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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20화 (20/175)

제20화

싱긋 웃으며 건넨 말에 장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쪽을 향했다.

[거, 거짓말이라니….]

“인간이 거짓말하는 걸 처음 본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렇게 유난이야.”

[설마… 그 당시에 눈동자에 강렬하게 서려 있던 원한과 독기가 전부 거… 거짓말이라고? 하… 지만 분명히 그건 진심이었….]

자신의 기억과 감정마저도 속이는 거짓말에 그는 경악하며 말을 더듬었다.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장로는 몸을 경련하며 이쪽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설령 그게 진심이었다고 한들 지금 이 상황이 달라질 것도 없잖아.”

그래서 뭐?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면 어떡할 건데.

냉혹하기 짝이 없는 내 어조에 놈은 여운이 남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자네의 말대로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미 벌어진 일이지.]

놈의 말대로 그게 전부다.

쿠웅!

장로가 손을 휘두르자, 몇 초 채도 지나지 않아 절단된 팔뚝의 출혈이 멎어 들었다.

경이롭기까지 한 재생 속도.

하지만 완전한 의미에서의 재생은 아니었는지 절단된 부위로부터 뼈와 근육이 돋아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도마뱀처럼 꼬리가 잘리면 다시 생겨나거나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봐?”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구나.]

어지간해도 감정을 내비치지 않던 장로는 자신을 도마뱀에 비유한 것이 퍽이나 치욕스러웠던 모양인지 역정을 일으켰다.

가공할만한 기운이 공기를 따끔하게 찔러왔다.

확실히 다른 와이번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다.

“적어도 폼으로 장로는 아니란 말인가.”

하긴 와이번을 기준으로 수백 년이나 묵은 고룡인데 그런 어쭙잖은 것들과 비교하면 섭섭하겠지.

허나.

“새꺄, 나이를 먹어도 내가 더 많이 먹었어.”

쿠쿠궁⎯

내가 본격적으로 힘을 방출하자, 놈의 기운과 맞붙으며 지면이 붕괴했다.

정면으로 걸어 나갈수록 놈의 영역은 점점 좁혀졌다.

이윽고 놈의 코앞까지 도달한 나는 검을 빼어 들었다.

[다른 와이번도 아닌 바로 이 몸이 인간에게 질 법 싶으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장로는 고함을 외치며 양손을 치켜들었다.

고룡 못지않은 권능이 하늘 위로 치솟더니 수백, 수천 개의 마법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확실히 놀랄만한 광경이었으나, 나는 한쪽 팔을 앞으로 뻗어 겨냥한 뒤에 나머지 손에 든 검을 힘껏 던졌다.

눈으로도 따라잡기 버거울 속도로 쇄도한 검은 장로의 목을 꿰뚫고 한가운데에 박혔다.

너무나도 빠른 탓에 마치 검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한 상황에 장로는 피를 울컥 토했다.

[도, 도대체 어떻게….]

“뭐긴 뭐야. 마법이지. 검을 상대의 목에 소환시키는 마법이랄까.”

마법이란 거 그렇게 어렵진 않네.

장난스러운 내 말투에 장로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쿨럭! 감히 누구 앞에서 기만질을 부리더냐!]

“아, 마법이 아니라는 건 들켰나. 근데 다 죽어가는 놈이 할 말은 아니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손날을 휘둘러 놈의 날개를 베어냈다.

잇따른 중상으로 인해 핏줄기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다른 와이번이었다면 목숨을 잃기에는 충분한 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죽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네, 네 이놈… 내가 여기에서 끝날 법 싶더냐!]

목의 한가운데가 큰 구멍이 뚫리며 공기 빠진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이대로 자폭이라도 할 속셈인지 장로의 몸은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러 올랐다.

놈은 괴기한 웃음소리를 내며 폭소했다.

[흐흐흐, 저승길은 혼자 갈 수 없지. 적어도 네놈 하나는 같이 끌고 가마.]

“그래? 그런데 하나 까먹은 거 같아서 알려주는데, 뭐 하나 빼먹은 건 없어?”

