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나는 모든 일을 제치고 성벽 위로 달려갔다.
섬광이 사라진 자리에는 동공이 흐릿해진 상태의 덩치가 서 있었다.
“커헉!”
한동안 자리에 멀뚱히 서 있던 덩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녀석이 이렇게 귀환했다는 얘기는 즉, 내가 권유한 대로 스스로 자살을 했다는 뜻이다.
일반인들과 비교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훨씬 우월한 플레이어라 하더라도 맨정신에 자살하는 행위는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정신이 이상해져도 충분한 상황이었으나,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것도 전부 탑의 영향권이기 때문이다.
‘나도 튜토리얼 안에서 각종 자살법을 실험해봤지만 미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트라우마가 아주 짧은 순간에 없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유경험자였기에 충분히 공감한다.
나는 녀석의 앞에 다가가 천천히 등을 두들겼다.
“괜찮으니까. 거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지?”
“흐으윽… 흡! 괴, 괴물…!!”
그러자 덩치는 이전보다도 새하얘진 얼굴로 몸을 떨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마치 보면 안 되는 걸 본 사람처럼.
녀석은 한동안 난동을 부리다 말고, 내 얼굴과 직면하고는 새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다.
트라우마로 인해 난동을 부릴 땐 언제고 덩치는 갑자기 나를 보며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지만 같은 경험자로서 잘 알고 있었다.
저건 자신의 내면에 있는 트라우마를 직접 대면했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 뜻은….
“…….”
나는 등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기감을 최대한 넓히며 주변을 경계했다.
혹시 모르는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적의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내 감각을 속일 정도의 적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경계심을 끌어 올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둘리가 말을 걸어왔다.
“한별! 내가 보기에는 한별의 얼굴을 보고 겁먹은 거 같다.”
“그게 뭔 소리야? 내 쪽을 보는 건 그저 우연의 일치고 여기엔 저놈의 트라우마가… 어?”
나는 말하다 말고 멈췄다.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내가 움직일 때마다 덩치의 시선 역시 그대로 따라왔기 때문에.
한참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트라우마라고?”
“음? 한별이 저 사람의 머리를 깨고, 적에게 들키면 죽으라고 명령하지 않았었나?”
천진난만한 둘리의 말에 나는 한숨을 푹 쉬며 한 손으로 미간을 눌렀다.
나는 덩치의 등을 툭툭 치며 차갑게 뇌까렸다.
“야, 그래서 가서 뭘 봤길래 그러고 있어?”
“그, 그게…….”
“시간 없으니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아니면 내가 직접 말하게 해주랴?”
내가 귀찮다는 어조로 말하자 녀석은 손을 덜덜 떨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 중앙에 있는 성에 가기 전에 염탐하기 위해 적이 있는 성을 먼저 찾아가 봤습니다.”
“그래?”
“네,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적들의 계획을 엿듣게 되었습니다.”
덩치는 아연한 눈동자로 과거의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그 계획이란 것은?”
“적들은 목표는… 중앙에 있는 성을 도발해 그곳에 있는 적을 저희 쪽으로 유인해 일망타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을 이끄는 사령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저번 층을 통해 내가 지닌 전투력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파악하고 있다.
만일 내가 상대측에 뛰어든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승리가 결착 나는 건 안 봐도 뻔한 결과일 터.
따라서 미지의 존재를 유인해서 나를 격파하는 계획을 짠다.
혹여나 미지의 적이 나를 격파하고 이 성을 붕괴시킨다면 그 혼란을 타 깃발을 꽂아서 승리를 챙기면 되고.
반대로 내가 미지의 적을 쓰러뜨린다면 그 누구의 피해도 없이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강 건너 불구경하는 꼴이라곤 하더라도 지휘관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최선이었다.
‘그럼 방금 전에 이쪽에 온 저격수는 일종의 선발대 같은 셈이었나.’
그래, 거기까진 좋다.
“중앙에 있는 성에는 뭐가 있었는데?”
처음부터 기다려봤던 본론은 바로 이것.
저쪽에서 무슨 계획을 궁리하든 상관없다.
어차피 내 계획 역시도 중앙에 있는 성을 무너뜨려서 이번 층을 끝낼 생각이었다.
물론 상대편 성을 박살 내면 아주 쉽게 이번 층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평등하게 탑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시작점은 다르다.
남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다면 그 한계는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
그 증거로 1층에서 10층까지 내가 다른 플레이어와 똑같이 클리어를 했다면 이만한 기연을 얻고 보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중앙에 있는 성은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자만하고 있을 관리자 놈들의 낯짝도 눈에 거슬리니까.’
내 물음에 덩치는 우물거리더니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엄청난 갑옷과 무기를 갖춘 언데드와 고급 로브를 뒤집어쓰고, 스태프를 지닌 언데드 병력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들키는 바람에 자세한 병력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덩치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덧붙이진 않았지만,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이라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만약 무사했다면 녀석은 죽어서 이 자리에 소환되는 게 아닌, 두 발로 멀쩡히 걸어서 돌아왔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적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고는 안색을 굳혔다.
