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나는 한순간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고 확인을 해봤지만, 너무나도 실감나는 상황에 쉽게 부정할 순 없었다.
바로 이 자리, 풍경, 냄새… 그 모든 것들이 내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도 그럴 게 지구에 게이트가 터질 당시.
나는 지금과 같이 이 자리에서 난간에 걸쳐서 커피를 마시다가 지옥을 경험했으니까.
뇌리가 강렬하게 박힌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시스템이 알려준 이번 층의 컨셉도 분명…….”
아포칼립스와 생존.
만약 소설에 태그가 붙는다고 한다면 서로 뗄 수 없는 조합이었다.
추측건대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이 근처에 있을 터.
이번 층의 클리어 방법이 자세히 나오지 않은 지금으로선 어떻게든 생존한 다음에 해결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뭔가 빼먹은 듯한 게 있는 거 같은데.’
분명 이 자리, 풍경, 전세계적으로 발생한 게이트까지 모든 게 틀어 맞았다.
한데 가슴속에 남아 있는 이 묘한 응어리는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
일순 몸에 있는 모든 털이 쭈뼛 솟아올랐다.
아주 짧은 찰나.
하나,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면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1초도 되지 지나지 않아.
콰과과광⎯!
귀청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인영이 떨어졌다.
얼마나 강한 충격인지 옥상을 지탱하던 난간이 종이짝처럼 날아갔으며, 바닥에는 금이 거미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놈은 인영은 새빨간 안광을 빛내며, 자욱한 숨을 내뿜었다.
그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화상에 입을 듯한 열기다.
그 괴수와 직면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뭔가 허전하다고 했었지.”
지금 벌어진 모든 상황이 익숙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의 내가 직접 겪었었던 일일까.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보니 까먹고 있었다.
그게 바로 내가 처음으로 느낀 죽음에 대한 공포심.
과거의 나는 그저 저 괴물이 알아차리지 않고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한구석에 쌓여 있는 쓰레기봉투 사이에 숨어 있는 게 고작이었다.
최대한 숨을 죽이며 말이다.
“하긴 악동 그놈이 날 가만히 둘 리는 없지.”
아아, 뭔가 싶었는데 이게 그 유명한 PTSD 그런 건가?
그러나 어쩌나.
뭐 탑에 입문하기 전에 내가 저놈을 봤었다면 바지에 오줌을 지렸을지 몰라도, 튜토리얼에 박혀 있는 천 년간 과거의 일이라면 전부 잊은 지 오래다.
까놓고 말해 저 괴수의 얼굴도 기억 안 난다.
그때의 나가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아씨 뭘 먹고 자랐는지 더럽게 크네. 너 때문에 야경 다 가리잖아.”
나는 괴수의 엉덩이를 발로 툭툭 치며 뇌까렸다.
아무것도 못 한 채, 공포에 숨죽이고 있던 과거의 나는 이제 없다.
지금은…
“야, 안 들려? 야경 다 가리니까. 저기로 꺼지라고.”
나는 주먹을 힘껏 쥔 다음, 놈의 팔뚝에 휘둘렀다.
그러자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동시에 흉흉한 기운을 내뿜고 있던 괴수의 한족 팔이 흔적도 없이 폭발했다.
괴수 특유의 초록빛의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피에는 강력한 산성이 섞여 있었기에 지면에 닿자마자 빠른 속도로 부식되어 갔다.
나는 얼굴에 묻은 괴수의 피를 툭툭 떨어내며 놈을 바라봤다.
“뭐야? 팔 한쪽은 어디에다가 팔아먹었어? 균열이 안 맞으니까 제대로 만들어 줘야겠네.”
능청스러운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짓자, 되려 겁에 질린 괴수는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역전된 형세.
게이트 발생 초기에는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던 절대 강자의 괴물이었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선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그 이상도 이하의 것도 아니었다.
뒤로 물러서던 괴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상공 수십 미터의 건물이었기에 더 이상 도망칠 장소도 없다.
모 아니면 도라고 여겼는지, 한순간 변한 눈빛으로 나한테 돌진해오는 괴수.
단순히 체급으로 때워보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하긴 괴수가 지능이라고 해봤자 거기에서 거기지.”
나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검을 휘둘렀다.
쫘아아아악!
머리를 기준으로 정확히 절반으로 양단된 괴수는 그대로 힘을 읽고 건물에서 낙하했다.
미세한 울림과 함께 땅바닥에 떨어진 괴수는 처참한 몰골로 폭사했다.
나는 검에 묻은 피를 떨쳐내며 중얼거렸다.
“일단 적당히 움직여볼까.”
과거와 완전히 비슷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탑의 시스템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며 시간을 소모하는 것부터가 사치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미 갈 장소는 정해놨지.”
나는 어렴풋한 기억을 상기시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예정된 역사대로 게이트가 열리고.
