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9화 (19/175)

제19화

〈태엽 시계가 빠르게 흘러갑니다.〉

소환 의식을 끝으로 제단에서 플레이어가 등장하는 장면부터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순식간에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뜬다.

그걸 몇 번이고 반복하길 잠시.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거처럼 시간이 멈추고는 다시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기고 있던 나는 눈가를 찌푸렸다.

“9층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건가.”

권능을 통해 수호용의 기억을 접한 나는 호기롭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으나, 예상대로 시간 축은 수호용의 중심으로 흘러간다.

[귀인이시여 당신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전에 내가 들었던 것과 똑같은 대사가 흘러나왔다.

허나 내가 그 얘기를 들은 대상이 일반 와이번이었다면.

과거에는 모든 와이번이 숭배하는 수호용이 의식장에서 직접 말을 건넸다.

의식하지 않으면 그냥 넘기고도 남을 정도로 미약한 차이.

“그래? 그럼 어서 내놔. 빨리 해치우고 다음 층에 가야 하니까.”

수호용의 말에 그 앞에 선 플레이어들의 일행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대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플레이어들한테는 임무의 내용보다도 탑을 등반하는 게 최우선적인 목표일 테니까.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으나 수호용 역시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저들을 귀인이라고 부르며 존대하는 이유도 단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관습 때문이다.

신이 와이번에게 살 수 있는 대지를 내려주는 대신에 그들은 맡겨진 임무를 수행한다.

그 이상의 의미도 찾아볼 수 없는, 단지 그뿐인 이야기였다.

플레이어들이 임무를 해결하면 사라지고 그들은 일상을 영위한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반복.

그랬을 터였으나.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 뒤였다.

“여기가 너희 와이번들의 둥지라고? 오 그럴듯한데?”

[귀인님 여기엔 들어오시면 아니 됩니다.]

“들어오면 안 된다고? 그럼 여기에 들어오면 임무가 사라지거나 우리가 다음 층으로 못 올라가기라도 하나 봐?”

[그, 그건 아니지만….]

“그게 아니면 됐지. 처음부터 아니꼬웠단 말이지. 너희 와이번들이 우릴 귀인이라고 존대하면서 막상 의식주를 지원해주지 않는 것이.”

언제부터일까.

옛날까지만 해도 곧이곧대로 말을 들어주었던 플레이어들은 한가지, 두 가지씩 요구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편의를.

그들의 욕심을.

심지어는 인간의 욕망까지도.

“우리들이 너희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데 그냥 무보수로 시킬 생각은 아니겠지? 그래도 가는 게 있으면 공평하게 오는 것도 있어야지?”

처음에는 사소한 것부터더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 규모는 점점 커지게 되기 마련이다.

어느새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대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찌푸리는 와이번들도 있었다면.

반대로 이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와이번 또한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수호용은 그 어느 쪽도 아닌 방관하는 입장이었지.’

흔히 속된 말로 부르길 중립 기어.

“그 뒤는 굳이 안 봐도 뻔하지.”

“한별! 뻔하다니 뭐가 뻔하단 거지?”

“원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마련이거든. 화장실에 갈 때와 다녀와서의 심정이 다른 게 인간의 본성이지.”

“그런가? 인간은 화장실에서 많은 게 변하나 보다!”

“뭐, 대충 그런 셈이지. 알아들었으면 됐어.”

가령 예를 들자면 나처럼이랄까?

하나를 주면 나머지 남은 하나도 탐내는 게 인간의 욕심.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상황은 마치 누가 조종이라도 한 듯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물론 이에 대해 와이번 사이에서도 의견 차이는 분분했다.

[언제까지 인간들의 말을 들을 셈이지! 고귀한 용의 피가 섞인 우리가 인간의 명령을 듣다니 이건 어불성설이다!]

[허,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진 관습을 포기할 셈인가?]

[그렇다면 너희들은 인간들의 개로 전락하겠다는 뜻인가 보지.]

의견 차이는 좁혀질지 모르고 갈등은 심화되었다.

결과, 와이번들의 세력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수호용은 중립 기어를 박은 채,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빠른 속도로 굴러가는 태엽 시계를 보며 혀를 찼다.

“그래, 갈등이 생기면 섣불리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보다도 중립을 유지하는 건 좋지. 근데 말이야. 자기 집이 불타는데도 중립 기어를 박고 있으면 그건 현명한 게 아니라 멍청한거야.”

“그런가?”

“그래, 그런 법이지.”

나는 무신경하게 세상의 이치를 입에 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파벌 간의 전쟁은 팽팽하게 심화되었다.

그래도 같은 종족이니 적당히 끝날 거라는 당초의 예상을 깨고 상황은 달라졌다.

온건파에 플레이어들이 협력하게 되면서 전황은 한순간에 뒤바뀌게 되었고.

“낄낄낄, 이게 그 잘나신 용족의 가죽인가 봐? 확실히 굴러다니는 짐승들의 것보단 훨씬 좋구만.”

