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21화 (21/175)

제21화

〈7-9층의 보상이 집계되었습니다,〉

〈보상의 순위는 상위권입니다.〉

“어?”

나는 시야 위에 생겨난 문구를 보고는 움찔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보상의 등장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내 손은 빠르게 움직여 콜라의 병뚜껑을 개봉했다.

취이이익-!

뚜껑을 열자마자 병에서 탄산이 나가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기포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나는 곧바로 콜라를 입에 가져다 대며 보상을 확인했다.

꿀꺽꿀꺽.

탄산의 짜릿함이 목을 시원하게 긁으며 내려간다. 이어지는 콜라의 단맛이 구미를 자극했다.

“캬! 이 맛이지.”

입에서 시원한 콜라병을 떼며 감탄을 토했다.

기다렸던 기대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집계된 보상이 정산됩니다.〉

그 문장을 끝으로 강렬한 섬광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언뜻 보기엔 신성해 보이기까지 한 광경.

한껏 오른 기대감을 품고 바라본 장소에는 한 장의 종이와 금속 물체가 떨어져 있었다.

“이건 뭐야?”

보상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금속 물체를 집었다.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간단했다.

그도 그럴 게 나한테 지급된 보상의 정체는 내 몸과 거의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반지.

아니, 솔직히 말해서 워낙 크기가 크다 보니 저게 반지인지 팔찌인지 도저히 구별이 되지 않았다.

멍하니 원형 물체를 바라보던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게 보상이라고?’

그것도 뼈 빠지라 고생한 보상이 이거란다.

복잡한 심경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차라리 나만 모르는 몰래카메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지경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거추장스럽긴 해도 일단은 받고 봐야지.

복잡한 얼굴로 원형 물체를 손에 쥔 그 순간이었다.

내 손 안에 들어온 원형 물체는 황금빛 빛을 발하며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줄어들던 물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에 딱 맞는 반지가 되었다.

〈자이언트 종족의 반지(B+)〉

자이언트 종족?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집안이 풍비박산 난 고대의 거인들이 고안해낸 반지다.〉

〈힘이 너무 넘쳐서 주체를 못하는 당신! 그런 당신에게 적극 추천!〉

* 정력에도 적용되니 주의 바람!

“나참 정력은 무슨….”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눈을 흘겼다.

기껏 고생한 보상이라기엔 아니꼬운 점은 있었지만.

마지막에 쓰인 문구를 제외한다면 지금의 나한테 있어 꼭 필요했던 물건이었다.

확실히 아티팩트의 효과 덕분인지 몸을 과감하게 움직여도 별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전에는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도 폭풍이 일어났으며, 뜀박질만으로도 수십 미터에 달하는 상공에 뛰어올라서 곤란했었는데.

이 효과라면 상시 집중력을 유지하지 않아도 그토록 원하던 평범한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게다가 저층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사이에서 의심을 사지 않고 무난하게 들어갈 수 있겠지.

아티팩트의 효과로 인해 상당히 힘이 축소되긴 했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뭐. 성의를 생각해서 일단 넣어둘까.”

그리고 남은 보상은…

“싸인?”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주워든 나는 안에 쓰인 내용을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된 모양인지 몰라도 종이에는 유려하게 써진 싸인 하나가 있었다.

적어도 6층에서 9층을 클리어한 보상을 이런 종이 쪼가리 한 장으로 퉁 칠 리는 없을 터.

종이를 양옆으로 펼치자,

퍼엉!

과장스러운 폭발음과 동시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뜬금없는 굉음에 욕실 안에 있던 둘리가 호들갑스럽게 뛰어나왔다.

“한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피해라!”

“이 좁은 방에서 피하긴 어디로 피해. 유난 떨지 말고 몸이나 닦아.”

나는 둘리의 날개를 붙잡고는 그대로 욕실에 도로 집어 던졌다

너무 강한 힘으로 던졌는지 욕실의 벽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괜히 난동을 부리는 것보단 훨씬 나으리라.

