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결국 저질렀다.’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복잡한 감정이 용솟음쳤지만, 어차피 탑의 타도를 목표로 하는 한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다.
단지 시기가 일렀을 뿐이지.
탑의 관리자라고 하는 작자들을 상대하려면 저놈들은 말단에 불과했다.
겁낼 것은 없다.
여기부터가 승부처다.
“그래도 할만해.”
나는 조용히 나직이며 놈들의 면면을 둘러봤다.
악동과 비교하면 하나하나가 상대도 안 될 정도의 막강한 전력을 지니고 있다.
버거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시에 아티팩트를 발동하고 이터의 권능을 이용해 재액의 힘을 흡수하면 할 만했다.
가능성은 반반.
‘아니, 100퍼센트로 만들어야지.’
기왕 한 판 뜰 거면 이기는 것밖에 선택지는 없었다.
검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승부를 점치고 있을 때쯤이었다.
[푸하하, 역시 익히 들었던 거처럼 대범하신 분이군요.]
항상 무표정을 고수하던 진행자는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마주한다.
방금 전까지와는 180도 달라진 분위기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
‘저 새끼는 갑자기 왜 웃어.’
공포감마저 유발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눈가를 찌푸렸다.
비단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는지, 다른 이들도 동요하는 분위기였다.
당장이라도 한바탕을 할지 모른다는 내 예감과는 달리 그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10층에 진입하기 전부터 업적을 달성하신 등반자가 있어서 궁금했었는데, 역시는 역시군요.]
‘역시는 무슨 얼어 죽을 역시야.’
저거 할 말 없어서 대충 지어내는 거 같은데?
[확실히 당신에게선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지네요. 탑을 오르기 위해선 그만한 대범함은 있어야겠죠.]
무언가가 느껴지긴 개뿔.
도대체 뭘 느꼈는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엔 그거 똥촉이야.
그러기도 잠시, 녀석은 대안을 제시했다.
[신한별 플레이어님의 의견이라면 잘 알겠습니다. 이번 사태의 정도를 판단해 조만간 탑에서 적절한 보상을 내려드리겠습니다. 그거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썩 나쁘진 않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뒤처리는 저희가 직접 맡도록 하지요.]
대신해서 건네 온 제안에 나는 곁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다른 어쭙잖은 놈들보다도 배포가 큰 걸 보니, 괜히 그만한 자리에 올라간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그렇게 됐으니, 여기에서 볼 일도 전부 마쳤으니 저흰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시공간이 비틀리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균열이 생성되었다.
포승줄로 악동의 몸을 포박한 그는 균열 속으로 퇴장하며 말을 덧붙였다.
[이번은 불미스러운 일이었지만, 언젠간 다른 일로 뵈게 되는 날이 오길 기다리겠습니다.]
그의 인사에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녀석을 마지막으로 모든 진행자가 균열로 들어가자, 멈췄던 시간은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아무것도 없는 딱딱한 회색빛에 오색 물감을 떨어뜨리듯.
건조하게 멈춰있던 구름이 흐름에 따라 움직였으며.
선선한 바람이 피부에 맞닿았다.
방금 전까지 생사를 오갔다는 것이 전부 꿈이었다고 생각될 정도의 평온함.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플레이어 일괄 메시지: 탑의 시스템을 다시 재가동합니다.〉
〈우승자와 임무 요소가 공백임을 확인 완료, 자동으로 13층이 폐쇄됩니다.〉
〈그에 따라 연계 층인 14층이 폐쇄됩니다.〉
〈15층으로 이동합니다.〉
* * *
〈15층은 휴게 공간입니다.〉
〈휴게 공간은 플레이어님의 업적을 기반으로 구성이 됩니다.〉
〈52분 뒤에 16층으로 전이됩니다.〉
나는 강한 섬광과 함께 15층에 도착했다.
휴게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따스한 온기가 몸을 감쌌다.
길고 길었던 전투로 피곤에 찌들어 있던 나는 억지로 의식을 끌어올리며 눈을 번쩍 떴다.
“어디 보자 시간은… 대충 50분 정도인가.”
가장 먼저 시간을 확인한 난 가장 먼저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10층에선 1시간 30분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시간이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휴게 공간은 플레이어의 업적으로 구성된다.
사실상 13층과 14층이 공백이었으니 시간이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반대로 생각하자면 11층-12층의 업적만으로도 52분이라는 시간을 얻은 셈이니 큰 수확이었다.
아쉽긴 해도…
“방 안의 크기는 그다지 안 달라져서 다행이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방안의 규모는 전과 변함없었다.
어쩌면 더 작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간을 졸이고 있었는데 잘됐네.
안 그래도 작은 골방인데, 여기에서 나뿐만 아니라 도마뱀 한 마리도 같이 있으려면…
“어?”
혼자 생각하다 말고 나는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둘리는 지금 어디에 있지?
13층에서 진행자와 격돌하기 직전에 황결을 데리고 도망치라고 명령을 내린 게 녀석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설마 13층에 혼자 두고 온 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자 알림 소리와 함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TIP. 펫을 분실했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펫은 언제나 주인과 함께니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도 다음 층으로 이동할 때는 같이랍니다.〉
* 유기견 아닌 유기용이 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타이밍 좋게 나타난 시스템창을 확인하던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같이 15층에 왔단 뜻이네.”
불행 중 다행이다.
