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나는 깃발을 꽂기 위해 중앙에 있는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내가 쓰러뜨린 언데드가 끝인 모양인지 성내에는 인적이 없다 못해 썰렁함까지 맴돌았다.
하긴 원래부터 죽은 언데드가 있었는데, 인적이 느껴질 리는 만무하겠지.
언데드들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장소이기 때문인지 미처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암흑 기운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나조차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
거기에 모자라 엄청난 압박감이 몸을 짓눌렀다.
마치 해저 수백 미터에 있는 것만 같은 압력이다.
이래서였나. 진행자가 중앙에 있는 성을 노리지 말라고 한 이유는.
“이 정도면 아예 깨지 말란 뜻이나 마찬가지네.”
나는 홀로 불만을 투덜거리며 앞으로 전진했다.
깃발을 꽂는 장소에 다가갈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발걸음.
일정 부근에 들어서서는 숨도 못 쉴 것 같았다.
절로 아찔해지는 순간이었으나, 나는 태연하게 움직였다.
당황할 것까진 없었다.
어차피 고통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지금 이곳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끈기와 용기였다.
그리고 끈기라면 탑에 있는 그 어떤 플레이어들한테도 질 자신이 없었다.
다가갈수록 고동이 빨라지며, 눈앞이 아찔해진다.
하지만 버틸만하다.
이깟 기세에 질 거였다면 튜토리얼에 있을 때부터 이미 포기하고 자빠졌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적어도 그 악동의 뜻대로 되게 할 순 없지.’
나는 그 집념으로 목적지에 다가가 깃발을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
〈신한별 플레이어님께서 성을 점령하셨습니다.〉
〈12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플레이어가 13층으로 이동합니다.〉
깃발을 꽂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서 창이 발생하더니, 내내 몸을 옥죄이던 압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것도 잠시,
하늘에서부터 짙은 먹구름이 생기더니, 악동이 튀어나왔다.
“하하하! 이번에도 무사히 통과하다니 너 제법인데, 적어도 호언장담할 실력은 있다는 거니까. 근래에 봤던 플레이어 중에서도 실력도 괜찮은 거 같고 쓸만한데.”
“그래? 그런 것치곤 웃는 표정이 꽤 굳어 있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실은 그렇게 달갑지 않나 봐?”
“하하, 어림도 없는 말이나 하긴. 우리 진행자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공정하고 정의롭도록 설계…….”
“야, 다 때려치우고 보는 눈도 없는데 솔직히 말해봐. 너 말은 그렇게 해도 속은 정반대잖아.”
“흐음, 무슨 근거로 말하는 거지?”
은근히 녀석을 자극하는 어투에 악동은 미세하게나마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신경을 쓰고 지켜봐야지만 간신히 볼 수 있는 미세한 차이.
하지만 그걸 내가 놓칠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처음부터 자기한테 깝치고 일부러 떨어뜨리려고 하는데도 하는 일마다 족족 성공해내는 놈이 있는데 상식적으로 그게 달가울 리가 없잖아.”
안 그래?
만약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는 이미 폭발하고도 남았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꺼낸 근거 역시 존재했다.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12층… 이번 층은 내가 실패하도록 네가 일부러 짰잖아.”
일부러 탑에서 떨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내 물음에 악동은 인상을 더욱 구겼다.
방금까지만 해도 적당히 눈치를 살피며 애써 인상을 꾸미고 있었다면…
이건 명백한 살기와 불쾌함의 감정이었다.
“허어? 신한별 플레이어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군요.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떨어뜨리려고 일부러 이번 층을 꾸몄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의도로 하신 말씀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만.”
일순 악동의 몸에서 검은 전격이 요동치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장난스런 말투는 연기란 듯이 녀석은 사뭇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방금 전의 압력과 맞먹거나 그에 상응하는 힘.
저게 바로 저 순수한 얼굴 뒤에 감춰진 또 다른 이면이리라.
이번 일을 본보기로 나를 자신의 발밑에 꿇게 만들 생각이었겠지만, 그럴 생각이었다면 한참 물렀다.
나는 힘을 억누르던 반지를 뺐다.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라… 네 말대로 그것도 나쁘지 않지. 다만 너도 책임질 수 있겠어? 이 상황에 대해서 말이야.”
“……!”
지금껏 숨기고 있던 진면목을 드러내자, 악동은 상당히 놀란 얼굴로 주춤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다.
지금 내가 지닌 힘의 총량은 결코 녀석이 가진 그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기 때문에.
기껏 해봤자 저런 놈의 말에 쫄 생각이었다면 11층에서부터 대립을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라면 있다.
무슨 자신이냐고?
‘저놈한테 질 것 같지 않은 자신이.’
게다가 처음에 내가 말을 꺼낸 근거 역시 존재했다.
“분명히 내가 선발대로 보낸 덩치의 말에 따르면 이쪽 성에 가까이 다가와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어, 그런데 내가 이 성에 도착했을 땐 다른 플레이어라면 버티지도 못할 힘이 있더라고?”
“허어…… 겨우 그런 것 가지고 트집을….”
“왜? 이것도 이번 층의 일부라고 둘러대려고?”
“…….”
“뭐, 네가 그렇게까지 빡빡 우긴다면 나도 할 말은 없는데.”
다만.
“성에서 뿜어져 나온 힘과 지금 네 몸에서 느껴지는 권능이 매우 닮아있다는 건 전부 내 착각인가?”
