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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33화 (33/175)

제33화

숯덩이가 된 남자는 내 말을 듣고는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럴 만도 하지.

방금 전까지 협력을 운운하던 상대가 자세를 180도 바꾸는 것에다가 모자라 뒤통수를 시원하게 때렸는데 충분히 저런 반응을 보일만 했다.

근데 뭐 어쩌겠나.

“탑에 처음 들어온 신입도 아니고, 왜 이렇게 찡찡거려. 탑에서 한두 번 장사해봤나.”

원래 자기 신변은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나는 낄낄거리며 놈에게 물었다.

“까먹고 말해서 너도 적당히 구슬리는 척하면서 등쳐먹으려고 했잖아.”

“……!”

잇따른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 남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놈이 파라인 상회를 차지한 이유가 무엇일까.

거점이 있는 지역이 우연찮게 파라인 상회의 본거지여서?

뭐 굳이 하나하나 따지자면 그런 이유일 수도 있겠지.

그거야 본인이 아니고선 절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이니 그렇다 쳐도.

“단지 그런 이유였다면 진행자의 마음에 들자고 나한테 협력을 요청하진 않았겠지.”

놈이 댄 것은 어디까지나 그럴싸한 명분밖에 되지 않는다.

곁으로 보면 꽤나 괜찮은 전략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지만, 간과한 점이 있었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13층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가 알고 있는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진행자하곤 사이가 그다지 안 좋다는 걸. 만약에 나한테 와서 제안할 거였다면 진행자의 마음에 들자는 말이 아니라 같이 힘을 합쳐서 타도시키자고 했어야지.”

진행자의 마음에 들어 혜택을 받으려고 하는데, 악동 녀석과는 완전 정반대의 행보를 걷고 있는 나한테 와서 제안을 한다?

누가 봐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제안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물론 혼자로선 안 될 게 뻔하니까. 파라인 상회를 수중에 흡수해 힘을 빌리려고 했고. 대충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짜봤는데 어때?”

“…….”

익살스럽기까지 한 내 웃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야 그렇겠지.

정곡일 테니까.

이미 일이 벌어진 마당에 거기에 대해서 뭐라 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 말을 그대로 들어주는 건 고마운데, 혹시 까먹고 있는 건 없어?”

“시끄럽다! 내가 그 말에 속을 법 싶으냐! 당장 그 목을 쳐서….”

더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놈은 말꼬리로 끊으며 허리춤에서 검을 빼어 들었다.

당장이라도 내 목을 베어버릴 기세였지만, 아쉽게도 그 기세는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화르르륵-!

짙은 유황 냄새와 함께 그의 머리 위로 검붉은 빛의 브레스가 쏟아졌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화력.

아니나 다를까 그 화력에 직방으로 맞은 놈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재가 되어 불타버렸다.

그래도 명색이 13층을 등반한 플레이어 중 무력으론 두 손에 꼽는 강자치고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러게 조심하라고 미리 조언까지 해줬는데 자살이나 하긴.”

나는 혀를 차며 이미 잿가루가 된 놈을 바라봤다.

그걸 증명하듯 거점에 박혀 있던 놈의 깃발이 화르르 불타며 소멸했다.

〈깃발을 지닌 플레이어 1인이 사망하셨습니다.〉

〈거점은 총 8개입니다.〉

〈거점이 초기화됨으로써 스탯 30% 저하 및 강화류 스킬 발동이 금지 디버프가 소멸합니다.〉

이를 알리는 시스템창이 떠오르자, 지금까지 몸을 옥죄이고 있던 불쾌한 감각이 사라졌다.

확실히 디버프가 사라져서 그런지 움직이는 게 한결 편하다.

그와 동시에 거점이 공백임을 알리는 자줏빛 섬광이 지하도 전체를 가득 채웠다.

한쪽에서는 재액이 내뿜는 화염이, 나머지 한쪽에서는 탑이 내뿜는 자줏빛의 섬광이라.

“뭐라고 했었지… 분명 이런 걸 두고 자강두천이라고 하던가.”

나는 비아냥거리며 그 상황을 느긋하게 지켜봤다.

이루 형용치 못할 정도의 장관은 마지막에 이르러 재액이 내뿜는 화염이 자줏빛의 섬광을 압도했다.

“역시 쉽지만은 않다는 건가.”

하긴 한국을 넘어 전 세계를 몰락시키고 공포에 떨게 만든 재액이다.

저 정도의 실력도 없었으면 지구는 멸망하진 않았으리라.

‘게다가 저번과도 상황은 다른 거 같고.’

나는 눈가를 가늘게 뜨며 두 번째 재액을 바라봤다.

일전에 상대했던 재액과 비교하면 비교도 되지 못할 정도의 크기와 강함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재액은 봉인이 풀려 시간이 지날수록 본래 가진 힘을 더욱 잘 발휘한다.

첫 번째 재액 같은 경우에는 봉인에서 풀려서 가장 힘이 약할 때, 내가 그 자리에서 처리해서 참변을 막았다지만.

“힘을 되찾기 전까지 지하에서 숨어있었나 보네.”

이놈은 머리를 좀 썼네.

가공할만한 압박감이 지하도 전체를 휘감았다.

그 기운에 플레이어가 아닌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의식을 잃었다.

멀쩡히 서 있는 생존자는 나뿐이었다.

“크르릉.”

자연스럽게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재액은 언짢다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순식간에 화끈한 열기와 사방팔방으로 뻗혀나간다.

