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22화 (22/175)

제22화

골목 한편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도 그럴 게 그것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천 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튜토리얼에 있으면서 탑에 들어갈 기회를 뒤로 미루면서까지 마지막까지 기다려 준 플레이어.

- 튜토리얼에서 나오면 저한테 먼저 연락하세요. 탑에서 만나게 되면 밥이라도 한 끼 살게요. 그럼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녀가 건넨 마지막 한 마디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설렘이나 사랑 같은 시원찮은 것이 아니다.

‘천 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마지막으로 들은 사람의 목소리니까 기억할 만도 하지.’

확실히 금발 태닝 양아치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가진 강함은 튜토리얼에서 봤던 거와 여전한 듯싶었다.

또 탑을 기준으로는 수년이 지났을 텐데도 그녀의 외모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를 보며 놀라고 있을 때였다.

“넌 뭐 하는 놈이야. 간만에 귀한 손님 오셨는데 선수 챌 생각하지 말고 꺼져!”

골목길 사이에서 나타난 유채아의 모습에 양아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발악했다.

그의 외침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채찍에 힘을 가했다.

채찍은 마치 의지가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가 싶더니, 양아치의 경동맥을 강하게 조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에고 소드인가?’

에고 소드.

30층 이상의 플레이어들만 얻을 수 있는 아티팩트로 저걸 지닌 자는 한 손에 꼽을 정도라 했었던가.

그거야 지금 중요한 건 아니고.

나는 유채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거리는 불과 30M 남짓.

이쪽이 역광이라 아직 내 얼굴을 보지 못한 듯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차리게 될 터.

아니나 다를까.

양아치의 처리를 위해 이쪽으로 걸어오던 그녀는 내 얼굴을 직면하고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녀는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경악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을 더듬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하, 한별 씨? 한별 씨가 어째서 여기에….”

왠지 모르게 심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양아치를 가로질러 그대로 내 앞에 다가왔다.

“잠시만요 한별 씨! 몸에 상처가…!”

어? 상처라고?

재회하자마자 가장 먼저 나온 그녀의 대답에 나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상을 입었나 해서 살펴봤으나 다친 데는 없었다.

기껏 해봐야 방금 전의 싸움으로 가시에 베인 것밖에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제가 곧바로 치료해드릴게요!”

유채아는 자신의 가방을 뒤져보든가 싶더니, 영롱한 빛을 띠는 포션을 꺼내 상처가 난 부위에 끼얹었다.

상처는 포션에 닿자마자 곧바로 재생되어 아물었다.

시중에 떠도는 하급 포션이나 중급 포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속도.

그 속도에 경악하면서도 나는 덤덤하게 되물었다.

“이건…?”

“별 건 아니고, 탑에 있는 여신의 신전에서 특별히 떠온 신물이에요. 음… 대충 시판에 팔리는 것과 비교하면 A급 회복 포션하고 맞먹겠군요.”

“아, 그래?”

이게 A급 포션이라고?

유채아의 언급에 밖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탑에 대해 아무리 무지한 나라도 A급 아티팩트의 값어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A급 회복 포션쯤이나 되면 배에 구멍이 뻥 뚫린 중상이라도 하더라도 순식간에 치유할 수 있는 회복력을 지녔다.

물론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지만.

아까 전에 보여준 회복 속도와 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A급을 꿰고도 남을 아티팩트이리라.

‘그런데 그만한 물건을 고작 긁힌 상처를 회복하는 데 사용했다고?’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피가 난 것도 아니다.

고작 해봤자 가시에 찔린 상처에 A급 포션을 들이붓는다고?

이게 갑부의 금전 감각인가.

x부럴… 무섭다 못해 x랄이 떨리는구먼.

이 사실을 다른 플레이어들이 알았다면 다들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너무나도 동떨어진 듯한 금전 감각에 비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나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양아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어떤 식으로 행동할진 모르니까. 저놈은 따로 처리해두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후훗, 걱정하지 마세요. 한별 씨랑 헤어진 뒤로 열심히 실력을 쌓아서 탑의 3대 길드 중 한 곳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길드에 말하면 뒤처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그래?”

“흐음… 좀 더 놀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덤덤하시네요.”

내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이지. 네 활약이라면 커뮤니티를 통해서 종종 들어왔거든.”

“아쉽네요. 기왕이면 놀래주려고 했었는데.”

“처음에 접했을 땐 충분히 놀랬으니까. 그리 아쉬워하지 마.”

그래, 가시에 베인 상처에 A급 포션을 쏟아붓는 미친 자금력이라면 잊지 못하리라.