다른 플레이어들이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다른 플레이어들과 동급이라고 판단했다면 오산이다.
내가 지닌 기감 역시 다른 놈들한테 뒤처질 자신은 없거든.
“네가 그렇게 당당하다면 지금 당장 이 탑을 만든 신인가 뭔가 하는 작자를 불러와서 한 번 확인해보던가. 싸우려면 적어도 사안에 걸맞는 공증인이 있어야 할 거 아냐?”
꼽냐? 꼬우면 네 손으로 직접 까봐라.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도발에 악동은 사뭇 굳은 얼굴이 되었다.
처음부터 넌 나한테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어.
그러고는 몸에서 내뿜고 있던 흉흉한 권능을 천천히 거두기 시작했다.
거봐?
애초에 이길 자신이 있었다면 큰소리를 내지 않았겠지.
옛말 중에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더니, 역시 선조의 말씀에는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 듯했다.
꼴에 자존심이 있다고 권능을 천천히 거두는 모습은 꼴사나움 그 자체였다.
이걸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가치도 없다.
“야? 거기에 멀뚱히 서서 뭐 해, 여기에서 볼일 끝났으면 얼른 보상이나 집계하고 다음 층으로 보내줄 것이지. 명색이 진행자면 제발 이름값대로 스무스하게 진행하자고? 그것까지 플레이어가 지적해줘야겠어?”
“…….”
내 목소리에도 악동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털을 열었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포털로 발걸음을 옮겼다.
〈13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Yes/No〉
이제는 익숙한 시스템.
나는 거침없이 전자를 선택하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내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던 악동의 입가에서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른 것은.
“신한별 플레이어 당신의 그 기세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진 제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 * *
〈13층입니다.〉
〈이번 층의 컨셉은 아포칼립스와 생존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환한 섬광이 시야를 비추더니, 이곳이 13층임을 알리는 문구가 떠올랐다.
그와 더불어 12층에서의 보상이 떠올랐다.
〈12층을 클리어하신 특별 보상입니다.〉
허공 위에서 번뜩이는 불빛에 손을 뻗자 한 뼘 정도는 될 법한 작디작은 손거울이 쥐어졌다.
눈 대강으론 역사서에서만 볼 수 있을 법한 수천 년 전의 보물.
여러모로 의문점만 남는 물건이다.
혹시나 싶어 거울이 있는 면을 확인해봤지만, 세월의 때를 타서 그런지 거울에 해당하는 부분은 완전히 산산조각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보면 볼수록 용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건 거울로 쓰란 것도 아니고, 뭐하잔 거야?’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자, 이를 설명해주기라도 하듯 창이 떠올랐다.
〈역사의 파편(D)〉
- 한때는 SS급 물건이었지만 시간에 흐름에 따라 상당히 낡게 되었다. 역사에 해당하는 물건에 거울 부분을 비추면 과거의 현상이 현현함.
※ 1회용이니 취급에 주의 바람!
※ 못생긴 사람이 거울로 사용한다면 거울이 박살날 지도…?!
아티팩트의 설명을 읽다 말고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저번에도 느꼈던 거지만, 탑과 관련된 아티팩트들의 설명서는 다 저따구야?
그래도 방금 전에 거울에 얼굴을 비췄는데, 박살 나지 않은 걸 보니 내 얼굴도 나름 괜찮다는 건가?
파스슥!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거울의 일부분에 금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것도 기분 탓이리라.
“일단 갖고 있다 보면 나중에 어딘가에는 쓸 일이 있겠지.”
아티팩트에 대한 설명을 읽어봐도 아직까진 이렇다 할 느낌은 오지 않았다.
일단 아티팩트는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길 잠시, 뒤늦게 주변 풍경을 둘러본 나는 머릿속에 의문을 떠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서 있는 장소는 작은 크기의 사무실이었기 때문에.
마치 게이트가 발생해 지옥이 되기 전의 지구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다.
나는 불이 꺼진 사무실을 둘러보며 걸었다.
“이런 것도 오랜만이네. 지구가 그 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작은 중소회사에서 일했었는데.”
까놓고 말해서 게이트라는 지옥 때문에 상대적으로 미화돼서 그렇지,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항상 저녁에는 회식에다가 거기에 참여 안 하면 야근, 게다가 야근수당은 더럽게도 쥐꼬리만 했었지.’
되새겨 보면 사축이라는 단어에 어울릴 듯한 처지였다.
과거를 회상하다 말고 나는 또 다른 의문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디에 있지?”
나는 의문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분명 다 같이 13층으로 이동을 한 것치곤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오싹함마저 감도는 침묵.
왠지 모르게 다음 층에 이동하기 직전에 악동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괜한 생각이리라.
현 상황을 모색하려면 높은 지대에 보는 게 편하다.
나는 재빨리 결론을 내린 다음,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소환된 자리가 고층이었던 덕분에 옥상에 올라가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콰앙!
나는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발로 문을 걷어찼다.
내가 있던 건물뿐만 아니라 다른 고층 건물 역시 전기가 통하지 않는지 어둠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발을 뻗기 힘들 정도로 강한 강풍이 불었다.
펄럭이는 옷을 잡으며 나는 발걸음을 내뻗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주변 풍경이 시원하게 보이는 난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입을 쩌억 벌린 상태로 아연했다.
“이, 이건…?!”
내 앞에 펼쳐진 상황은 지구에 있을 당시, 게이트가 열린 첫째 날의 지옥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