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23화 (23/175)

제23화

이어진 내 발언에 분위기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악동은 뭐가 재밌는지 자지러지게 폭소하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 내가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인간들을 봐왔지만, 너 같이 나사가 빠진 놈은 처음이네!”

한참 동안 웃다 말고 악동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가 싹 빠진 얼굴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포식자를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찌릿함.

악동이 내뿜은 기백에 의해 내 반경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옆에 있는 둘리 역시 의식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고작인 듯 보였다.

“어이, 인간. 네가 말한 그 권한의 의미는 잘 알고 있겠지? 그래, 모르고선 절대로 인간의 입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말이지.”

아니? 나도 잘 모르는데?

마땅한 요소를 찾아보다가 최대한 있어 보이는 말을 내뱉어본 것뿐이다.

그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악동은 한쪽 손에서 짧은 길이의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인간들 중에서도 전투력으로 압도적인 1등, 거기에 모자라 내 힘을 비틀어낸 것을 보니… 너 평범한 놈은 아니구나.”

아뇨, 태어난 배경부터 시작해서 전부 평범한데요?

굳이 다른 차별성이 있다면 남들보다도 튜토리얼을 길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악동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원한다면 조건을 못 받아들여 줄 것도 없지. 다만 그냥 하면 재미없잖아? 나도 조건을 조금 수정해도 되지?”

“조건을?”

“별건 아냐. 너와 나의 1대1 대결 그리고 만일 네가 패배한다면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몰살이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악동의 목소리.

잇따른 그의 발언에 나와 함께 11층에 이동한 플레이어들은 아연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당장에라도 그 말을 철회하란 듯한 눈빛이 쏟아진다.

그들의 기대와는 반면 나는 씨익 웃으며 힘을 억제하기 위해 착용한 반지를 빼며 악동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네 말대로 아주 간단하네. 요는 널 쓰러뜨리면 된다는 거잖아.”

그 말을 듣고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방금 파악한 놈의 기량.

이길 자신이라면 있다.

아티팩트를 해제하자, 순간 악동의 눈빛이 변했다.

녀석은 지금까지 아티팩트를 이용해 차단해둔 내 힘의 일부를 보고 있었을 터.

승부처는 지금부터다.

“11층에 막 들어왔을 터인 인간이 힘을 숨기고 있었다니… 아무래도 진행자를 우습게 보고 있었나 보군.”

우습게 볼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녀석을 더 빡치게 만든 모양이었으나,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다.

본격적으로 검을 들어 올리고 자세를 취하려던 그때였다.

“에엣?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자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요. 하, 하지만… 그러기엔 형평성의 문제가… 재밌어 보이니 상관없다니… 알겠습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악동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자아내든가 싶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살기를 거뒀다.

한동안 못마땅하단 듯이 가만히 서 있던 녀석은 허공으로 붕 떠오르면서 말했다.

“너 보기보다 운이 좋네. 상부에서 네 의견을 받아들이라는 허락이 떨어졌어.”

“그 말은?”

“네 말대로 해주겠단 뜻이지. 뭐, 덕분에 흥도 식었으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악동이 손에 쥔 짤막한 스태프를 휘두르자 내 앞으로 새로운 창이 생성되었다.

〈미션: 참여자 전원을 쓰러뜨려라.〉

〈보상- S급 확정 뽑기권〉

달라진 보상을 확인한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보상이 달라졌네?”

“인간 주제에 욕심도 많네. 이걸로 만족해 그나마 최대한 많이 쳐준 거니까.”

진행자의 권한을 얻을 수 없단 것은 안타깝게 되었지만, 이것 역시도 상상 그 이상의 보상이었다.

A급 아티팩트가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한다면.

그것보다도 등급이 높은 S급 아티팩트는 최상층에 있는 랭커가 아니고선 얻을 수 없는 물건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초반부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상당한 보상.

거절할 이유는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악동에게 말했다.

“나쁠 건 없지.”

“그럼 교섭도 끝났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악동은 주변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허공을 향해 가볍게 스태프를 휘둘렀다.

그러자 내내 플레이어들의 몸을 옥죄이고 있던 압박감이 소멸했으며, 기절해있던 사람들이 의식을 되찾았다.

“자자! 전부 기상! 미안하지만 아까 한 말은 철회하도록 할게! 조금이지만 예정이 변경됐거든!”

악동은 안색 한 번 변하지 않은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전부 합심해서. 여기 있는 이 건방진 인간을 쓰러뜨려 줘야겠어. 아 물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지.”

“그, 그게 무슨….”

“무슨 뜻이긴. 이놈을 쓰러뜨려서 최강자의 타이틀을 뺏으라는 뜻이지. 특별히 가장 먼저 이놈에게 유효타를 먹인 녀석한테는 진행자의 권한으로 특별보상을 주도록 하지.”

누가 봐도 편파적인 그의 발언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은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요즘 커뮤니티에서 핫한 신한별이라는 놈이 바로 저놈이란 뜻이지?”

“그러니까. 저놈을 묵사발 내면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단 뜻이잖아.”

“와씨 개꿀이네. 이번 층 그냥 거저먹는 거네.”

“그래서 언제부터 시작이야! 더이상 못 기다리겠다고!”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불만이 섞인 투로 악동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의 질문에 악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선착순에 시작이고 자시고 그런 게 어딨어?”

⎯빠른 놈이 임자지.

악동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플레이어들은 이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힘 조절을 하기 위해 반지를 착용하려던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티팩트를 한 번 해제하고 나면 재사용시간이 필요합니다.〉

〈활성화까지 남은 시간: 1시간〉

“어?”