둘리를 뒤로 하고 나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종이를 직시했다.

연기는 다채롭게 형태를 변해가기 시작하다니, 이내 ‘무언가’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구름 속에서부터 깔끔한 연미복이 어울리는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횩시나 싶어 구름 속에 손을 뻗고 휘저었지만, 실체가 없는 모양인지 내 손은 간단하리만치 남자의 몸을 관통했다.

쉽게 비유하자면 일종의 홀로그램.

“그것도 이미 녹화한 걸 미리 보여주는 방식인 건가?”

나는 간단한 질의응답과 상황을 통해 판단을 내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쯤. 중년의 남성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몸을 정돈하며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우연인가 보네.”

나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남자는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렸을 뿐이지, 정작 동공은 딴 곳을 향해 보고 있었다.

추측하건대 아마 이 영상을 녹음할 때 바라봤던 카메라겠지.

제자리에서 넥타이를 정리한 남자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우선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는 베가 님의 종자인 클라우드라고 합니다.”

“베가?”

그건 또 뭐 하는 놈이야.

탑에 들어오기 전부터 온갖 정보를 습득했던 나조차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커뮤니티에 검색해봤지만, 아쉽게도 그 이름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 뜻은 적어도 플레이어들에게 흔히 알려진 이름은 아니라는 것.

하긴 딱 들어봐도 중2병이라도 걸릴 거마냥 x나 대단해 보이는 네이밍인데 별 볼 일 없는 놈은 아니겠지.

그런 예상이 적중하듯 남자는 엄숙한 분위기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이렇게 나타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을 탑이 이 땅에 세워진 이래로 가장 창대한 연회에 초대하기 위함입니다.”

“창대는 개뿔.”

지랄도 병이라니까.

누군 등반하기도 바쁜데, 누군 그놈의 연회나 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탑 안에는 정신 나간 놈밖에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종이를 뒤로 엎으려던 그때였다.

내 귀를 의심케 하는 이야기가 이어진 것은.

“이날에는 특별히 탑의 관리자님께서 특별 게스트로 방문하신다고 하시니 많은 참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이어진 말에 제자리에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뭐라고…?”

특별 게스트로 누가 참가한다고?

귀머거리도 아니고 잘못 들었을 리는 없다.

초대장을 가지고 연회에 참여하면 탑의 관리자, 그러니까 나를 천 년이나 가까운 세월 동안 튜토리얼에 가둔 새끼를 볼 수 있다.

연회에 참여할 이유는 그거만으로도 차고 넘었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고 있자, 영상 속 남자는 시계를 가리켰다.

“연회의 날은 초대장을 받은 날로부터 정확히 두 달 뒤, 초대장을 몸에 지니고 계시면 저희가 직접 그쪽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됐으니, 두 달 뒤에 여러분들을 뵙겠습니다.”

남자의 형상을 띄운 구름을 그 말을 끝으로 흩어져 소멸했다.

나는 달랑 하나만 남은 초대장을 주우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단 두 달.”

두 달이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남은 기간에 탑을 최대한 빨리 등반해 얻을 수 있는 기연과 힘을 습득한다.

당연히 목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에선가는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빌어먹을 탑의 관리자라는 작자들.

이로써 내가 걸어야 할 첫 번째 목표는 명확해졌다.

현재로서 탑의 진행률은 총 36층.

커뮤니티를 통해 종종 36층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최선전에서 활약하는 랭커들마저도 애를 먹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빌어먹을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연회가 열리기 전에 36층을 클리어하는 건 기본이겠지.”

혹자라면 이제 10층에 온 나부랭이가 건방지기 짝이 없다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탑을 등반했던 속도와 난이도를 전부 염두 해서 내린 판단이었다.

그걸 쉽게 풀이하자면,

‘그깟 탑 별것도 아니지.’

그리됐으니 앞으로는 바빠지겠네.

나는 직접 쟁취해내서 얻은 콜라를 한꺼번에 들이켜며 입에 담았다.