[지금 와서 말을 돌리려는 속셈이라면 소용없다. 이미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놈이 악랄한 미소를 짓던 그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겁을 상실했나 보군.]

거미줄처럼 쏟아져나온 그물이 장로의 몸뚱어리를 옭아매더니 몸에 닿은 부위가 검은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변에 장로는 검은 낯빛으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닿은 곳에는 수호용이 제자리에서 후광을 뿜어내며 서 있었다.

곁으로 보기에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거 같이 보였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잘 꾸며낸 연기라는 것을.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냐고 있는 건가.’

비쩍 말라비틀어진 걸레를 유압프레스를 사용해 짜내듯.

수호용은 자신의 한계와 싸우고 있었다.

물론 지구에서 다년간 거짓과 연기에 출중났던 내 눈썰미였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거지, 이 사실을 알 턱 없는 장로는 시퍼런 안색이 되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분명 다 죽어가고 있었을 텐데….]

[과거의 잔재가 너무 날뛰었군. 흐르지 않고 고인물은 결국엔 썩기 마련이지.]

[시끄럽다! 네놈만… 네놈만 아니었다면…!]

[내가 아니었다면 네놈의 허망된 욕심을 채울 수 있었을 거라고? 적반하장도 유분수군. 그 시건방짐도 여기까지다.]

장로의 몸을 봉쇄한 그물에서 강렬한 빛이 솟구치자, 놈은 점점 시꺼먼 재가 되었다.

반항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도 소용없었다.

[네 이놈! 수호용 네놈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반드시 내가⎯!]

처절한 고함을 끝으로 장로는 재가 되어 소멸했다.

수백 년이나 묵은 고룡의 마무리치곤 썩 보기 좋지만은 않은 결말이었다.

[과한 욕심은 재앙을 불어일으키기에는 충분하지. 이게 선택할 수 있는 차선이니 너무 괘념치 말거라.]

“그 의견에 대해선 나도 동감이니 걱정하지 마.”

[호오, 인간치고는 특이하군.]

“그야….”

인격이 담긴 생명체의 추함이라면 이미 지구에서 밑바닥까지 보고 왔거든.

나는 적당히 뒷말을 집어삼키며 수호용을 마주 봤다.

역시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과하게 쥐어 짜낸 탓인지 육체의 말단 부위로부터 붕괴되었다.

수호용은 붕괴하는 자신의 육체를 보며 아련하게 말했다.

[권능을 사용해서 끝없는 삶을 사는 나라고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부활하기까지 수백 년…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아득한 세월이 걸릴지 모르겠군.]

“…….”

[뭐, 오히려 상쾌하다네. 세상이라는 지옥은 지겨울 정도로 맛봤으니 당분간 쉬어야지.]

수호용은 하늘을, 대지를 바라보곤 이내 시선을 나를 향해 돌렸다.

[분명… 플레이어들이라는 자들은 탑을 오른다고 했었던가? 그래,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자네도 어서 삶의 목적을 찾았으면 좋겠네. 자네를 보고 있자면 마치 과거의 나를 투영하는 기분이 들거든.]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가루가 되어 바람과 함께 홀연히 떠났다.

〈9층을 클리어합니다.〉

<8층을 숨겨진 방식으로 클리어 하였습니다.>

〈7, 8, 9층의 클리어 보상을 집계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층을 클리어했음을 알리는 시스템 창이 눈앞으로 나타나며 태엽 시계가 제자리에서 멈췄다.

7층에서 9층까지의 기나긴 여정은 여기에서 마무리를 맞이했다.

〈10층으로 이동합니다.〉

* * *

〈10층은 휴게 공간입니다.〉

〈휴게 공간은 플레이어님의 업적을 기반으로 구성이 됩니다.〉

〈1시간 29분 뒤에 11층으로 전이됩니다.>

이젠 익숙하기까지 한 섬광과 함께 눈을 뜨자,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방안이 눈에 드리웠다.

5층에서 이미 겪었는데 놀랄 게 뭐가 있냐고 혹자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었으나.

