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24화 (24/175)

제24화

“아까 전에 준다고 했었던 보상은 주고 가야지.”

내가 손을 뻗으며 말하자, 악동은 입을 쩍 벌리며 난장판이 된 플레이어들을 바라봤다.

애써 당황한 티를 내색하지 않으려 표정 관리를 하는 듯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나한테는 훤히 보인다.

‘당황한 모양이구만.’

하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 있게 지껄였는데, 손쉽게 끝났으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지.

마음 같아선 이 상황을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으나 그건 나중이다.

“뭐해? 명색이 관리자인가 뭐시기 하는 놈의 시다바리… 아니, 대행자라는 놈이 한 입으로 두말하기야? 뭐, 난 그딴 거 안 받아도 상관없긴 한데 어쩔래?”

“…….”

내가 낄낄거리며 말하자, 자존심이 퍽이나 상했는지 악동은 일그러진 얼굴로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11층의 보상이 집계되었습니다.〉

시스템음과 동시에 허공에서부터 강렬한 섬광과 강풍이 일어났다.

찬란한 오색 빛과 함께 두 마리의 용이 대조적으로 그려진 형체의 수정구가 오른손에 쥐어졌다.

〈성신의 숨결(S)〉

- 무기나 방어구에 성신의 숨결을 부여해 특수 효과 및 강화합니다.

※대장장이 클래스의 직업을 가진 자가 제련할 시 효력이 상승합니다.

11층에서 나온 보상은 S급 강화 아이템.

썩 나쁘진 않았다.

그야.

“언젠간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하곤 있었으니까.”

나는 등에 지고 있는 검을 생각하며 조용히 나직였다.

튜토리얼에서 괴수의 뼈를 갈고 닦아 만들긴 했지만, 이 무기는 어디까지나 내 힘에도 버틸만한 내구도를 염두 해서 제작한 것.

그렇기에 따지고 보면 검에 공격력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나한테 꼭 필요한 보상이었다.

뭐, 대장장이 클래스가 제련하면 더 좋다곤 하지만.

‘그거야 차차 찾아보면 될 일이고.’

그러니 조급할 건 없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내며 관리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건 내가 잘 쓸 테니까. 걱정하지 마.”

“…….”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었는지 악동은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렸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기도 잠시.

시간이 다 됐는지 내 앞으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12층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Yes/No〉

11층도 마무리란 뜻이었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시스템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정신을 차렸는지. 플레이어들이 머리를 부여잡고는 일어나고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다음 층으로 이동하는 모양인지 곳곳에서 새하얀 섬광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이걸로 전부 끝이니 이곳에서는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그럼 가볼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둘리와 함께 다음 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 * *

〈이곳은 탑의 12층입니다.〉

쌀쌀한 바람이 피부를 때렸다.

눈을 번쩍 뜨자 빛이 가시고 이내 주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높은 성벽과 함께 끝도 한도 없을 것 같은 평지가 펼쳐졌다.

그야말로 공성전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광경에 나는 짧은 탄성을 흘렀다.

수백 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고풍스러운 풍경에 놀라기도 잠시,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래봤자 지구에 있는 중세시대 성과는 다르겠지.’

보기에는 엄청난 것 같아도 결국 탑의 시스템으로 인해서 구현된 풍경에 불과했다.

오직 다음 층으로 향하는 배경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

플레이어를 떨어뜨리기 위한 장소.

여기에서 목숨을 잃은 플레이어는 다시 지구에 있는 지옥에 떨어진다.

잔혹한 현실을 직면하자, 몸의 떨림이 사그라들었다.

문득 이변을 깨달은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디로 갔지?”

당장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만 해도 11층에서 이동한 전체 플레이어 중에서도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기척을 넓혀 봤지만, 근처에서는 다른 플레이어의 반응은 느껴지지 않는다.

현 상황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을 즈음이었다.

“저번 층의 트롤러가 여기에 있었네.”

누군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거구의 흑인이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레 겁을 먹고 쫄 만큼의 피지컬.

그 증거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다른 플레이어들은 눈치를 살피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그래봤자 나한테는 어쭙잖은 일진이 시비 거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위협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시로 일관하자, 그는 주먹으로 벽을 내려쳤다.

엄청난 힘을 과시하듯 벽의 한쪽 면이 와르르 무너졌다.

“카악, 퉤! 그래서 좋은 보상 얻으니까. 기분 좋냐? 덕분에 우린 아무런 보상도 없이 여기에 왔다고!”

“볼 일은 그게 끝인가 봐?”

“허! 그래서 희생자 없이 다음 층에 올라왔으니 우리더러 고개를 조아리고 감사해하라고?”