지금까지 키워준 값을 전부 받지도 못했는데, 13층에 두고 왔으면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고도 남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 욕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별? 뭐하다가 이제 왔나! 한별 지각이다. 덕분에 한참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서 뭐 하고 있었어?”
“전에 한별이 오면 바로 씻으라고 해서 씻었다!”
“어, 그래? 잘했네.”
나무랄 거까진 없으려나.
나는 뿌듯하단 듯이 양팔을 벌리고 있는 둘리를 곁눈질로 보며 칭찬을 건넸다.
하여튼 평소엔 말귀도 잘 못 알아듣는 고구마인데, 이렇게 보니 또 나름 귀여운 거 같다니까.
둘리를 통해 몸 상태를 확인한 나는 눈을 찡그렸다.
11층에서 13층, 치열한 전투를 겪어서 그런지 옷부터 해서 몸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된 거 나도 바로 씻을까.”
일단 뒷일은 씻고 나서 생각하자.
푸쉬이이이⎯
곧바로 씻고 나오자, 욕실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수증기가 방안으로 퍼져 나왔다.
나는 하체에만 수건을 걸친 채 나왔다.
바깥과의 온도 차이로 인해 몸은 금방 식었다.
“후우.”
나는 곧바로 냉장고를 열어 탄산음료를 챙겼다.
“이제 남은 시간은….”
〈21분 12초 뒤에 16층으로 전이됩니다.〉
눈길을 돌려서 시간을 확인한 나는 침대에 엎어져 누웠다.
남은 시간은 20분 남짓.
이제 와서 잠을 청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김에 커뮤니티나 조금 둘러볼까.”
그동안 탑을 등반한다고 바빠서 커뮤니티를 보지 못한 지도 꽤 됐다.
분명히 밀린 내용도 많을 터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커뮤니티에 할 짓 없는 플레이어들이 의미 없는 내용들을 적어놓고, 그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상위 랭커들 사이에서도 ‘커뮤니티 = 시간 낭비’라는 인식이 박혀 있을 정도.
“사실 그런 분탕질을 보는 게 또 재밌지만.”
오히려 튜토리얼에선 오락거리가 없었기에 그런 왁자지껄이 마음에 들었다.
또 의외로 꿀팁들도 많이 있으니 시간 낭비까진 아니다.
타이밍 적으로 보면 지금이 시기적절하겠지.
앞으로 있을 16층부터의 정보도 미리 알아놔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나름의 시간 투자라고 생각하자.
‘무엇보다도 13층에서 14층으로 바로 넘어갔으니까 어떤 반응인지도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시스템창을 조작해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채널 1번에 접속하셨습니다.]
미친, 개레전드 사건임. 니네들도 알고 있음?
⤷ ㅋㅋㅋㅋㅋ 얜 뭔데 갑자기 뒷북임? 그거 얘기 나온 지가 언젠데
⤷ 이해 좀 해주자… 원래 찐특이 분위기도 모르고 나대잖아
⤷ 고교생활 감수성 아니 PTSD ON
⤷ 아ㅋㅋㅋ 일단 빵부터 사오라고ㅋㅋㅋ
- 갑자기 NPC하고 풍경이 전부 멈춰서 뭔가 싶었는데 탑의 시스템이 멈춘 거라고?
- 3대 길드 피셜: 탑이 만들어진 이례로 이런 일이 관측된 적 없음
⤷ 3대는 무슨 ‘폰피셜’
- 진짜 이대로 탑 무너지는 거 아님?
- 들어보니까. 무슨 일인진 몰라도 유채아도 지금 20층에 있다고 하던데
-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대로 커뮤니티에서도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갑론을박 중이었다.
여러 어그로가 많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번 사태에 대해서 적지 않은 경각심을 느낀 모양이었다.
업로드되던 글은 빠르게 주제를 바꿔서 다른 내용으로 넘어갔다.
바로 나에 대한 주제로.
- 목격자 증언 들어보니까. 이번에 13층에서 진행자하고 신한별 그놈하고 한판 싸웠다던데? 그거 때문에 탑에서 제지하면서 일어난 일이래
⤷ 정보추
⤷ 정보추
⤷ 고추
⤷ 정보추
⤷ ㅅㅂ 야 위에 이상한 거 하나 껴 있는데?
- 하긴 진행자인지 뭔지하는 그 새끼, 볼 때마다 패고 싶었음 그래서 누가 이겼음?
- 역시 신대협… 앞으론 신협이라고 부른다.
⤷ 아아, 신협의 존엄은 어디까지…
⤷ 신협ㅋㅋㅋㅋ 은행 이름이냐ㅋㅋㅋ 빨랑 돈이나 뽑아오라고
- 신한별인가 그놈이 13층 이상하게 클리어해서 14층 없이 15층으로 건너뛰었다던데
- 와씨, 신한별하고 있는 조는 개꿀 빨았네
“허, 황결 그놈이 벌써 커뮤니티에 글 썼나 보네.”
내가 진행자와 격돌한 사실은 그걸 바로 앞에서 지켜봤던 황결만 알고 있다.
저런 정보가 풀린 걸 보면 놈이 벌써 떠벌렸을 터.
다른 화제와는 달리 나와 관련된 내용은 열기가 쉽사리 식지 않았다.
다른 주제는 보통 5분이면 끝난다고 하면 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10분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탑에서 적지 않은 화제를 일으켰단 뜻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쯤 나서도 괜찮겠지.”
나는 커뮤니티에 글을 남기기 위해 처음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