주변에 막혀 있는 지하도의 지리 특성상 주변의 온도와 습도가 비상식적으로 습도가 올라갔지만.

〈백룡의 갑옷(SS+)〉

〈모든 상태 이상에서 면역됩니다.〉

딱 좋은 타이밍에 발동한 갑옷의 효과가 놈의 영향권을 튕겨냈다.

“내가 아무 대처 방법도 없이 여길 왔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크르르, 크렁!”

자신보다 한없이 작은 존재한테 무시당한 게 그리도 화난 모양인지, 재액은 수십 개의 팔을 뻗으며 소리를 외친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을 만한 압박감.

“근데… 새꺄 냄새나니까 입 좀 닥쳐.”

지면을 강하게 박차자 방금까지 발을 딛고 있던 지면에서 거미줄 모양의 금이 생기며 강렬한 폭음이 지하도 전체를 진동했다.

재액의 바로 앞까지 한달음에 도착한 나는 있는 힘껏 놈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콰득!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채, 걷어차인 재액은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육중한 무게가 강하게 넘어가자, 하중을 버티지 못한 지면이 붕괴했다.

그야말로 산사태를 연상케 하는 장면.

일반적인 괴수였다면 이걸로도 충분하고 남았겠지만.

‘무게가 제대로 안 실렸어.’

설마 그 순간에 반응하고 대처한 건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되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신했다.

방금 전의 공격이 먹히지 않았음을.

“저 미친 놈이 지하에서 브레스를 쏘고 있어?”

자칫 잘못하면 자신 채로 지하에 매장될 수도 있다.

그런 리스크를 감안 하고도 브레스를 쏜다고?

아무리 괴수라 하더라도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행동이었지만… 까짓것 못 받아줄 것도 없었다.

“둘리야. 일단 저거부터 조져.”

“한별 알았다!”

내 부름에 바로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둘리가 힘차게 대답했다.

입을 벌리자 세차게 뿜어져 나온 드래곤의 브레스가 지하를 향했다.

각기 다른 브레스의 격돌.

붉디붉은 화염과 검붉은 빛을 띄는 브레스가 맞붙이면서 상당한 고온과 압력이 생성되었다.

이미 내구도를 다한 지하에서 핵폭발에 맞먹는 압력의 폭발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대답은 고민할 것도 없었다.

“붕괴되겠지.”

짧게 나직이자, 모든 힘을 다한 지하도는 허무하리만치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리 파악하고 재빨리 현장에서 벗어난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곁으로는 이대로 매장된 것처럼 보여도, 명색이 지구를 멸망시킨 재앙.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 하나만큼은 내가 보장한다.

게다가…

쿠쿵⎯!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백 미터 떨어진 거리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안개가 상공을 잔뜩 가리고 있었다.

흐릿하긴 했지만 안개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유형하듯이 헤엄친다.

불쾌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함까지 연출하는 장면.

누구보다도 저 현상의 이유를 잘 알고 있는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세 번째 재액.”

가장 먼저 등장했던 재액과는 달리 두 번째와 세 번째 재액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그것도 불과 수백 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였으니 지구에 있을 당시에도 피해는 상당했었다.

무엇보다도.

“개 같은 건 저놈은 바퀴벌레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쉽게 안 죽거든.”

“한별, 그냥은 안 죽는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왜긴 그거야….”

둘리의 의문에 대답하다 말고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어이쿠,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지만 이쪽도 만만치는 않은데.”

쿠웅- 쿠웅- 쿠우웅-!

고요한 호수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듯.

미약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이 느껴졌다.

매장된 재액이 붕괴한 지하를 무력으로 뚫고 올라오는 모양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진동은 점점 거세져 갔다.

이대로면 수 분 내로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무엇보다도 두 마리의 재액을 동시에 붙여놓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 많이 곤란한 일이 일어나니까.’

좋든 싫든 간에 여기에서 저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머릿속에서 빠르게 결론을 내린 나는 미리 모색해둔 방향을 향해 서둘렀다.

내가 도착한 장소에는 무너져내린 콘크리트들로 쌓인 탑이 있었다.

아주 미약하긴 했지만, 균열의 틈으로 거점임을 증명하는 자주빛 불빛이 미세하게나마 새어 나왔다.

손으로 무너진 잔해를 걷어치우자, 내부에는 반쯤 박살난 깃발이 꽂혀 있었다.

재액으로 인해 죽은 플레이어의 잔해.

“찾았다.”

이를 살펴보던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다소 박살난 감은 있으나 사용할 수는 있다.

강제로 깃발을 뽑고, 내가 지닌 깃발을 새롭게 끼워 넣자 촛불처럼 당장에라도 꺼질 것 같던 섬광은 점점 광량을 키워갔다.

〈띠링! 새로운 거점을 차지했습니다.〉

〈신한별님이 보유한 거점의 개수: 5곳〉

그 순간이었다.

휘리릭!

거점에 꽂힌 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하더니, 자주빛보다도 더 짙은 빛기둥이 천공을 향해 용솟음쳤다.

비단 이 자리에서 뿐만이 아니다.

주변을 확인해보니 지금까지 내가 차지한 거점에서도 마찬가지로 빛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최초로 절반 이상의 거점을 차지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쾌거해 내셨음으로 거점의 특수 옵션이 해방됩니다.〉

멍한 눈빛으로 시스템창을 확인한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어? 이런 게 있었어?”

이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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