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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32화 (32/175)

제32화

적나라한 내 욕설을 들은 사람들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오죽하면 자기 귀가 잘못됐나 하면서 의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배려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원하면 한 번 더 말해줄까? 너희들은 뭐 하는 새끼인데 내 앞에 와서 지랄이냐고.”

“저… 저 무슨….”

아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하자, 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렸다.

내 발언이 그렇게도 빡친 모양인지 남자들은 총구를 나한테 겨누며 소리쳤다.

“아씨, 총 안 보여? 뒈지고 싶지 않으면 입고 있는 옷은 전부 벗고 거기에서 엎드려.”

총…?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들의 발언에 나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플레이어들한테 총화기가 안 통한 지가 언제 적인데…

“아, 맞다.”

웃음기를 흘리다 말고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하긴 13층은 지구에 게이트와 탑이 생겨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배경이었지.

지금이야 탑과 관련된 정보와 각종 팁이 널리 알려지면서 플레이어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됐다지만.

탑이 만들어진 직후에는 그런 것 따윈 없었기 때문에 적응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이 우후죽순 죽어 나갔었다.

오히려 지구에 있는 것보다도 탑에 들어가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지경이었으니까.

‘이 당시의 플레이어들은 일반인들보다도 조금 튼튼하다는 개념이었었지.’

그러니 저런 조잡한 총을 믿고 나댈 수 있는 것이리라.

참 우습지.

저런 양아치보다도 못한 것들한테는…

“스스로 현실을 자각하게 해줘야지.”

내가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어가자, 이를 지켜보던 남자들은 옅은 웃음기를 얼굴에 띄우며 낄낄거렸다.

“이 새끼가 총보고 환장했나. 누구 앞에서 쪼개고 있어 이 새끼가.”

“됐어. 군대에서나 보던 총을 오래간만에 보면 없던 PTSD도 떠오르겠지.”

“뭐, 저런 미친 새끼는 분풀이로는 괜찮잖아.”

그들 중 한 명은 총구를 내 앞으로 가져다 대며 조준했다.

차가운 침묵 끝에.

빠앙⎯

강렬한 격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총알은 내 몸에 박혔다.

그리고는

챙그랑⎯!

몸에 박힌 총알은 그대로 납작하게 압축된 상태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허무하기까지 한 광경에 이를 지켜보던 남자들은 입을 쩍 벌린 채로 주춤거린다.

“어, 어떻게 총을….”

“어떻게 하긴 잘만 했지. 그리고 아까 전부터 걸렸는데, 누가 누굴 보고 새끼라고 하냐 이 새꺄.”

이게 누구 앞에서 반말질이야?

나는 그들의 의문에 친절하게 대답하곤 한 손으로는 놈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파열음과 함께 나한테 얻어맞은 남자는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종이짝처럼 땅바닥을 구른 남자는 게거품을 물고 경련하다 말고 제자리에서 쭉 늘어졌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동료들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소스라치듯 경악했다.

“서, 설마… 저거 죽은 거….”

“적당히 힘 조절했으니까 엄살떨지 마. 사람은 저런 걸로는 쉽게 안 죽여.”

죽긴 누가 죽어.

아무리 심해봤자 전신의 뼈가 박살 나는 걸로 끝나기밖에 하겠어.

물론 자칫 잘못하면 쇼크사로 잘못된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애초에 남한테 총구를 겨누며 협박하던 놈한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딱히 없잖아.

“야.”

“네? 갑자기 저는 왜….”

내가 부르자 그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뭘 멀뚱히 보고 서 있어? 너희들의 본거지로 알아서 안내해.”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기에 숨어있는 놈들까지 싹 다 불러서 내 앞에 대령해. 왜? 명색이 같은 조직원인데 의리 없게 동료 혼자만 보내려고?”

하던 건 마저 다 해놓고 해야지?

바닥에 싸늘하게 쓰러져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쪽 손에 가죽 장갑을 착용했다.

“최대한 빨리 끝낼 거니까. 전부 대가리 박고 있어.”

* * *

아주 작은 해프닝을 뒤로하고 나는 목적지에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바로 2번째, 3번째 재액이 동시에 등장하게 되는 장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사건으로 인해 파라인 상회는 물론이고, 일대 수십 미터가 흔적도 남김없이 날아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나와 눈을 마주친 상회의 조직원은 겁에 질려 새파래진 얼굴로 회피한다.

“왜들 그래, 긴장 풀어.”

누가 보면 내가 누구라도 살인이라도 저지른 줄 알겠네.

그저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도 그렇고 하니, 괜히 다른 놈들은 도주하지 못하도록 머리만 남겨두고 땅바닥에 묻어뒀을 뿐이다.

물론 괴수들이 체취를 맡고 달려올 걸 대비해 괴수의 변으로 은폐도 했겠다.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 하면 할 건 다 한 거잖아.

내 물음에 길 안내역을 맡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모르게 안면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된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리라.

“슬슬 도착했나?”

그것도 잠시.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며 중얼거렸다.

도착한 장소는 을지로입구역 2호선.

지하철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무수히 많은 바리케이드와 괴수의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곳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발악.

‘그래봤자, 탑이 만들어 낸 환상이겠지만.’

까놓고 말해 내 알 바는 아니다.