이런 제한도 있었어?

그 뜻은 내 힘을 온전히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이야기.

1층에서처럼 힘을 잘못 휘둘렀다간 방어하긴커녕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범위 내에 휘말릴지도 몰랐다.

고민할 틈은 없었다.

“쓰읍.”

깊게 호흡을 들이킨다.

나는 집중력을 유지하며 바로 앞에 있는 지면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피슝! 콰과광!

압축된 공기파가 지면에 처박히며 크레이터가 일어났다.

한순간 발을 디딜 땅이 무너지자 중심을 잃은 몇몇 플레이어들은 그대로 전투 불능이 되었다.

“저 새끼 뭐야! 스태프도 없는데 마법은 어떻게 사용한 거야?”

“저층에서 이만한 실력의 마법사가 있었다니… 다른 마법을 쓰기 전에 몰아붙여!”

“젠장! 들고 있는 검은 단지 눈속임용이었나!”

아니…? 나 마법사 아닌데?

플레이어들의 반응에 나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고층에 있는 랭커도 아니고 이제 막 튜토리얼을 졸업한 플레이어가 맨손으로 지면을 쪼갰다고 연상하긴 어렵다.

마법이나 다른 수를 썼다고 생각하는 편이 좀 더 그럴듯하겠지.

‘일단 주의해두는 편이 좋겠지.’

그나저나 플레이어는 플레이어인가 보다 그 짧은 순간에 거기까지 계산을 하다니.

그렇게 생각하며 상대편 진영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멀리서부터 날아온 화살이 바로 내 옆에 박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하늘에서 화염구와 얼음창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근거리가 안 된다면 원거리 공격이란 건가?”

꽤나 괜찮은 전력이지만 그걸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실수다.

나는 옆에 있는 둘리의 날개를 붙잡았다.

“저기에 마법사들하고 궁수들이 무리지어 있는 거 보이지?”

“한별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지?”

꺼림칙한 얼굴로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둘리.

뭘 그렇게 걱정이 많은지, 걱정 마라. 한배를 탔으니 무리한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난이도로 따지면 이전에 있었던 일보다는 훨씬 간단한 일이지.

“내가 저쪽으로 보내줄 테니까. 네가 원거리를 처리해.”

“문제없다! 한별, 근데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괜찮나?”

둘리는 건너편까지의 거리를 재는 듯하더니,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바로 얼마 전에 나는 법을 알았다고 해도 아직까진 장거리 비행은 불안한 모양이었다.

녀석의 물음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떻게 가긴? 날개가 힘들면 총알처럼 날아서 가면 되지.”

“예…?”

간단하기까지 한 해답에 둘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녀석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뭐 그래봤자 늦었지만.

나는 녀석의 몸을 붙잡고는 씨익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그렇게 됐으니, 나머지는 잘 부탁할게.”

그 말을 끝으로 내 손에 쥐어진 녀석은 포환이 되어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던져졌다.

추락할 때 다소 아프기야 하겠지만, 드래곤이 지닌 재생력과 방어력만 있다면 어지간한 부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럼 떨거지들은 둘리한테 맡겨두기로 하고.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뭘 그리 몸을 숨기고 그래? 덤빌 거면 어서 덤벼.”

“칫! 들켰나.”

“상관없어. 여기까지 가까워졌으면 제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이렇게 가깝다면 한 방 감이지.”

“미친 새끼들아 특별 보상은 내 거니까 손대지 마!”

“탑 안에서 네 거 내 거가 어딨어. 진행자의 말대로 빠른 놈이 임자지!”

내내 은신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모습을 드러내곤 내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인간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

하긴 탑에서 죽어봤자 지구에 있는 그 지옥으로 다시 돌아갈 뿐이니 진짜로 죽지 않는다.

그런 사고방식이 플레이어들의 살인을 무덤덤해지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날로 놈들의 손목을 내려쳐 단검을 떨어뜨린 다음에 손가락을 튕겨 기절시켰다.

나름대로 힘 조절을 했으니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맨손으로 찌그러뜨렸다.

“이런 장난감 칼을 갖고 뭐해?”

“괴… 괴물….”

아? 이거 장난감 칼이 아니었어?

난 또 너무 쉽게 찌그러진다 싶어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칼인 줄 알았다.

“그건 그렇고 이제 대충 끝났나.”

나는 손을 탈탈 털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슬슬 전투도 끝나가는지 둘리가 있는 방향에서도 소음이 점차 줄어들었다.

플레이어들의 대부분은 초반에 내가 만든 크레이터 밑으로 낙오되면서 마무리되었을 터.

파악되는 기척으로는 이게 전부였다.

〈미션: 참여자 전원을 쓰러뜨려라.〉

〈미션을 성공하셨습니다!〉

예상에 적중하듯 새롭게 떠오른 시스템을 보고는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지개를 피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진행자가 허공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어⎯?”

이제서야 상황을 판단한 진행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전장을 바라봤다.

그럴 만도 하지.

자고로 플레이어는 인간의 무위를 벗어난 힘을 사용하는 자들.

그런 괴물들을 몇 명도 아니라, 수십 명과 맞붙어서 이겼다.

그것도 이쪽은 유효타를 한 번도 허용해주지 않고 아주 간단하게.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진행자에게 손을 뻗었다.

“거기에서 멀뚱히 서서 뭐해.”

아까 전에 준다고 했었던 보상은 주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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