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그게에에에엑!”
재액은 엄청난 굉음을 흘리며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 영향으로 수북한 흙먼지가 일어나며 시야를 가린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공포를 느끼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었으나, 나는 무덤덤하게 움직였다.
시야가 제한된다고 한들, 기척으로 전부 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것도 말이지.”
나는 간단하게 몸을 풀며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재액의 비명이 들리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다시금 검을 휘둘러 연기를 걷어내자, 내가 검을 휘두른 자리에는 재액의 팔뚝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검에 베인 게 아니라, 뭉뚝한 방망이에 맞아 터진 듯한 비주얼.
별것 아니다.
‘보기 좋게 검에 적중한 모양이네.’
피식 웃으며 손에 쥐고 있는 검을 바라봤다.
튜토리얼에 있을 당시에 괴수의 뼈를 최대한 깎아서 제작한 단 하나밖에 없는 무기다.
덤으로 덧붙이자면 엄청난 경도로 인해 나조차도 날을 벼르는 것을 실패할 정도로 단단한 경도.
나는 한심한 눈빛으로 바닥에 떨어진 재액의 팔뚝을 바라봤다.
이는 제아무리 재액이라고 해도 튜토리얼에서 나오는 괴수만도 못하다는 뜻이었다.
“하긴 내가 검의 형태를 만들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하면서 몇십 년 동안 제련했었는데, 이건 당연한 일이지.”
겨우 동아시아를 제패한 재액과 수백 년이라는 세월을 축적해 튜토리얼에 등장한 괴수를 비교할쏘냐.
오히려 재액 따위한테 진다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정면을 향해 무신경하게 검을 휘둘렀다.
씌이잉!
강력한 절삭력과 함께 반달 모양으로 뻗어나간 풍압이 재액의 신체를 갈기갈기 난도질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재액에 의해 연기가 사방으로 밀려 나가며, 베일 속에 감춰져 있던 윤곽이 드러났다.
말로는 이루 형용치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부상을 입은 재액.
그러나 이를 부정하기라도 하듯이 절단된 신체 부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절단된 부위로부터 시꺼먼 뼈가 솟아 나왔으며, 그 위로 무수히 많은 근육 다발이 시계방향으로 휘감고 새살이 돋아난다.
그 모든 과정이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벌어졌다.
경이하다 못해 혐오스럽기까지 한 광경에 나는 눈가를 찌푸렸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저런 괴상한 옵션도 달려 있었지.’
저걸 보고 있자니 어렴풋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에 전세계의 플레이어들이 재액을 물리치기 위해 나섰지만, 상식을 바꿔먹는 저 재생력 때문에 토벌은 족족히 실패했었다.
“하긴 어쩐지 생각보다도 훨씬 쉽다 싶었네.”
그래서 한참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던 플레이어들이 결국에는 어떻게 했더라?
최대한 어렴풋한 기억력을 떠올려보려고 했으나, 아쉽게도 그 이상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에는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선순위에서 배제했었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극한의 상황에서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데, 옆 동네에서 뭔 일이 일어나는지
조사하고 있을 리는 없잖아.
‘게다가 당시에는 탑에 들어가기 위해서 존버한다고 바빴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재액의 토벌 방법?
그까짓 거 역사를 다시 한번 더 써보지 뭐.
애초에 그러라고 탑에서 만들어준 판이다.
이용할 거면 제대로 써먹어야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각해둔 방법이라면 있다.
상대의 능력은 엄청난 재생력이니, 그 재생력을 한계까지 이끌고 가서 죽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시대적인 발상.
“요즘엔 또 다르지.”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지면을 박차고, 재액의 정면에 도달했다.
방금 전의 격돌로 위기감을 깨달은 재액은 주춤하며 수많은 촉수를 내뿜었다.
자를 자극하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견제용.
다른 괴수들과는 달리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평범한 방법으론 결코 나를 이길 수 없음을 말이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려고 한 건 좋다만.
이길 수 없단 것을 깨달았다면 녀석이 취해야 하는 행동은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다.
“그런 허접한 견제가 아니라 삼십육계 줄행랑이어야지.”
그게 그나마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이다.
아니, 정정하자면 그게 바로 내 손아귀로부터 1초라도 오랫동안 살 방법이리라.
나는 진리를 입에 담으며 검을 휘둘렀다.
검술의 묘리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무식한 휘두름이 강타하자 촉수는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그리고는.
콰득!
관절기를 사용해 다리를 역방향으로 꺾어버리자, 재액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찐득한 마력을 내뿜었다.
원체 통뼈라 맨정신으로 다리가 꺾이는 경험은 저 녀석한테도 처음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깔끔하게 양단된 뼈가 재생하기 위해 솟아나며 피부를 뚫고 솟아났다.
엄청난 양의 출혈량이 바닥을 적신다.
재액이 움직이려고 했지만 튀어나온 뼈가 행동을 제약했다. 지금까지와는 위세가 현저히 다르다.
나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좌에서 우로.
힘의 반동을 이용해 남은 관절을 모조리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잇따른 충격들 속에서 재액은 입에 거품을 물고 고꾸라졌다.
다른 괴수라면 고통으로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를 충격이었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재생력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게 누가 내 앞에서 깝치래.”
