기 마련이지.”

“그게 무슨 뜻….”

그에 대한 황결의 물음은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그가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콰득!

멀리서부터 생생한 파육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뒤이어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누가 예고한 것도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황결은 당황한 표정으로 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녀석은 사색이 된 채로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장에는 하체밖에 없는 시체가 서 있었다.

어찌 된 모양인지 무언가한테 흉측하게 물어뜯긴 듯 머리를 포함한 상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올 법한 광경.

“원흉은 저놈인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을 살펴본 나는 곧바로 판단을 내렸다.

내 시선이 닿은 곳에는 푸른색의 슬라임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슬라임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인식은 고블린보다도 못한 초보 중에서 초보라 불리는 괴수.

하지만 여기는 탑이 아니라 튜토리얼이다.

똑같은 관점으로 생각하다간 큰코다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바로 곁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황결은 눈을 번뜩이며 슬라임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슬라임? 와, 진짜 오래간만인데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놈이야.”

그는 은신화를 발동함과 동시에 넝쿨을 엮어서 만든 채찍을 날렸다.

괴수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최고 출력과 스피드를 이용해 한 번에 터뜨려버릴 생각인 듯 보였지만.

쫘악!

넝쿨이 슬라임의 몸에 닿자마자 공격이 진동 청소기처럼 흡수되었다.

미처 눈으로는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

다른 플레이어들이었다면 반응할 틈도 없이 슬라임의 몸에 빨려 들어가겠지만, 황결은 가까스레 반응해 몸을 내뺐다.

“후우우, 시발! 저… 저건 뭐야!”

볼품없이 땅바닥을 구른 황결은 당황한 낯빛으로 소리쳤다.

단 1초라도 늦었다면 죽을 뻔했다.

한순간에 그 사실을 이해했는지 녀석은 바닥을 기어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곤 피식거렸다.

“탑이 속이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뭐 그리 놀라. 왜? 너무 놀라서 오줌이라도 지렸나 봐?”

“…….”

어, 이 새끼 왜 아무런 대답도 없어?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다시 보니까. 녀석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있는 것도 같았다.

측은하기까지 한 모습에 나는 입을 떼지 못했다.

고등학생이나 된 놈이, 그것도 남이 보는 눈앞에서 지린 건 아무래도 심리적 부담이 크겠지.

뭐 어쩔 수 없지.

나는 손목을 가볍게 풀며 슬라임을 향해 걸어갔다.

“거기에서 눈 크게 뜨고 잘 보고 있어.”

저런 괴수의 상대는 이렇게 하는 거니까.

지면을 즈려밟고는 슬라임의 앞에 도달했다.

곁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위험성도 없는 형광색 푸딩처럼 보여도 누구보다도 튜토리얼을 많이 겪어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별거 없어.”

놈의 몸통에 오른손 주먹을 뻗는다.

그러자 방금 전과 같이 슬라임의 몸에 내 주먹이 쑤욱 들어간다.

마치 블랙홀과 같은 흡입력.

슬라임의 몸에 어깻죽지까지 들어간 시점에서 나는 다릿심에 힘을 주곤 원을 그리듯 팔을 크게 휘둘렀다.

파도의 물살에 역행하듯 나아간 내 팔은 슬라임의 몸을 뚫고 관통했다.

주먹을 쥐곤 힘을 주자, 슬라임은 간단하리만치 터졌다.

나는 옷에 묻는 슬라임의 체액을 툭툭 털어내곤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어때 쉽지?”

거봐 어려울 거 하나도 없다니까.

아주 간단하단 듯이 말하자, 무슨 이유에선지 황결은 믿기지 않다는 것처럼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심쩍다는 듯한 시선을 무시한 나는 플레이어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나마나 이놈도 누구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가 그대로 빨려 들어가서 죽은 모양이네.”

“윽….”

그에 대해선 변명 거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황결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뒤로하고, 아무것도 없는 상공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16층의 클리어 방법은 3일간 생존하시는 겁니다.〉

떴다!

적당한 타이밍에 16층을 등반하는 방법이 하늘 위에 떠올랐다.

이전과는 달리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임무.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관건은 3일인가.”

3일.

튜토리얼에서는 하루에 두 번가량 괴수들의 웨이브가 일어난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 하면 약 5번의 웨이브만 버티면 된다.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계산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까 전에 벌어진 일은 어디까지나 괴수 중에서도 변종일 겁니다. 여긴 튜토리얼이니 만일의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암울해진 분위기를 고무시키기 위해 외쳤다.

그래, 낙관적인 분위기는 좋다만.

나는 그것을 말한 플레이어의 앞으로 다가가 마주 섰다.

“야, 넌 또 뭐 하는 새끼야.”

“네? 갑자기 무슨 일로….”

“분명 네가 만일의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했지? 근데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러다가 또 누가 트롤 짓이라도 하다가 뒈지면 네가 총대를 메려고?”

“그, 그게….”

그는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의도는 좋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 거짓부렁으로 사람들의 희망을 자극해 선동하는 것만큼이나 못 할 짓은 없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 의지도 없는 새끼가 번지르르하게 말만 많긴. 선동을 하려면 좀 더 그럴싸하게 하던지.”

거짓말도 그 정도로 허접하게 하지 않는다.

그에게 충고를 건네던 그때였다.

〈첫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발생한 시스템창과 더불어 상당히 떨어진 거리로부터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쿠웅! 쿠웅! 쿠웅!

작디작은 미약한 진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소리를 키워나갔다.

그것은 적들과의 거리가 점차 다가온다는 뜻.

은연중에 그것을 알아차린 플레이어들의 얼굴에는 긴장함이 역력했다.

한순간 괴수들이 진격하는 소리가 멎는가 싶더니.

콰아아앙!

귀가 얼얼할 정도의 폭음과 함께 울창한 거목이 넘어졌다.

“크르릉.”

잩은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빛나며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털이 쭈뼛 서는 듯한 압박감.

하지만 놀랄 만한 것은 안광 단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

울타리처럼 포위하듯 수십, 수백 개의 안광이 주변을 에어 싸맸다.

완전히 포위된 셈.

탈출로는 없다.

식물과 관련된 권능을 사용해 주변을 탐색한 황결은 아연실색해진 얼굴로 말을 걸었다.

“빈틈이 하나도 없어. 완전히 고립됐어.”

“그래? 그렇다면 간단하네.”

“에…? 도대체 그게 무슨 뜻….”

“괜히 나섰다가 방해하지 말고 보고만 있어.”

탈출로가 없으면 직접 만들면 되는 일이다.

아주 간단한 이치지.

나는 바로 코앞까지 다다른 괴수들을 마주하며, 괴수의 뼈로 직접 제작한 검을 뽑아 들었다.

“기다리고 있었지? 나도 마찬가지야.”

아아, 이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은 오래간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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