“후훗,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도 한별 씨가 튜토리얼을 끝내고 탑을 등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게다가 등반 속도도 엄청 빠르시던데요.”

유채아는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반응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맞다! 이렇게 뵙게 돼서 그런데 혹시 한별 씨는 저희 길드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길드?”

최선전에서 활동하는 랭커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내려왔나 싶었는데, 본론은 그거였나.

길드라… 그녀의 말대로 나쁜 것은 없었다.

일단 길드에 가입하면 여러 아티팩트을 지원받거나 인맥을 만들 수 있는 기회니까.

하지만 그건 이제 막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에게 통용되는 요소.

게다가 길드에 가입하면 제한되는 부분이 많았다.

냉정하게 익이냐 실이냐를 저울질하자면.

‘계산해볼 것도 없이 확실하게 실이야.’

빠르게 계산을 내린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아직 없어.”

“앗… 그렇군요. 한별 씨의 의견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끈질길 줄 알았는데, 깔끔한 반응에 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자, 이를 알아챈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후후, 한별 씨께서 말해주신 건 어디까지나 아직이라는 말씀이시니까요. 앞으로 기회는 많겠죠.”

앞으로라니?

의미를 생각하며 의문을 가질 때쯤. 유채아는 아티팩트를 사용해 양아치를 포박하며 손을 흔들었다.

“한별 씨도 곧 11층으로 가셔야 하니까. 저도 이만 실례할게요. 이미 클리어 한 층은 몇몇 제한된 곳을 빼면 되돌아갈 수 있으니까. 다음 층들을 클리어하시고 나면 다시 찾아뵐게요.”

“잘됐네. 그럼 다음을 기대할게.”

“네! 알았어요. 아 맞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도 받아주시죠.”

“이건?”

“후훗, 그건 제가 드리는 뇌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럼 다음에 또 연락할게요!”

내 손에 자신의 가방을 쥐여준 유채아는 윙크를 날리며 손을 흔들었다.

바로 직후, 그녀가 건네준 가방을 확인해보니 그 안에는 포션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나하나가 A급에 맞먹는 값비싼 포션.

그것들을 내려다보던 나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걸 돈이 많다 못해 금전 감각이 일그러졌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호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냥 돈 많은 호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으면서도 강렬한 그녀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이윽고 유채아의 말대로 11층의 대기 시간도 전부 지났는지 알람음과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탐색 완료!〉

〈11층으로 이동합니다.〉

〈이번 플로어의 컨셉은 서바이벌입니다.〉

* * *

11층에 올라가는 것을 수락하자, 고막을 때리는 충격음과 함께 새로운 환경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이동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는지 주변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의 플레이어들이 다수 있었다.

인종도 출신도 각각 다른 각국의 플레이어들.

‘11층부터는 국가별로 나뉘었던 탑이 한 곳으로 통합된다고 했던가.’

탑의 공략집과 커뮤니티에서 봤을 때는 그게 뭔 말인가 싶었는데 이런 의미였나 보다.

그래도 익히 주워들은 것들이 있는지 내 주변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금세 긴장을 풀고 적응한 분위기였다.

긴장을 풀고 주변을 살피고 있자 다른 플레이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아까는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내내 울상이었으면서 이젠 괜찮나 봐?”

“에이, 형님 1층부터 시작해서 10층을 겪어봤으면 이 정도야 비할 것도 못 되잖아요.”

“그래?”

잠자코 그 얘기를 듣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언젠가 한 번 들어본 거 같다.

탑의 1층~10층은 일종의 거름망의 역할로 탑에 오를 재능을 가진 플레이어들만 고르기 위한 층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탑의 전체 사망률 중에서도 초반부의 비중이 40%에 육박할 정도라고 하더지?

귀띔으로 들은 정보를 정리하며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콰아앙!

한자리에 모여있는 플레이어들 너머에서 지면을 울리는 폭발음과 동시에 소란이 들려왔다.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밈도 있지 않던가.

다섯 명이 모이면 그중에 한 명은 반드시 쓰레기라고.

자만심으로 뚤뚤 뭉쳐 있는 플레이어들이 이렇게나 한 곳에 밀집되어 있는데, 오히려 조용한 편이 더 이상했다.

소란이 일어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벌써 피가 튀기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은 흑인이고, 나머지 한쪽은 동양인들로 모인 팀.

시스템 덕분인지 외국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말은 번역 되어 귀에 들어왔다.