사지가 완전히 꺾인 채, 옴짝달싹도 못하는 놈을 보며 싱긋 웃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제액은 자신의 뼈가 심장을 파고들며 그대로 숨을 거뒀다.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던 저 사기적인 능력이 되레 족쇄가 되었다.
“후, 끝인가.”
나는 깊은숨을 크게 들이 내쉬며 생기를 잃은 재액을 내려다봤다.
재액이 날뛰는 바람에 박물관의 지하에 안치되어 있던 유물들은 휩쓸려 산산이 조각났다.
여러모로 오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깊이 신경 쓸 거까진 없었다.
곁으로 보기에는 지구에 존재하는 문화재들과 상당히 비슷하게 생겼으나 이것도 탑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 중 하나다.
책임감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폭발에 휘말린 듯한 상황 속에서 남아 있는 유물은 단 하나.
오직 천상열차분야지도만이 멀쩡히 서 있었다.
“하긴 역사에서도 재액이 전부 끝날 때까진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강렬한 섬광을 내뿜던 3개의 빛 중 하나가 힘을 잃고 소멸했다.
이는 재액 중 하나를 처리했단 뜻.
이로써 남은 재액은 총 두 개.
나는 잊지 않고 권능을 사용해 재액이 가진 능력치를 흡수했다.
“에게? 겨우 이것밖에 안 돼?”
튜로리얼에 비하면 훨씬 짜잖아.
흡수된 능력치를 확인한 나는 혀를 내둘렀다.
재액과 튜토리얼의 차이를 떠올리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어쩐지 모르게 품속에 넣어둔 알이 움찔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양이었으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출발해볼까.”
여기에 온 목적을 달성하러 말이다.
* * *
나는 꼬맹이를 시켜 거점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에 자리를 빠져나왔다.
저래 봬도 플레이어 중에서는 나 다음으로 강한 놈이다.
따로 입을 대지 않더라도 제구실은 멀쩡히 할 수 있겠지.
게다가.
“일전에 있었던 일을 빌미로 단단히 손봤으니까. 딴생각을 품고 싶어도 못 하겠지.”
나는 손을 쥐락펴락하며 일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을 대비해 나는 이동하는 김에 다른 플레이어들의 거점을 점령하면서 이동했다.
그 결과.
〈총 9개의 거점이 생성되어 있습니다.〉
〈신한별님이 보유한 거점의 개수: 4곳〉
깃발을 가진 다른 플레이어들이 평균적으로 지닌 거점과 비교해봐도 압도적인 1등.
이걸로 내내 걱정 중이었던 한시름은 덜었다.
“정 안 되면 지금처럼 아무 거점이나 찾아서 뺏으면 될 테고.”
아주 간단한 해결 방법이다.
순식간에 향후의 일까지 결론을 지어버린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도상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에 나타나는 재액들은 같은 장소에서 한 번에 다 같이 나타난다.
그것도 박물관에서 등장하는 재액보다도 강한 존재다.
어느 정도는 대비가 필요하겠지.
그리 생각하며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철컥⎯!
“움직이면 쏜다.”
바로 뒤에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무수히 많은 총구가 이쪽을 향해 겨눠졌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건장한 남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당장 보이는 것만 다섯 명.
매복해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스나이퍼들까지 고려하면 꽤 적지 않은 숫자였다.
보자마자 쉽게 알 수 있었다.
저들은 플레이어가 아닌 탑이 만든 NPC 같은 존재.
‘그냥 무시하고 갈까?’
어차피 저들이 총을 쏜다 한들 간지럽기만 할 뿐이다.
기억상 다음 재액이 나타날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약간의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 중에서 대표로 보이는 자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영락없는 사기꾼의 인상이다.
“안녕하십니까. 조금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혹시 탑에서 나오신 플레이어님이신가요?”
“뭐, 대충 비슷해.”
“대충…?”
확실하게 따지자면 지금 탑을 등반하는 중이지만.
내 얘기를 들은 남자는 의아스럽다는 듯하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말을 이었다.
“저희는 파라인 상회입니다.”
“파라인?”
그건 또 뭐 하는 집단이야.
그들의 소개를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린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지구에 있을 당시에 워낙 유명했던 지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파라인 상회로 게이트가 생긴 직후에 생긴 신식 세력으로 무정부 상태인 한국의 뒷세계를 암약하던 세력이었다.
분명 온갖 플레이어들을 꼬득여 각종 범죄와 마약 같은 사업에 속해 있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 재액들을 처리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놈들이었다.
‘안 그래도 한 번 찾아볼까 싶었는데, 스스로 발걸음을 자처하다니.’
시간 낭비도 줄이고 딱이네.
적당히 말을 건네기 위해 입을 열려는 그때, 그들이 먼저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플레이어라니 이거 잘 됐군요. 그렇게 됐으니 잔말 말고 저희를 따라와서 도와주시죠.”
“어?”
이 새끼들은 뭐야?
내가 처음부터 저들의 종이라도 되는 양, 당하기까지 한 태도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당혹스러웠으면 내가 튜토리얼에 있는 사이에 부탁이라는 정의가 바꿨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플레이어니 뭐니 됐고, 자신들은 총을 들고 있으니 이길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야, 이것들이 단체로 돌았나? 뭐 하는 새끼들이야?”
내가 기억하는 바론 파라인 상회는 재액에 의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역사는 내 손으로 다시 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