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34화 (34/175)

제34화

〈깃발을 지닌 플레이어 3인이 사망하셨습니다.〉

〈거점은 총 6개입니다.〉

* * *

거점의 특수옵션이라는 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탑에 대해서라면 어지간해선 전부 파악한다고 자신하는 나조차도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커뮤니티에서도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내용.

의아함을 느끼기도 잠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절반 이상의 거점을 차지해서 그런 건가?”

현재까지 내가 차지한 거점은 전부 다 합쳐서 5개.

하기야 지금까지 13층을 클리어 한 플레이어 중에서 이만한 개수의 거점을 차지한 자는 전 세계를 통틀어 한 명도 없으리라.

그건 둘째치고.

“흐흐흐, 가장 중요한 건 특수옵션이 뭐냐는 거지.”

“한별, 표정으로만 보면 재액이라는 괴수보다도 한별이 더 악당처럼 보인다!”

“시끄러워. 원래 그렇게 생긴 거니까 신경 꺼.”

손날로 둘리의 머리를 툭 치며 대꾸했다.

나는 기대감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는 시스템창을 눌렀다.

그러자 거점의 깃발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거대한 빛기둥이 점점 규모를 키워나가더니, 반투명한 빛이 돔 형태로 상공에 펼쳐졌다.

〈거점이 성소로 업그레이드됩니다.〉

〈성소의 기능으로 플레이어의 능력치가 30% 상승하며, 영역 내부에서는 모든 상태 이상과 디버프로부터 면역을 지닙니다.〉

“오.”

그 내용을 살펴보던 나는 짤막한 감탄사를 흘렸다.

위의 내용대로라면 적어도 성소의 내부에서라면 무적이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성소의 기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성소의 붕괴를 감지했습니다. 다시 복구하겠습니까?〉

덧붙여서 나타난 내용에 나는 눈을 번뜩였다.

“미친 복구 기능까지 있다고?”

게다가.

성소의 내부에 있는 모든 구조물과 생명체의 위치가 CCTV로 보듯이 훤히 눈에 들어왔다.

이루 형용치 못할 정도의 정보량.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해일처럼 밀려오는 정보량을 받아들이다 못해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튜토리얼에서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버티며 멘탈을 단련해온 나한테는 별문제는 없었다.

고민할 가치는 없었다.

시스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면이 흔들렸다.

〈성소가 분해 및 재건축합니다.〉

성소의 내부에 있는 잔해는 전부 내 의지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며 거대한 신전을 만들기 시작한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무너졌던 지하도 위로 웅장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엄청나다 못해 성스러움마저 느껴지는 광경에 둘리는 입을 쩍 벌린 채 구경에 한창이었다.

마음 같아선 나도 둘리의 옆에 앉아 동참하고 있은 마음이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라서 말이지.”

나는 땅바닥에 박아둔 검을 뽑아 들며, 신전의 한 가운데를 직시했다.

쿠웅! 쿠웅!

주의를 기울여야지만 간신히 들릴 만한 진동이었지만, 성소의 권능으로 재액의 위치라면 뻔히 파악하고 있었다.

놈은 이대로 나오자마자 우리를 급습할 속셈이겠지만.

“어디에서 나올지 미리 알고 있으면 선수를 양보할 이유는 없지.”

선빵필승이라는 말이 괜히 존재하겠나.

나는 자세를 잡고는 놈이 있는 지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타격하는 순간, 주먹에 보랏빛의 빛무리가 감도는가 싶더니 시간차로 두 번째 일격이 쏟아졌다.

재액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는 동시에 주먹이 격돌하면서 놈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크뤠뤠뤠뤠렉!!”

파륙음과 함께 대가리의 절반이 박살 난 재액은 괴기한 괴성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대가리에서 흘러내린 샛노란 색의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재액이라는 명성답게 뇌수에조차도 강력한 산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 거기까지만 해도 괴수의 특성인가 보다 하면서 넘길 수 있었을 테지만 ‘진짜’는 그다음부터였다.

자신이 흘린 뇌수에 의해 재액의 살이 녹아내렸다.

투투둑!

다만 그냥 녹아내린 거면 모를까.

피지처럼 생긴 두터운 지방층이 몽글몽글 맺혀 바닥에 떨어졌다.