‘난 또 뭔가 싶었는데, 그냥 신경전이 싸움으로 번진 건가.’

으레 술자리에서 흔히 발생하는 기싸움 비스무리한 거였다.

그렇다곤 해도 괜히 중간에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그야 이곳이 개인층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파앗!

하늘의 너머로부터 섬광이 번뜩이는 거 싶더니,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일시 정지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게 멈췄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인상을 구기고 있자 공간이 일그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탑의 시스템과는 전혀 본질이 다른 무언가.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경계하고 있자, 균열 속에서 귀엽게 생긴 악동이 나타났다.

악동과 직면한 나는 곧바로 경계했다.

저건 보통내기가 아니다.

내가 튜토리얼에 있는 당시에 마지막까지 상대하던 괴수들과 거의 맞먹을 만한 강자다.

상념을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꺄하하하! 너희들 대단하잖아.”

악동은 인위적인 미소를 자아내며 웃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멀쩡히 싸울 수 있는 놈이 있을 줄이야. 근데 말이야. 여기에선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싸움은 금물이야. 그런 의미에서 너흰 추방!”

장난스럽기까지 한 외침.

하지만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악동의 어조와는 정반대였다.

쫘아아악!

악동의 손짓에 방금까지 소란을 일으키던 플레이어들의 머리가 풍선처럼 터졌다.

죽음.

죽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할 정도로 가벼운 현상에 이를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숨을 죽였다.

주변의 분위기가 그러거나 말거나 악동은 전혀 안중에도 없단 듯했다.

“자! 이걸로 분위기도 진정되었으니 내 소개부터 해볼까! 난 탑에서도 높으신 분들의 의사를 전달하는 진행자야!”

진행자.

그 한마디를 들은 플레이어들은 새파래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악동의 정체는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탑에서부터 나온 플레이어나 최상위 랭커들에 의해서 구전되는 불문율이 있었으니.

[다른 놈은 몰라도 진행자의 심기는 절대로 거스르지 마라.]

방금 벌어진 일로 그 뒤에 이어질 말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스르지 마라, 안 그럼 죽으니까.

그 뜻은 곧 탑에서의 추방.

모두가 할 것 없이 경악하는 가운데, 악동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을 이었다.

“따분한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고 다들 알다시피 11층의 컨셉은 서바이벌! 말 그대도 이 숲속에서 너희들은 서로 죽이게 될 거야! 이곳에 있는 팀은 대략 60명이니 음… 그냥 간단명료하게 30명만 남길 때까지 죽여.”

“……!”

그의 발언에 플레이어들은 숨을 삼켰다.

“아, 맞다. 죽이기만 하면 재미없지? 각 개인마다 전투력을 수치화한 점수가 있는데, 그 점수를 최대한 많이 얻은 팀은 선물도 줄 테니까. 이걸 참고하라고!”

악동의 외침과 동시에 허공 위로 점수판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최하위의 점수는 172점.

그리고 최상위는…

[1등 신한별: ???]

[2등 황결: ???]

[3등 피오레: ???]

물음표로 떠 있었다.

그 표를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자, 악동은 흥겹게 말을 덧붙였다.

“아! 인간들의 말로는 뭐였지? 갸챠? 뭐! 어때, 아무도 모르는 랜덤 뽑기도 괜찮잖아!”

악동의 이야기에 플레이어들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훤히 드러났다.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나는 피식 웃으며 악동의 앞으로 걸어갔다.

“흠? 분명 움직임을 허락하진 않았을 텐데?”

다들 움직이고 싶어도 못 움직이는 채 딱딱하게 굳어있는데, 나 혼자만 멀쩡히 움직이자 악동은 의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도 잠시.

악동은 흥미로운 얼굴로 내게 손을 뻗어왔다.

“뭐, 자질구레한 건 상관없으려나. 그래서 네가 이 중에서도 압도적인 1등이었지? 그래, 질문은 뭐지?”

“별 건 아니고, 그냥 죽이기만 하는 서바이벌은 재미없잖아.”

“그 뜻은…?”

의미심장한 내 말에 악동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아주 간단해. 내가 1등이니 서바이벌로 할 것도 없이 남은 놈을 전부 상대할 테니까. 한꺼번에 덤비라고 해.”

“호오… 너 지금 보니까. 제정신도 아니었네.”

“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대신 빡센 만큼 그만큼의 보상도 해야 하지 않겠어?”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나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놈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눴다.

“이기면 보상으로 네가 가진 권한을 나한테 넘겨.”

그 누구도 수습할 수 없는 폭탄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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