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30화 (30/175)

제30화

“어… 나한테는 무슨 볼일로….”

나는 한 손으로는 녀석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나머지 손으로는 괴수의 머리를 박살 냈다.

괴수의 뇌수와 피가 사방으로 튀며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모습에서 전율을 느낀 소년은 온몸을 파르르 떨며 어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제 와서 시치미를 떼려고 했다면 오산이다 꼬맹아.

“뭐긴 뭐야. 전 층에서 마음대로 일을 벌여놓고 모른 척하면 끝일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죗값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달게 받아낼 생각이니까 걱정 마라.

이것만큼은 진심이라는 내 말에 녀석은 숨을 죽였다.

“뭐, 말은 그렇게 해도 다른 놈들처럼 팔다리를 부러뜨리진 않을 거니까. 긴장 풀어.”

“파, 팔다리라니….”

녀석은 내 말을 듣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숨을 죽였다.

나도 이런 긴급상황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를 만큼 융통성이 없진 않다.

허접하게 보여도, 녀석은 상위 10명으로 나 같은 깃발을 지닌 실력자였다.

까놓고 말해서 플레이어들 중에서 순수한 무력만으로는 나 다음으로 강했었지?

나는 시선을 돌려 녀석의 등에 있는 붉은 깃발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너도 저쪽에 거점을 차지하려고 했었지?”

“네… 그런데 그건 왜….”

내 물음에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소년.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비릿한 얼굴을 지으며 녀석이 가진 깃발을 뽑아 들었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눈앞에서 깃발을 강탈당한 녀석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나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것 같았으나.

그러기엔 한참 늦었다.

한 손으로 녀석의 깃발을 절반으로 부러뜨렸다.

파지지직!

그대로 절반으로 부서진 깃발은 은은하게 내뿜던 빛을 잃었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하나 그 찰나로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경쟁자를 한 명 줄이기에는.

“아아….”

자신의 깃발이 부서지는 것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녀석은 깃발이었던 무언가를 붙잡으며 아련한 소리를 냈다.

〈10개의 깃발 중 한 개가 소실되었습니다.〉

※비고: 현재 3개의 거점이 설치되었습니다.

깃발이 박살남과 동시에 이를 알리는 시스템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3개의 거점이라….”

나는 시스템을 한 번 바라보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현재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 중 깃발을 지닌 자는 나를 포함해 총 4명.

‘아, 지금 깃발 하나가 부서졌으니 깃발이 세 개가 있는 셈인가.’

지금은 갑자기 발생한 게이트로 인해 혼비백산이었지만,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거점을 차지하려고 들 것이다.

과거를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인 만큼 이곳을 거점으로 얻는 이점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이트에서 발생한 괴수를 처리하면서 누구보다도 빨리 거점을 차지하려면…

빠르게 계산을 마친 나는 소년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이번 층에서 떨어지기 싫으면 네가 나 대신에 일 좀 해줘야겠다.”

“이, 일이라니….”

완전히 두 동강 난 깃발을 손에 쥔 채로 절망하는 소년.

얼마나 정신이 없으면 움직일 의지마저도 잃은 모양이었다.

녀석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깃발을 녀석한테 건넸다.

“별 건 없고. 네가 나 대신에 깃발을 꽂아서 거점을 차지해 놓고 있어.”

나는 아주 간단하단 듯이 말했다.

깃발의 주인은 처음부터 색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설사 다른 플레이어가 꽂아서 거점을 만들더라도 주인의 업적으로 돌아간다.

그걸 통해 협력 플레이가 가능했다.

처음에 악동이 언급했던 ‘휘하에 들어간다.’가 여기에 속했다.

이는 이곳에 오면서 다른 플레이어들의 행동을 봤었기에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전략상 그렇다곤 해도 이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전제돼야만 가능했으니까.

“왜 불만이야? 하기 싫으면 네 마음대로 관둬도 돼. 대신에 탑을 등반하는 것도 같이 관두게 되겠지만.”

까짓것 무력으로 해결해도 되잖아?

내가 옆에 있는 괴수를 한 손으로 쓰러뜨리며 말하자, 소년의 얼굴은 새파랗다 못해 하얗게 변했다.

그것도 잠시, 손에 쥔 내 깃발을 보고는 일순 눈빛이 변했다.

누가 봐도 속셈이 뻔히 보인다.

“그거 부러뜨릴 생각이면 아서라. 어차피 네가 가진 힘으론 그건 절대로 못 부숴.”

깃발을 직접 부서뜨려본 경험자로서 장담할 수 있었다.

녀석으로선 어떻게 할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만약에 10분 안에 점령했다는 시스템이 안 뜨면 알지?”

“…….”

협박 아닌 협박에 녀석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다급히 반론을 던졌다.