“방이 더 커졌어?”

나는 감격에 벅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번엔 7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었다면 방안에 누워서 몸을 뒹굴어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평수가 넓어졌다.

게다가 방 안의 가구 또한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꽉꽉 채워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제칠 정도로 놀란 점은 바로.

“휴게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3배나 더 많아졌잖아.”

다른 것보다도 그 점에 있어서 나는 경악을 내질렀다.

커뮤니티에는 각층에 대한 이야기나 잡담뿐만 아니라, 자신의 휴게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나오곤 했다.

보통 그때 나오는 주제는 항상…

- 탑 개같은 새끼들, 내가 얼마나 개같이 노력했는데 겨우 13분 밖에 안 된다고?

⤷ 오… 잘 나왔네

⤷ 오는 무슨 오야 ㅅㅂ아. 가정교육을 0으로 했길래 오냐.

⤷ 가정교육 공백론ㅋㅋㅋㅋㅋㅋㅋㅋ

⤷ 근데 확실히 활약에 비해서 짜긴 함.

⤷ 최근에 최상위권에 있던 랭커도 겨우 35분 밖에 안 줬다고 하던데

- 나도 5분만 더 달라고!! 다 못 씻어서 옷 안 입은 채로 거리에 갔다고ㅠㅜ

⤷ 탑: 안 돼, 돌아가

⤷ 누드 축제 지대로 하고 오셨네ㅇㅇ;;

반응을 보면 이렇듯 다른 플레이어들은 휴게 시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봐야 10분 남짓

각층에서 심심칞은 활약을 선보인 랭커들도 평균 30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파격적인 점인지 알 수 있었다.

탑으로부터 이런 특별 취급을 이유는 간단했다.

‘휴게 공간은 내 업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던가.’

나는 시스템창을 힐끔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만큼 6층~9층까지의 내 활약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하면 압도적이었다는 뜻이었다.

하긴 개나 소나 쉽게 깰 수 있는 층에서 그런 개고생을 시켜놓고 이제 와서 모른다는 듯이 입을 싹 씻으면 곤란하지.

그나저나.

나는 꽤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도 여전히 집계 중이라는 시스템창을 보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 휴게 공간이 이 정도면. 대체 보상은 얼마나 좆되는 걸 주려고 하길래 이렇게 사람 애를 태우는 거야.”

지금까지를 생각하면 탑은 보상이 있을 때는 지체하는 것 없이 곧바로 지급하곤 했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

보상 집계에 있어서 이렇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내놓으라고 한다고 탑에서 내놓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됐으니, 보상이 집계되기 전까지 나도 좆되는 리액션이나 연습하고 있어야지.

근데 그것보다도 하나 우선시 해야할 게 있다면.

나는 재빨리 손을 움직여 검은 인영을 낚아챘다.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어딜 침대 위에 가려고?”

“한별! 놔라, 귀가 아프다!”

낚아챈 손아귀 안에는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둘리가 있었다.

딴 곳에 정신 팔린 틈을 타 멋대로 행동할 생각이었겠지만, 내 앞에선 소용없다.

나는 적당히 훈계를 한 뒤에 둘리를 화장실에 던졌다.

벽에 부딪히면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뭐 큰 문제는 없겠지.

“그것보다도 아직 못 한 게 있으니까. 그거부터 해볼까.”

꿀꺽.

나는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냉장고의 앞에 다가섰다.

5층에선 결국 맛보지 못한 탐욕의 과실.

과연 아직까지도 들어있을까.

혹시라도 펩X라는 브랜드가 들어있지 않길 기도하며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영화의 한장면처럼 냉장고의 안에는 새하얀 연기와 함께 차디찬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그렇지! 믿고 있었다고!!!”

나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냉장고에 들어있는 코X콜X를 꺼내들었다.

아직 개봉 전의 시원한 과실.

이건 참을 수 없다.

빠르게 결단을 내리고 X카X라의 병뚜껑을 따려는 그때였다.

〈7-9층의 보상이 집계되었습니다.〉

〈보상의 순위는 상위권입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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