욕심에 눈이 먼 인간들은 사냥한 와이번의 가죽을 벗겨 아티팩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동족 학살의 현장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로 온건파는 권력을 자리매김할 수 있으며,

플레이어들은 욕망을 채울 수 있다.

기나긴 시간이 흘러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그들의 목표는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었다.

“온건파들이 확실하게 자리를 매기기 위해선 걸림돌이 남아있지.”

그것은 바로 와이번의 왕인 수호용.

절대 권력을 지닌 놈을 처치해야지만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결심은 마친 그들은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허나 한가지 간과하지 못할 점이 있다면 수호용은 권능을 통해 무한히 되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와이번들한테는 자신의 목을 언제 옥죄일지 모르는 위험이겠지만, 그걸 플레이어들이 놓칠 리가 없지.”

“한별 이해가 잘 안 된다! 그게 무슨 뜻이지.”

“그야 뻔하잖아.”

나는 불쾌한 진실을 나직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최상급에 해당하는 가죽과 뼈를 취해도 다시 구할 수 있는 일종의 공장.

엄청난 피와 죽음을 되풀이한 끝에 플레이어는 수호용을 가둘 수 있는 올가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나 또한 그곳을 지나친 경험이 있었다.

“7층에 있었던 거대한 탑,”

수호용은 수십, 아니 수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거기에 갇혀 있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가죽과 뼈를 취할 수 있는 공장으로써.

녀석이 거기에서 풀려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내가 7층에서 놈을 죽이는 동시에 탑의 일부를 부숴버리면서였던가.”

x부럴 이런 우연도 없겠네.

당시에는 힘 조절을 실패한 탓이었는데, 그걸로 수호용의 목을 평생 옥죄이던 감옥을 타파했었을 줄이야.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펼쳐진 수호용의 인생.

수호용의 일생을 담아낸 시곗바늘은 빠르게 흘러가다가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완전히 정지한 시간, 내 앞에는 붕괴한 제단 앞에서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는 수호용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화르르 타오르는 복수심만이 보일 뿐이었다.

〈태엽 시계가 정지합니다.〉

〈과거로 회귀합니다.〉

* * *

참으로 웃기지.

욕망이 불러일으킨 파멸의 끝이 이거라니.

나는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는 수호용을 바라보며 이맛살을 구겼다.

과거 회상을 끝으로 나와 둘리는 8층이 끝나기 바로 직전으로 회귀했다.

더 자세하기 말하자면 수호용이 죽기 바로 직전.

과거를 보며 확신했다. 이전 8층에서 오류가 난 이유는 수호용을 죽여서가 아니었다.

더 정확한 트러블의 원인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손을 휘둘러 주변에 자욱하게 깔린 흙먼지를 걷어냈다.

먼지를 걷어내자, 멀리서부터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장로가 보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장로는 수호용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입꼬리를 짜악 늘어뜨렸다.

[하하하, 귀인이시여! 저는 당신이 해내시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수백 미터를 활공해 내 앞까지 도달한 장로는 가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의 죽음으로 세계는 평화를 되찾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활약해주신 귀인님의 손을 함부러 빌릴 순 없겠지요. 이 간악한 자의 처리는 제가 도맡겠습니다.]

“그래?”

[물론입니다. 그것이 제가 할 도리지요.]

언뜻 보기엔 성인군자와 같이 인자한 말투.

와이번과 관련해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옛날이었다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그 도리라는 건 엿이랑 같이 싸 잡숴.”

기왕이면 먹다가 얹히면 나야 환영이고.

나는 손날을 휘둘러 수호용에게 뻗는 장로의 팔을 절단했다.

촤아악!

[어…?]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난 상황에 장로는 손목이 날아간 지도 모른 채 벙찐 얼굴을 지었다.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손모가지 날아가고 싶어서 환장했나.”

아 참 벌써 날아갔지.

손목이 ‘있었던’ 자리에서 새빨간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지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장로는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너 같은 놈도 고통을 느끼나 봐?”

[어, 어째서… 배신을….]

배신이라.

좋은 어감이네.

“강경파의 대가리로서 가장 먼저 플레이어들과 손을 잡고 종족의 배신을 때린 놈이 할 말인가.”

트러블의 원흉은 바로 저놈이었다. 저 장로란 놈이 플레이어에게 붙지만 않았어도 이 트러블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다 그런 방법이 있어.”

큰 코 다치니까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예상치도 못한 내 돌발 행동에 장로는 눈을 찡그리며 숨을 헐떡였다.

[분명… 수호용 저놈한테 원한이 있다고 말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도 나눴었지.

장로한테는 기껏 해봤자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겠지만, 나한테는 꽤나 오래 전의 일.

예전이었다면 대화의 흐름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적당한 거짓말을 둘러댔겠지만, 이젠 그럴 이유는 없다.

나는 손에 묻은 피를 바닥에 흩뿌리곤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거? 거짓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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