나는 가볍게 넘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동맹이 아닌 타 플레이어의 거점에 들어가셨습니다.〉

〈거점 내에서는 스탯 30% 저하 및 강화류 스킬 발동이 금지됩니다.〉

지하철의 입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푸른 스파크가 번쩍거리더니 온몸에 추를 단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절로 속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이었으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거야 이미 다른 거점들을 점령하면서 겪어 봤기에 익숙했다.

그보다도.

“여기에도 플레이어가 있단 말이지?”

나는 눈앞에 뜬 창을 확인하며 말했다.

이게 웬 떡이야.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재액을 쓰러뜨리는 것만 아니라 보너스로 거점까지 챙길 수 있는 기회다.

이만한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지하철의 안으로 들어가자, 비릿한 피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내가 눈가를 찌푸리자 이를 알아차린 조직원이 간신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방독면을 건넸다.

“하하, 냄새가 심하시면 이거라도….”

“됐어. 다른 사람들은 안 하는데 나만 끼고 있으면 모양새가 이상하잖아.”

저건 또 어디에서 난 거야?

나는 의아스럽단 듯이 중얼거리고는 지하철 내부를 둘러봤다.

확실히 현시점에선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단체인 만큼 무기라던지 전체적인 체계가 잘 잡혀 있었다.

그대로 더욱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이전보다도 강렬한 피비린내가 사방에서 풍겨왔다.

그것도 인간과 괴수의 피가 섞인 냄새.

채앵!

아니나 다를까.

감옥의 형태를 한 두꺼운 철장들이 지하 공간에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철장의 안에는 수많은 사람과 괴수들이 한자리에 갇혀 있었다.

인간의 가혹성을 자극하는 엽기적인 광경.

한쪽에서는 괴수들의 손에 몇 명이나 죽을까를 두고 사행성 내기를 하는 모습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이맛살을 찌푸리자, 안내를 맡은 조직원은 나를 흘낏흘낏 살펴보며 눈치를 살핀다.

그의 모습을 본 나는 콧방귀를 뀌며 놈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멀뚱히 서서 뭐 해? 왜 멀쩡한 다리로는 가기 싫어?”

“아, 아닙니다.”

조직원은 내 말을 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자리를 이동하려던 그때였다.

“신한별 플레이어,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군지 추측할 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이야 정해져 있었으니까.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가 거점의 주인인가 봐?”

내 질문에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거점에 진입한 시점에서부터 내 존재는 파악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신한별 씨, 저는 당신에게 동맹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동맹?”

“그 말대로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재액은 등장하는 곳은 바로 이곳, 재액의 힘이 미지수인 만큼 여기에서는 힘을 합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같이 동맹을 맺고 재액을 쓰러뜨리자는 거지?

그다지 나쁜 제안만은 아니었다.

다만.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네 힘이 뭐하러 필요해.”

협력 플레이? 그런 의미 없는 짓이라면 까라고 해라.

나쁜 제안이 아니라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나한테는 메리트도 뭣도 없는 제안이나 다름없었다.

제안을 가볍게 걷어차자 플레이어는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말은 끝까지 들어보시죠. 탑을 등반하는 것도 좋지만, 탑을 관장하는 것은 결국 진행자. 당연히 내내 반복되는 솔로 플레이보다는 협력으로 플로어를 클리어하는 것을 더 좋아하실지도 모르죠.”

그의 이야기는 탑의 클리어에 열중하기보단 진행자의 눈에 들어 콩고물을 챙기잔 뜻이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방법이라고 한다면 저것도 일종의 전략.

험한 길을 택하기보단 라인을 잘 타서 최대한 버티자는 뜻이니까.

“아, 그래? 그래서 관리자의 눈에 들기 위해서 저런 짓을 벌였다는 거고?”

나는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전을 가리켰다.

내가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자, 그는 화색이 되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진행자 역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분. 이것도 전부 수단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손을 잡고….”

“근데 그 이전에 넌 재액이 등장하는 장소를 제대로 알고 있어?”

주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내 물음에 그는 의아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도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이 제 거점인 이상 재액이 나타난다면 곧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거 잘됐네. 그런 의미에서 네가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가봐.”

“오른쪽으로? 갑자기 그건 왜?”

“됐어. 언제는 나랑 같이 동맹한다면서 왜? 기껏 동맹해주겠다는 게 그 부탁도 못 들어줘?”

“뭐… 그건 아니지만. 알겠습니다.”

“어, 조금만 더… 어어, 거기에 움직이지 말고 잠깐만 서 있어 봐.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으면….”

네가 그토록 원하는 대로 재액이 등장할 거거든.

잇따른 내 말을 끝으로 허공에서부터 균열이 발생하나 싶더니.

게이트로부터 엄청난 폭발력과 함께 붉은 겁화가 뿜어져 나왔다.

화르르⎯

무차별적으로 방사된 겁화는 지하도 전체를 불태웠다.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녹아내릴 것 같은 화마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플레이어인 나와 놈뿐.

이런 열기에는 익숙한 나와는 달리 놈은 시꺼먼 숯덩이가 되었다.

제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내 얼굴을 뻔히 쳐다봤다.

“뭐, 뭐야… 방금 전에는 협력한다고….”

“갑자기 왜긴 새꺄.”

그거 구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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