총화기가 먹히지 않는 괴수들에 의해 군대의 존재의의가 사라졌으며, 치안 역시 최악에 다다랐다.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서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깥에 나온 사람들이 상점을 약탈하고 있었다.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자가 막기 위해 연장을 들었으나, 압도적인 수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법과 윤리가 사라진 세상에는 배려 따윈 없었다.
오직 힘이 강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임자.
‘그래봤자 이것도 전부 탑이 만들어낸 허상이겠지만.’
나는 완전히 마비된 상권을 지나쳤다.
괜히 눈길을 기울이는 것은 오히려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하하! 역시 8층에 올라올 때까지 단 한 명도 탈락한 플레이어가 없는 사상 초유의 팀답게 내 지시가 없어도 잘 움직이고 있네.”
상공 수백 미터 위에서 거대화한 악동은 짙은 웃음기를 얼굴에 띠며 나타났다.
모른 척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으나.
상점가에 있는 사람들은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제 할 일만을 했다.
역시나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탑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NPC라는 건가.
어찌 됐건 사소한 건 상관없다.
이번에는 저 악동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이미 말했듯이 너희들은 탑이 생긴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레귤러야. 따라서 높으신 분들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단 말이지. 특히 어떤 놈한테는 더더욱 말이야.”
악동의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의도적인 뉘앙스로 말했다.
“그러니 이번 층에서는 확실하게 걸러낼 필요가 있단 말이지. 따라서 이번에는 색다른 데스매치를 해볼까 해!”
“데스매치?”
“지금부터 상위 10인한테는 깃발이 지급되고 곳곳에는 여러 거점에 깃발을 꽂아 자신의 거점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거점의 크기가 클수록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지!”
나는 악동의 설명을 듣고는 단번에 파악했다.
형태나 방법을 확인해봐도 7층에서 했던 것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굳이 연결 짓자면 7층의 확장판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되리라.
“물론 10등 안에 못 들었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 이외의 자들도 상대방의 거점을 뺏거나 안전하게 휘하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악동은 말을 덧붙이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아, 당연한 말이지만. 휘하에 들어가는 것보단 상대의 것을 뺏는 편이 훨씬 점수가 크겠지? 아 참! 지금부터는 호락호락하지도 않을 테니까. 마음 굳게들 먹으라고.”
누가 봐도 의도가 뻔히 보이는 어투였다.
그 말을 끝으로 악동은 마치 신기루처럼 몸이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어느샌가 손에 쥐어진 자줏빛의 깃발.
깃발에는 아주 크게 1등이라는 단어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그와 더불어 시야가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몇몇 건물들이 보랏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별다른 설명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색깔로 보이는 건물이 차지할 수 있는 거점이란 건가.’
근심을 안고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자, 다행히도 내가 목표로 하던 건물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내가 처음부터 목적지로 삼았던 장소는 바로.
“국립고궁박물관.”
나는 조용히 건물의 이름을 말했다.
역사와 관련된 보물들이 안치된 장소로서 많은 관람객으로 붐비는 곳이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꼭 챙겨야만 하는 유물이 있었다.
과거에도 그 유물 하나로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올 만한 사건이 터졌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걸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빠른 속도로 뛰어가고 있자, 저 멀리서부터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저 녀석은…….”
단번에 녀석의 인상착의를 파악한 나는 적잖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12층에서 상대했었던 그 썩을 꼬맹이.
꼬맹이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뛰고 있었다.
“설마 저것도 유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
하긴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한들 이상한 것은 없었다.
기감을 넓히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 이외에도 다른 플레이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들의 목표는 모두 나와 같았다.
박물관 안에 있는 유물의 탈취.
게이트가 터진 직후, 일반인은 전부 빠졌기에 이곳에는 플레이어들밖에 없다.
풍압으로 제압하기 위해 주먹을 쥐려고 한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온 신경을 자극하는 강렬한 쇳소리와 함께 허공에서부터 상당한 크기의 손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게이트가 생성되며 상당한 물량의 괴수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온다.
끝도 한도 없는 괴수들의 습격.
갑작스런 상황에 박물관을 향하던 플레이어들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과거에는 이곳에 게이트가 열렸다는 기억은 없다.
“악동 그놈이 미리 손을 써둔 건가.”
뻔하디뻔했다.
그놈이라면 이런 수작을 부리고도 남았다.
딴에는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으나,
나는 검을 횡으로 휘둘러 게이트에서 울컥 쏟아져 나오는 괴수들을 절반으로 절단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괴수들을 학살한다.
나는 한 손으로 괴수의 대가리를 으깬 다음, 크게 도약해 7층에서 마주했던 소년의 어깨를 붙잡았다.
“우리 볼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얼굴 좀 볼까?”
내가 분명히 말했지? 넌 내가 손 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