“어…? 10분? 괴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아슬아슬한 거리인데, 어떻게 제시간 안에….”

“그건 걱정마.”

이미 생각해둔 방법이라면 있으니까.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뛰어들라고 할 만큼 쓰레기는 아니다.

나도 계획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생각해놨다.

그러니 이 계획은 절대 실패할 리가 없다. 특히나 투명화를 통해 자신의 몸을 숨길 수 있는 녀석한테는 더더욱 제격이지.

백문이 불여일견.

말로 하는 것보단 직접 몸으로 겪는 편이 빠르리라.

나는 머릿속으로 결론을 짓고는, 자세를 잡았다.

내 손에 목덜미가 붙잡힌 상태로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 소년은 두 손을 황급히 흔들며 부정하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 그런 생각은 아니…….”

“너도 잘 알면서 뭐하러 물어보고 있어. 네 말대로 지면에는 괴수가 많아서 안 된다면 하늘길을 이용하면 되지.”

아주 깔끔한 답이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물건을 던지듯이 녀석을 둘러업었다.

“그, 그러면 던진다 치고 나중에 착지는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건 내가 알 바는 아니고, 나중에 네가 생각해 봐.”

나도 거기까진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플레이어인데 수십 미터 상공에서 조금 떨어지는 걸로 즉사는 하지 않는다.

운 나쁘면 몇 군데 부러지고 끝날 일이겠지만,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뼈 부러지면 내가 나중에 깔끔하게 맞춰줄 테니까. 걱정이라면 일단 접어둬.”

“…….”

아주 간단한 해답에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반항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단념이 빠른 놈이다.

잡담도 여기까지.

이러는 사이에도 수많은 괴수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나는 목적지를 향해 녀석을 집어 던지고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괴수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나름대로 분투하는 모양이었지만,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뒤로 물러났다.

‘대충 경쟁자도 줄었겠다.’

다소 괴수가 많다는 변수가 있었지만 사소한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대충 이즈음인가?”

주변을 모색하던 나는 지면을 향해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강력한 충격파와 함께 땅바닥이 갈라진다.

제아무리 날고기는 괴수라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고 남을 정도로 뛰어난 두뇌는 없다.

그 뜻은…

수백 마리의 괴수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갈라진 땅바닥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 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히죽 웃음을 지었다.

“지름길로는 충분하지.”

* * *

마치 무저갱처럼 끝도 한도 보이지 않는 지하로 떨어지기도 잠시.

나는 침착하게 재주넘기를 하며 지면에 착지했다.

지하에 도착하자마자 괴수의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었다.

상공에서 떨어지면서 제대로 된 착지를 못 한 탓에 머리로 떨어지거나 위험한 부분으로 그대로 떨어지면서 즉사한 탓이었다.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하곤 입가를 쫘악 늘어뜨렸다.

지금은 괴수들의 시체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은.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상당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품을 한데 모아둔 곳이었다.

그 증거로 역사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볼 법한 보물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하나하나가 상당한 가치를 가진 역사품이었으나 여기에 온 목적은 단 하나.

나는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여깄었네. 내 보물.”

엄청난 크기의 비석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석의 정체는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

한국인이라면 역사서에서 한 번쯤 스쳐 지나가듯 배우는 문화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와는 역설적으로 게이트가 터진 직후, 한국을 멸망하게 만든 원흉,

비석에는 총 3개의 강한 빛이 환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총 3개의 재액의 위치.”

그 영향으로 한국은 빠른 속도로 멸망을 맞이했다.

아주 먼 훗날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3개의 재액을 쓰러뜨린다면…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고, 이제 곧인가?’

비석에 표시된 3개의 점에서 이전보다도 더 강한 빛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나타나게 될 재액의 위치는 바로… 이곳이었다.

비석에서부터 발생한 섬광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시꺼먼 괴수가 아가리를 쩌억 벌리며 달려들었다.

바깥에서 상대했던 괴수들과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득한 격차.

그저 재액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엄청난 진동수를 발생하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놈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피부가 찢어지며.

무수한 충격파가 몸을 때렸다.

역시 재액이라는 이명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괴물.

하긴 역사에서도 재액을 막기 위해서 세계적인 플레이어들이 수십 명이나 모여 파티를 꾸렸을 정도니 당연한 건가.

하지만.

“개새끼가 뒈지려고 환장했나. 누구 앞이라고 나대고 있어.”

나는 반지를 빼고는 발로 놈의 턱을 걷어찼다.

콰득!

생생한 파륙음이 공동을 울렸다.

재액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로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네가 재액인지 뭔지는 몰라도. 누구 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지랄이야.”

* * *

〈신한별님이 거점을 차지하셨습니다.〉

※비고: 현재 6개의 거점이 설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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