확실하진 않지만, 녀석이 본 인상착의라면…….
‘튜토리얼에서도 한 번 상대한 적 있는 놈이네.’
그것도 쉽지만은 않은 난적.
그만한 괴수를 신인들이 있는 7층에 풀어놓다니, 상당한 악취미였다.
“일단 방비를 갖추고…….”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콰앙!
섬뜩한 기척과 함께 시꺼먼 폭발이 일어나며 한쪽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폭발로 인해 휘말린 플레이어들은 대처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폭발에 휘말려 즉사했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
갑작스러운 상황에 성벽 밖을 확인하자, 수많은 언데드 군세들이 정렬하고 서 있었다.
아무래도 준비할 시간은 없는 것 같았다.
* * *
본격적으로 언데드 군세의 침범이 시작되었다.
언데드 메이지의 암흑 마법으로 인해 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성벽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로 인해 경비를 서던 몇몇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플레이어와 적들의 힘 차이를 알 수 있는 대목.
게다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망한 플레이어들은 다시 부활하지 않는다.
상황을 미루어 봐선…
“저놈들의 손에 죽으면 부활하지 않고 바로 죽는 건가.”
거기까진 어느 정도 예상하였기에 그다지 놀라운 것은 없었다.
우선 언데드 군세를 처리하는 게 급선무다.
나는 짧은 찰나에 판단을 내리고는 둘리에게 명령을 내렸다.
“분명히 이 주변에도 다른 플레이어들의 지휘관도 있을 테니까. 네가 찾아서 끌고 와.”
“음… 이 주변에 말인가!”
“어, 분명히 있을 거야.”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쩌면 이 난리를 틈타 이쪽 성에 깃발을 꽂으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덩치의 언급으로 미루어 보건대 주의해둘 필요는 있었다.
“적어도 이딴 엿 같은 계획을 꾸민 녀석의 면상은 봐둬야지.”
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힘을 억제하고 있는 반지를 뺐다.
둘리가 지닌 힘이라면 적의 대가리를 찾아내고 발을 묶어둘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겠지.
그전까지 나는 저 해골바가지들을 박살 내 버린다.
그뿐인 이야기였다.
“후우….”
나는 숨을 길게 내뱉고는 지면을 박차고 성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단 한 번의 발돋움이었음에도 엄청난 강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상당한 모래폭풍에도 제자리에서 굳건히 서 있는 언데드 병사들.
언데드들은 나를 직면하자 샛붉은 눈빛을 번뜩이더니 돌변했다.
-크에에엑…… 인간 죽인다…
-죽인다! 인간!!
누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언데드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나를 향해 돌격했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서는 언데드 위저드들이 발동한 암흑 마법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하나하나가 집 한 채는 거뜬히 박살 내고는 남을 위력.
게다가 나를 향해 돌격하는 언데드들 역시 저층의 플레이어들한테는 찾아볼 수 없는 상당한 무장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났을 테지만, 나는 검을 뽑고는 무덤덤한 얼굴로 적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저런 해골바가지들이라면 튜토리얼 안에서 많이 상대해봤으니까.’
탑에 들어오면서 한가해져서 그렇지.
튜토리얼 내에 있을 때는 매일 매일 각기 다른 유형의 강적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했었다.
위기감이라면 무뎌진 지 오래다.
“애초에 이런 잡몹들한테는 위기감까지 느낄 건 없지만 말이야.”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로우킥으로 눈앞에 있는 해골을 박살 냈다.
그대로 저 멀리 날아간 언데드는 다른 해골과 격돌하며 군세 사이에 큰 구멍을 만들어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언데드 군세 안으로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힘에 의해 상당한 범위로 날아간 풍압은 언데드들을 강타했다.
전투가 시작한 지 몇 초도 안 되어 상당수가 쓰러진 언데드 군세.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파스스스슥!
공기 중에 짙게 깔린 암흑의 기운이 박살 난 뼈를 한데 모으더니 다시 언데드를 부활시켰다.
아무리 쓰러뜨리더라도 다시 부활한다.
그야말로 끝도 한도 없는 반복의 연속.
이것이 바로 언데드 군세의 위험성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경우에는 죽이면 끝이지만, 사자(死者)인 언데드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뼈를 모아서 부활하면 끝.
이대로 반복하면 그저 내 힘만 빼는 꼴이었다.
이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방법은 단 하나.
‘언데드들을 부활시키는 대장을 찾아서 박살 낸다.’
그리고 그 원흉의 위치는……
나는 짧은 망설임 끝에 한쪽 방향을 향해 쇄도했다.
목적지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더욱 짙은 암흑 기운과 언데드들이 쏟아졌다.
이 뒤로는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원념.
하나 해골바가지들로 나를 막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나는 언데드의 파도를 몸으로 뚫어내고는…
-끼아아아악! 인간을 막아라!
다른 언데드를 향해 필사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는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너구나? 이런 시답잖은 일을 벌인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