좋게 말하면 콧물, 더 좋게 말하자면 비지처럼 생긴 지방은 산화되자마자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녀석의 몸에서 수도꼭지처럼 콸콸 흘러내리는 노란빛의 향연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구토를 유발케 하는 장면이었다.

“우욱, 시부럴 같은 새끼….”

세상에 존재하는 많고 많은 장면 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저런 장면이야.

그나마 비위가 강한 나는 욕지기가 솟아나는 느낌을 참았지만, 그런 장면에 내성이란 1도 없는 둘리는 이미 먹은 것을 게우고 있었다.

나는 욕지기가 솟아나는 기분을 참으며 양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성소의 힘으로 능력치가 30% 상승하면서 이전보다도 풍만한 기운이 온몸에 깃든다.

검을 두 손으로 쥔 채, 정면을 시원하게 그었다.

쫘아아악!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쇄도한 참격은 재액의 사지를 갈가리 찢었다.

“크르륵!”

다른 괴수였다면 이미 절명하고도 남을 부상이었음에도 재액은 굳건히 서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놈의 울음소리에 주변에 흘린 피에서 화염이 화르르 타올랐다.

체력을 상당히 깎았음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화력이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폐가 아려오는 기분이다.

“근데 뭐 어쩌라고.”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는 검을 앞으로 내밀고는 불구덩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곁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을 불태울만한 겁화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튜토리얼에서 수백 년 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고르고 고른 검과 모든 상태 이상에서 이겨내는 백용의 갑옷.

“마지막으로 튼튼한 몸뚱어리만 있으면 충분하지.”

새빨간 화염 속을 뚫고 나아가자 바로 앞으로 재액의 얼굴이 나타났다.

화염 속을 정면으로 파고들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지, 재액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대로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이었겠지만 소용없다.

나는 재액의 눈동자에 검을 쑤셔 박고는 강하게 비틀었다.

이대로 숨을 끊기 위해 검을 쥔 손에 힘을 가하던 그때였다.

“으아아아! 사, 살려주세요!!”

저 너머에서 산통을 깨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목소리에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저놈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에 눈살을 찌푸렸다.

모를 리가 없었다.

이번 단체층에서 개인이 지닌 무력에 한해서는 내 다음으로 2등을 차지한 플레이어이자, 나한테 개기다가 처맞은 녀석.

분명 녀석한테는 내가 지닌 거점 중 한 곳을 맡겼을 텐데, 아니 그 전에 녀석의 실력으로도 쫓길만한 상대가 있다고?

나는 순수한 의구심으로 그가 있는 방향으로 기감을 넓혔다.

이윽고 상황을 판단한 난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쟨 또 뭔 짓을 저질렀기에, 재액한테 쫓기고 있는 거야.”

녀석의 배후에 있는 상대는 다름이 아닌 세 번째 재액.

참 용하기도 하지, 다른 재액들에 비하면 비교적 성격이 순하다고 알려진 괴수가 죽기 살기로 돌진하고 있다니.

이대로 못 본 체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도 뭣했기에 나는 녀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야, 오래간만이다?”

“신… 한별…?”

나와 마주한 황결의 얼굴은 새하얘지다 못해 사색이 되었다.

차라리 재액을 상대하는 게 더 낫다는 듯한 표정.

노골적이기까지 한 그 모습에 나는 인상을 구기며 매서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얼굴 안 풀어? 지금부터 5초 준다. 그 안에 뭔 일이 있었는지 대답 안 하면 안 구해준다?”

“흡! 그, 그게….”

“어쭈, 그대로가 편한가 봐? 그럼 앞에 있었던 일은 없는 걸로….”

“서, 설명할게! 일전에 했던 말대로 거점을 지키고 있었는데, 저 괴수가 거점을 파괴하려고 해서 그걸 저지했더니 저런다고!”

황결은 억울하다는 듯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항변했다.

“저 괴수 이상하다고! 아까 전부터 공격을 해도 하나도 안 먹혀!”

“당연히 그렇겠지. 원래 그런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른 재앙과는 달리 세 번째 재앙은 일정 조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공격이 안 통한다.

그 조건은 바로.

‘다른 재앙들을 쓰러뜨리는 것.’

첫 번째와 두 번째 재앙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저놈은 불사신인 채 영원히 날뛴다.

그야말로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위험도로만 따지면 다른 재액보다도 낮았다.