어, 솔직히 아무 피해도 없이 올라왔으니 감사 인사받을 만도 하지 않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남자는 혀를 날름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이 얻은 보상을 형평성에 맞게 분배해야 하지 않겠어? 따지고 보면 그 보상도 전부 우리가 있는 덕에 얻은 거잖아.”

남자가 내놓은 결론을 들은 나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썩소를 지었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결국 놈이 원하던 건 우리가 얻은 보상이었나.

안 그래도 당치도 않는 보상을 얻어서 빡돌겠는데, 덤으로 저러다니.

“어!!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냐고! 너희들도 마찬가지지? 지금 저 트롤러 새끼들은 우릴 팔아서 자기 좋을 짓만 하고 있다고!”

남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 역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어 부당함을 합리화시킨다.

그 부당함을 다른 이들도 휘말리게 만들면 끝이었다.

왜냐하면 이쪽이 소수인 것에 반면, 저쪽은 다수였으니까.

이대로 정치질을 해서 머릿수로 밀어붙일 생각인가.

다른 건 전부 제쳐놓고 효율성으로만 따져보면 썩 나쁜 행동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놈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건 없다.

다만.

“야, 루저 새끼가 쫑알쫑알 뭐 이리 말이 많아?”

“루, 루저?”

“그게 불만이었으면 너희들도 나처럼 진행자한테 건의하지, 그랬어? 언제는 쫄아서 아무 말도 못 하던 놈들이 왜 이제 와서 뒷북이야?”

기회를 줘놓고도 나한테 깨진 새끼가 직접 꺼낼 말은 아니지.

“그, 그걸 말이라고….”

“네가 원하는 보상? 그게 그렇게 원하면 줄게. 대신 나한테 덤벼서 이기면 말이지.”

“…….”

내 대답에 남자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조소를 흘렸다.

“싸움판을 깔아줘도 받아 먹지도 못하는 놈이 누구한테 와서 신경질이야.”

그럼 그렇지.

너무나도 뻔하디뻔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자신이 있었다면 정치질을 할 것도 없이 나한테 덤볐을 텐데, 놈은 그러지 않았다.

처음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리 생각하며 상황을 마무리하려던 때였다.

“하하! 왜들 그리 무서운 분위기야. 자자, 새로운 층도 왔으니까 다들 긴장 풀라고.”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악동은 웃음보를 터뜨리며 말했다.

영락없이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이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괴리감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번 12층은 보이는 것처럼 간단해! 공성전이야!” “공성전?”

악동의 발언에 플레이어 중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플레이어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공성전을 한다. 그리고 각자의 사령관이 상대편의 성에 준비된 깃발을 꽂으면 되지.”

“사령관은 누구지?”

“각 팀 중에서 가장 전투력이 높은 사람이 사령관이 될 거야. 따라서 너희들 중에서는… 뭐, 누군지는 말 안 해도 되겠지?”

악동의 말에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그렇다.

내가 이 성의 사령관이었다.

“그렇게 됐으니, 지휘관의 지휘 아래에서 승자가 되는 걸 목표로 해보라고. 참고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명령 불복종인 건 알지?”

듣기에는 별것 없는 임무.

허나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했다.

탑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기에.

“아, 맞다! 저번 층에서는 탈락자가 아예 없는 관계로 이번 공성전에서 진 팀은 전부 탑에서 퇴출이니 그런 줄 알고 있으라고?”

“……!”

어쩐지 너무 쉽게 굴러나가 싶었다.

약육강식의 세계, 탑은 그런 곳이다.

성장하지 못한 자는 그대로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있어. 두 성의 중앙에는 또 다른 성이 있지. 그 성을 함락시키면 두 팀은 아무 희생도 없이 통과야! 다만 미리 경고하건대 그 성은 안 건드는 게 좋겠지만!”

“…….”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지만, 이번 층에서 죽기 싫다면 공성전에서 승리하는 걸 목표로 잡는 게 좋을 거니까. 그런 줄 알고 있으라고?”

저번과 같이 악동은 그것을 끝으로 사라졌다.

악동이 사라지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방금까지 보상이니 뭐니 하면서 내게 따져 묻던 이들이, 이번에는 내 지휘의 밑에서 움직여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세가 완전히 역전되자 나한테

“야, 너도 잘 들었지? 내가 지휘관이라는데?”

“……들었습니다.”

“이번 층에서는 내 명령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는 거고.”

“…….”

내 말에 놈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젠 반항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나한테 반항한다면 진행자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뭐 네가 원하면 조금 전에 보여준 행태는 전부 잊어줄 수도 있어.”

“그, 그게 정말인…….”

“대신에 너 나한테 한 번만 죽자.”

“예⎯?”

나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놈의 대가리를 박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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