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35화 (35/175)

제35화

파지직!

[도대체 이게 무슨 만행이지.]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악동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검은 전격을 내뿜었다.

탑의 진행자라는 명성답게 가공할 만한 압력이다.

바로 곁에 있던 황결은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가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쓰러졌다.

확실히 모든 재액을 합쳐도 비교조차 되지 않을 위협이었지만, 나는 조소를 흘리며 그것을 일축시켰다.

“왜? 내가 뭔 짓을 저질렀었던가?”

왜 이리 얼굴을 구기고 있어? 기왕이면 활짝 펴두는 게 어때.

모르쇠로 일관하자, 악동은 어금니를 깨물며 인상을 구겼다.

놈이 아무리 이 층을 관할한 진행자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책임을 물을 순 없다.

다른 이도 아닌, 탑의 관심을 온몸에 받는 나한테 손대는 것은 더욱 껄끄럽겠지.

예상대로 내 추측이 틀어 맞았는지, 악동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시치미를 뗄 생각인가?]

“글쎄.”

뭘 추궁하는진 미리 알려줘야지 시치미를 떼든 말든 하지.

내가 모든 성소를 포기함으로서 13층의 우승자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

혹은 그로 인해 연계층인 14층이 폐쇄되었다는 거?

그게 아니라면 13층에 존재하는 재액을 내가 전부 죽인 거?

“네가 어떤 것을 탓하는 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다짜고짜 찾아와서 추궁하면 오히려 곤란한 건 이쪽이다.

나는 능청스러운 미소로 대꾸하자, 악동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네. 신한별, 네가 지금 말한 내용들 전부다.]

“지랄하네. 사실 여부는 둘째치더라도 악동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말하는 건 순 억지라는 거.”

[……]

나는 싱겁게 웃으며 악동을 마주했다.

“첫째, 난 정해진 대로 13층을 클리어했을 뿐이야. 둘째, 14층? 그까짓 귀찮은 탑 등반을 건너뛸 수 있으면 플레이어들한테는 좋은 일이지. 마지막으론….”

내가 내 멋대로 하겠다는데 네가 뭔데 간섭질이야.

언제부터 탑이 그런 세세한 유도리를 따질 정도로 융통성이 좋았던가.

그런 곳에서 따질 융통성이 있었다면 내가 튜토리얼에 갇히지도 않았겠지.

따지고 보면 이건 단순히 자신이 짠 계획을 그르쳤다는 것 때문의 분풀이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하늘의 너머를 바라보며 능글거렸다.

“그나저나 탑의 관리자인가 하는 작자들은 네가 여기에서 이러는 건 잘 알고 있나 봐? 자기가 잘못한 걸 플레이어한테 책임을 떠맡기는 모습을 방관할 정도로 씀씀이가 좋은가 보네.”

[시끄럽다.]

비아냥거리자 악동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추측이 틀어 맞았는지, 우리가 서 있는 주변에는 돔 형태의 자기장이 넓게 처져 있었다.

추측건대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막기 위한 일종의 결계.

저걸 사용해서 탑의 간섭을 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효과는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분명 이변을 알아차리면 탑에서도 제재를 가해올 테니까.

“이유가 어찌 됐건 간에 진행자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으니, 탑에게 징계를 받는 건 시간 문제일 테고….”

내가 일을 저질러 버리면서 14층이 열리지 않았고, 상정한 것 이상으로 플레이어들이 많이 생존했다.

결론은 뻔하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징계받을 것도 뻔하니, 동귀어진으로 날 데려가겠단 건가.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지레 겁먹고 물러났을 만한 발언이었지만.

“새꺄, 그런 거였으면 진작 나한테 말이라도 하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꿍해서 있어.”

곁으로 생긴 것처럼 진짜 애새끼도 아니고 왜 저렇게 뒤끝이 길어.

나는 놈을 향해 손바닥을 접으며 말했다.

“덤빌 테면 덤벼. 난 언제든지 상관없으니까.”

[……!]

이어진 내 도발에 악동은 당황하는 듯싶더니,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등반자 주제에 겁도 없군. 다름이 아닌 이 나를 능멸할 줄이야.]

“능멸은 무슨… 내가 없는 사이에 중2병이라도 걸렸나. 왜 이렇게 나불나불 말이 많아? 덤비라니까.”

그쪽에서 안 갈 거라면⎯

“이쪽에서 먼저 간다.”

지면을 박차고 허공을 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악동의 앞에 도달한 나는 양손으로 검을 붙잡은 채 자세를 잡았다.

“일부로 봐줄 필요는 없지? 그럼 처음부터 전력으로 갈 테니까. 이 꽉 물어.”

검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악동의 손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각기 다른 힘의 격돌에 의해 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일어났다.

파지지지직!

그 순간 악동의 몸에서 자줏빛의 자전이 방전하며 나를 덮친다.

1초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

미처 눈으로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스피드였으나 감을 통해 상황을 판단한 나는 손을 휘둘러 공격을 튕겨냈다.

저릿한 감각이 팔을 타고 흐른다.

절로 아찔한 기분이었지만 이런 것 가지고는 아무런 위협도 안 된다.

주먹을 쥐는 것으로 전기를 튕겨낸 나는 앞선 전투의 잔해를 즈려밟고는 악동의 배후를 파고들었다.

[제법이군.]

악동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 180도로 고개를 획 돌리며 웃음을 지었다.

엽기적이기까지 한 광경.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나는 침착하게 검격을 날렸다.