놈이 재액이라고 불린 이유는 단순히 엄청난 화력을 퍼부어도 죽지 않은 위험성 때문이었다.

“어디 보자 그러면 첫 번째 재액은 한참 전에 뒈졌고, 두 번째는….”

쉬이이익! 촤악!

들고 있던 검을 좌에서 우로 긋자, 지금까지 보여줬던 치열한 전투가 모두 거짓말이라는 듯 재액의 목이 허무하리만치 떨어졌다.

나는 검에 묻은 피를 떨쳐내며 능청스러운 웃음을 자아냈다.

“이걸로 두 번째 놈도 뒈졌네?”

그럼 나머지 남은 놈도 불사가 아니게 된다.

적이 지닌 가장 큰 카드가 통하지 않게 된다면.

볼 것도 없는 놈이라는 거지.

방금 전에 보였던 검격을 다시 휘두르자, 남은 재액의 육체도 반절로 쪼개져 소멸했다.

“간단하네.”

나는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손을 털었다.

모든 플레이어 중에서도 그 누구도 대적하지 못한 재액이 죽었다.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닌, 세 마리가.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이를 지켜보던 황결은 넋이 나간 채로 숨을 죽였다.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지구와 인류를 멸망에 이끌도록 한 재액이 바로 눈앞에서 절명했으니까.

“후, 이걸로 된 건가.”

제자리에서 손을 털고 결론을 지으려던 나는 머릿속에서 불현듯 떠오른 의문에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과연 내 말대로 이걸로 됐을까.

지구를 멸망시킨 3마리의 재액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여긴 탑의 내부.

내가 쓰러뜨린 재액은 어디까지나 탑이 직접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지, 실제로 지구를 구하거나 세상을 구한 건 아니다.

더욱 확실하게는 우리는 탑이 만들어낸 배경과 연극 속에서 놀아나고 있다.

13층에 존재하는 사람, 건물, 괴수 등등 그 모든 게 그릇된 허상일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즈음, 나는 눈을 희번덕 뜨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걸로 끝이 아니야.”

따지고 보면 13층의 미션은 거점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행자는 미션의 내용만 말해줬을 뿐, 그 이외의 조건이나 시간제한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다.

만일 미션 자체가 플레이어들을 속이기 위한 함정이라면?

거점을 차지하는 건 어디까지나 명분이고 실제로는 다른 목적이 있다면?

실은 이 모든 전제조건이 함정이라면?

그 증거로 많고 많은 배경 중에서도 13층의 배경은 재액이 발생한 지구, 그리고 계획을 벗어나 상당히 남아 있는 생존자들.

여기까지만 나열해봐도 답은 뻔히 보였다.

목표는 생존자 숫자 줄이기.

물론 이 전부가 내 입맛대로의 해석일지도 몰랐으나.

“탑이나 진행자 그 새끼들의 하는 짓을 보면 그러고도 남지.”

혹 그게 정답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방금 전의 전투로 재액은 전부 죽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골똘히 고민을 반복하던 나는 아무 말 없이 손바닥을 펼치고는 바닥에 내리찍었다.

〈신한별님이 보유한 성소의 개수: 5곳〉

〈성소를 전부 포기하시겠습니까?〉

〈주의! 13층에 남은 거점은 신한별 플레이어가 지닌 5곳밖에 없습니다.〉

〈포기할 시, 거점은 영구적으로 소실됩니다.〉

“어, 상관없어. 전부 포기할게.”

이미 마음을 굳힌 단호한 내 결정에 시스템창이 시야 전체를 꽉꽉 채웠다.

〈만일 성소 5곳을 포기하시면 13층의 보상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주시길 바라겠…〉

평소였다면 깔끔하게 플레이어의 의견에 따랐을 테지만, 시스템창은 끈질기게 물음을 건네왔다.

끈질기다 못해 집요하기까지 한 수준.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깔끔하게 결정을 내리자, 영롱한 빛을 내던 성소는 이내 모든 힘을 소실하고 붕괴하기 시작했다.

〈13층에서 거점의 존재가 감지되지 않습니다.〉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합니다. 13층의 우승자가 공백이므로 연계 층인 14층이 자동으로 폐쇄됩니다.〉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성소를 뒤로 하고,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어때, 이걸로 충분하지?”

시선이 닿은 장소에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험악하게 표정을 구긴 악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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