“필요하다면 직접 증명해내면 될 뿐이지.”

처음에 탑에 들어왔을 적의 초심을 말이다.

* * *

피이이잇!

언제나 그렇듯 플로어를 이동할 때에는 환한 섬광이 눈앞을 물들였다.

탑에 대해서 다른 건 불만이 없는데 그런 건 고쳐줬으면 좋겠다.

층을 이동할 때마다 섬광이 시야를 가렸다간 나중에 괴수가 습격하면 영락없이 당하는 꼴이 되잖아.

물론 탑이 그걸 고려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진 않겠지만.

빛이 가시자, 탑의 설명이 적힌 창이 시야에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11층에 들어가기 전의 대기 장소로 다른 플레이어들과 교류가 가능한 구역입니다.〉

〈11층으로 가기 위한 인원을 매칭 중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괴수가 출몰하지 않습니다.〉

나는 느긋하게 허공에 뜬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내가 탑에 들어오기 전까지 지구에서 알고 있었던 지식과는 변함이 없었다.

1층에서 10층까지는 전부 개인층으로 진행되었다면, 11층부터 20층까지는 단체층.

단체층에서는 나뿐만이 아니라 탑을 등반하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함께 경쟁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개인의 실수로 탑에서 죽게 되었다면 이젠 같이 탑을 등반하는 가족, 친구 혹은 동료가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다.

불순하기 짝이 없는 탑의 의도가 훤히 보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떨어질 건 내가 아니니까.”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원래 세상은 약육강식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약한 자는 도태되고 강한 자들이 살아남는다.

그게 탑이라는 세계의 전부였다. 이를 부정해봤자 달라질 것은 어느 하나도 없으니까.

나는 잡념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둘러보자 광활한 하늘과 더불어 중세와 도시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다만 지구에서처럼 메케한 매연이나 미세먼지는 없었다.

건물이나 공장과 같이 지구의 풍경과 닮았다고 한들 이 플로우 역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탑의 일부분.

그렇기에 환경 오염 같은 현상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지구를 연상케 하는 장관을 본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감동했다.

“윽….”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자그마치 튜토리얼에서 천 년 가까이.

그 기나긴 세월을 정글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장소에서 괴수들하고 구르고 굴렀다. 인간성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야생의 생존.

그렇기에 사람의 발자취는 내게 있어서 크나큰 의미였다.

한참 동안 입가를 가리고 형용치 못할 감동에 벅차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검은 인영이 내 뒤로 드리웠다.

“크헤헤헤헤헤! 뭐야? 그쪽의 형씨, 이제 막 탑에 들어온 신입인가 봐? 그런데 어쩐담, 여길 왔으면 통행료를 내야지. 왜, 그냥 지나가려고 했어?”

“…….”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한 손에는 단검을 쥔 금발 태닝 양아치가 껄렁거리는 자세로 서 있었다.

전형적인 양아치의 표본이다.

“복장을 보니까. 꽤나 좋은 보상을 얻었나 봐? 뭐 그건 됐고, 좋은 말 할 때 돈 되는 건 여기에 전부 두고 가.”

그는 날붙이를 손에서 흔드는가 싶더니, 빠른 속도로 다가와 내 목을 겨냥했다.

‘오.’

제법 괜찮은 움직임인데?

놈은 내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움직임 따윈 훤히 보였다.

어차피 11층에 가기 전까지 시간도 조금 남았겠다.

심심한데 대충 역할극에 어울려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적당히 대꾸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어디에선가 날아온 밧줄이 금발 태닝 양아치의 손목을 휘감고는 재빠르게 단검을 낚아챘다.

적어도 10층 대에선 볼 수 없는 속도와 무기의 숙련도.

그 증거로 한순간에 제압당한 금발 태닝 녀석도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자, 이쪽을 향해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기척이나 몸무게, 신장 등의 신체 조건을 생각하면 여성이려나.

그래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거기… 누구신지는 모르겠는데 괜찮나요?”

오랜 기억 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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