반격이나 회피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악동은 오른팔을 내주고는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휘말리면 안 된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는 반대편 방향으로 날린 풍압으로 놈의 손을 회피하곤, 곧바로 재주넘기로 안정적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식은땀이 팔을 타고 손아귀 사이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기의 오른팔이 날아가는데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다고?

저건 무슨 미친 전략이야.

마주한 악동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얼음장처럼 한없이 메마른 감정.

나는 곁에 있는 둘리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둘리야. 저기에 떨어진 놈 챙겨서 여기에서 최대한 벗어나.”

“알았다.”

둘리 역시 범상치 않다는 것을 파악했는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투명화를 풀고 나타난 둘리는 황결을 업고는 활공했다.

“으아아, 이, 이건….”

“이 자리에서 그대로 죽기 싫으면 잔말 말고 그대로 있어. 굳이 자살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자… 잠시만 가기 전에 먼저 줄 게 있어!”

“줄 게 있다고?”

그런 의문을 품는 것과 동시에 황결은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던졌다.

공중에서 낚아챈 물건을 확인한 나는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를 띄웠다.

“13층에 도착하자마자 박물관으로 향했으니까. 혹시 필요한 게 이건가 싶어서 챙겨놨는데….”

“그래, 잘했어.”

설명을 덧붙인 황결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건네준 물건만 있으면, 내가 13층에 도착하고 받았던 보상을 활용해서 써먹을 수 있었다.

〈역사의 파편(D)〉

- 한때는 SS급 물건이었지만 시간에 흐름에 따라 상당히 낡게 되었다. 역사에 해당하는 물건에 거울 부분을 비추면 과거의 현상이 현현함.

- 보상으로 받고 나서 언젠간 쓰겠지 하고 별 기대 없이 묵혀뒀던 건데.

황결이 건넨 물건이라면 충분히 쓸만했다.

“그래도 짐값은 해서 다행이네,”

그것도 잠시, 나는 안색을 굳히며 악동을 노려봤다.

놈의 몸에서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에 맞서기 위해 황결에게 받은 물건를 통해 아티팩트를 활성화하려는 그때였다.

〈플레이어 일괄 메시지: 탑의 모든 시스템을 정지합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일시 정지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게 멈췄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인상을 구기고 있자 공간이 일그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오는 느낌.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경계하고 있자, 일그러진 공간 속에서 악동과 비슷하게 생긴 존재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본 나는 곧바로 경계했다.

저건 보통내기들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상대한 악동 녀석과 비교해도 부족함 없을 정도,

아니, 따지자면 그 이상이라고 해도 모자라리라.

‘산 넘어 산이라더니. 저 새끼들은 또 뭐야.’

과연 단신으로 저놈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을까? 상황 분석을 통해 승률을 계산해보고 있을 즈음 갑자기 나타난 존재들이 입을 열었다.

[어이없군요. 이변이 일어난 거 같아 확인차 들렀는데… 이런 짓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게다가 탑의 눈을 속이려고 하다니.]

그러고 보니 탑의 감시를 막기 위해 미리 소환해둔 결계가 어느샌가 소멸해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리자마자 바로 온 건가.’

그들의 등장에 바로 직전까지 살기를 내뿜던 악동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말하는 내용으로 추측건대, 저놈들은 악동보다도 더욱 상위의 존재인 듯싶었다.

굳이 추측할 것도 없이 기감으로 느껴지는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자.

그들 중 책임자로 보이는 자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신한별 플레이어님이시군요. 이런 불찰에 휘말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론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책임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심심찮은 인사말을 건넸다.

얼핏 보기에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

그러나 탑과 관련된 진행자들은 하나같이 드높은 권위 의식을 지녔다는 것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대우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이번 사태의 경중을 알 수 있었다.

싸움의 중재가 사과, 그와 더불어 사태 수습.

상식적으론 여기에서 넘어가는 게 맞다.

탑과 관련된 사건과 휘말리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는 것은 모든 플레이어가 가진 상식이다.

만일 내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였어도 타협을 통해 넘어갔을 터였지만.

앞선 전투로 인해 샘솟는 아드레날린은 주체할 수 없었다.

“불찰? 이 새끼들이 돌았나. 이게 불찰이라고 치부해도 될 일인가 봐? 왜,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시체 앞에서도 불찰이라고 하면서 대가리나 박으려고?”

도발이 담긴 내 말투에 책임자뿐만이 아닌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절반은 호기로움, 절반은 분노.

그들의 반응은 두 개로 나뉘었다.

[호오, 그 뜻은 탑을 대변한 저희들의 사과가 마음에 안 드셨다고 판단해도 괜찮을까요.]

그중에서도 호기로움의 진영에 있던 책임자는 내게 악수를 건네왔다.

진행자들에게 탑은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그는 직접 탑의 이름을 운운하며 이야기를 건넨다.

이는 더 이상 선을 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허나, 머리론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몸은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섭섭하게 왜 그래. 마음에 안 들다 못해서 당장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작자들의 낯짝이나 좀 보면서 삼자대면하고 싶을 정도인데.”

…저질렀다.

벌써 저질렀다고!

지금까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한 한 방을.

[언동에 있어서 주의해주시죠. 아무리 당신이라고 하더라도 봐줄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의 효과였는지, 호기로운 얼굴을 하고 있던 진행자들의 표정이 일제히 분노로 바뀌었다.

악동 한 명이면 모를까.

그 너머의 실력을 가진, 그것도 수십 명의 적의.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벌써 내 입은 움직이고 있었다.

“봐준다라…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상놈 새끼들을 봐주고 있는 건 너희들이 아니라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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