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7화 (17/175)

제17화

나는 놈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단순히 반가워서 인사를 했을 뿐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수호용은 떨리는 동공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얼마 가지 않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설마 한 번 죽은 거 가지고 아직까지 미련을 두고 있는 건가?’

용족의 피가 섞인 놈이 쪼잔하긴.

하긴 놈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원래 가해자는 몰라도 피해자는 기억하기 마련이니.

과거의 일은 안타깝게 됐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내 앞을 가로막는 적이 존재하고.

적의 수장이 앞에 있다.

“그뿐인 이야기야.”

누누이 말하자면 과거의 원한은 없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지면을 박차고 놈을 향해 쇄도했다.

몇몇 괴수들이 내 움직임을 막기 위해 정면을 가로막았으나, 그래 봤자였다.

충돌한 괴수들은 1분은커녕 10초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나를 상대하기 위해선 만반의 준비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일전의 전투로 기력이 빠졌을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떨거지들을 추풍낙엽으로 처리하곤 괴수의 앞에 도달한 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지금까지 괴수를 상대했을 때와 비슷한 위력.

허나.

놀랍게도 그 결과는 전과는 달랐다.

파지지직!

주먹은 무형의 기운에 의해 공중에서 멈춰 섰다.

막강한 에너지가 허공에서 맞부딪치더니 불사르기가 화르르 피어오르며 폭풍이 일어났다.

폭풍에 의해 어중간한 힘을 지닌 와이번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날아갔다.

[이걸로 불청객은 전부 갔나.]

그 상황을 일으킨 장본인, 수호용은 괘념치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놀랄 땐 언제고 금방 포커페이스를 되찾은 놈은 옅은 웃음기를 입가에 띄웠다.

[후후, 많이 놀랐나 보지.]

수호용은 눈가를 가늘게 떴다.

일순 기류가 달라졌다.

일전에 상대했을 때보다도 더 강렬한 기운.

저번이 반딧불이의 불빛이었다면 지금은 가로등의 광량과 맞먹을 만한 힘 차이였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서 있자, 놈은 내가 그걸 보고 경계한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충분히 놀랄 만도 하겠지. 네놈도 알다시피 나는 끝도 없이 부활하는 권능을 지녔지. 그땐 부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력이 아니었다만 지금은 다를 게다. 그러니 괜한 저항 말고 포기하는 게….]

“아씨, 안 그래도 귀 아픈데 용가리 새끼가 왜 이렇게 쫑알쫑알 말이 많아? 보통 싸우기 전에 낭설이 길어지면 쫄려서 그런 거라던데 너도 부류인가 봐?”

그렇게 자신 있다면 말로 하지 말고 직접 덤벼라.

행동으로 증명해보라는 말에 놈은 불쾌한 안색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렇게 빨리 뒈지길 원한다면 바라는 대로 해주지.]

수호용이 손을 휘두르자 수십, 수백 개를 훌쩍 뛰어넘는 핏줄기가 하늘을 채웠다.

빈 공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채운 핏줄기.

가히 위협적인 광경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와이번의 장로는 새하얘진 안색으로 경고했다.

[피, 피하십시오! 저걸 몸으로 받아내면 뼈도 못 추릴 겁니다!]

같은 와이번으로서 저것의 위험성을 뻔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건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 나도 알아. 딱 봐도 위험해 보이네.”

그의 외침에 나는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누가 봐도 떡하니 위험한 일격이라고 선언하는데 말만 하면 입만 아프지.

“네 말대로 피하는 건 문제없는데, 그러면 저놈이 저걸 쓸 때마다 피하기 바쁘면 언제 쓰러뜨리려고?”

[예…?]

내 의문에 장로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대꾸를 하고픈 얼굴이었으나 녀석은 얼마 가지 않아 입을 닫고 단념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내가 보여준 행적을 떠올리고 수긍한 듯 보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것처럼 입 아프게 백번 말하는 것보단 한 번 보여준 게 낫다.

나는 지면에 질질 끌고 다니던 검을 들어 올렸다.

육중한 무게가 실리며, 발이 닿은 땅이 움푹 들어갔다.

적당한 무게감에 나는 싱긋 웃으며 상대를 흘낏 쳐다봤다.

“거기에서 멀뚱히 서서 뭐 해? 자신 있으면 한 번 해봐.”

[어쭙잖은 인간이 말만 많긴.]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 대화를 끝으로 하늘에 부유한 수만 가지의 핏줄기가 운석처럼 쏟아졌다.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가 봤다면 장관이라고 감탄했을지도 몰랐을 광경.

조금은 위기의식이 들지도 모르지만 상관없다.

쿠웅!

나는 오른발을 땅에 박아 지지대로 삼고는 하늘을 향해 검격을 그었다.

검의 끝에서 울려 퍼진 파공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폭풍이 상공으로 향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핏줄기와 그에 대항하는 한줄기의 폭풍.

그 싸움의 결과는 예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콰과과과광!

급속한 속도로 회전하는 폭풍이 핏줄기를 파쇄한다.

한 개에서 열 배로,

열 배에서 백 배, 천 배로… 폭풍은 끝도 한도 안 보이는 속도로 천공을 휩쓸고는 머지않아 본체를 향했다.

가공할만한 위력에 위기감을 느낀 수호용은 뒤늦게 브레스를 뿜어내며 방어했다.

잇따른 격돌로 인해 위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폭풍은 브레스와 맞붙이 치며 손쉽게 무마되었다.

[크하하하! 보았느냐! 이것이 진정한 용족의 힘….]

“용족은 개뿔, 너희가 말한 용족은 맞고 다니는 게 관습이나 보지? 그리고 한낱 와이번들이 무슨 용 타령이야.”

지면을 즈려밟고 놈의 코앞까지 도달한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내 모습에 놈은 우악스러운 발톱을 휘둘렀으나, 발톱은 허공을 허무하게 갈랐다.

놈이 본 것은 내 잔상.

저런 굼뜸 움직임으로 따라잡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네가 전보다도 강해졌단 건 알겠는데.”

아무리 강해져도 등까지 단련할 수 있을까.

나는 심심찮게 중얼거리며 놈의 날개를 양손으로 찢었다.

찢긴 날개로부터 선홍색의 선혈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워낙에 몸뚱어리가 크다 보니 출혈량도 만만치 않았다.

놈은 등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럴 사태를 대비해 검을 척수 깊이 박아놨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없었다.

그 상태에서 손날을 펴 놈의 등을 X자 모양으로 내리그었다.

[크억!]

꽤나 치명상이었는지 수호용은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지면을 향해 추락했다.

육중한 무게가 그대로 바닥에 꼬라 박히자 땅이 갈라지며 지진을 일으켰다.

“후우.”

낙하하기 바로 직전, 발을 굴러 충격을 피한 나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수십에서 수백 톤에 달하는 무게가 쿠션도 없이 그대로 떨어진 탓에 자욱한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렸다.

물론 나한테는 방해도 되지 못했지만, 그 덕에 우리들의 모습은 주변 와이번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을 터.

나는 모래바람을 뚫고 기척이 남아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멈춘 장소에는 산송장이 된 수호용이 쓰러져 있었다.

[쿨럭, 쿨럭!]

강해졌다는 말은 허풍이 아닌 모양인지, 이전이었다면 확실하게 절명했을 만한 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숨이 붙어 있었다.

물론 저 부상으론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큭,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그렇게 당해놓고도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있는 걸 보니 아직 할 만한가 봐.”

[농담도 제법이군. 이 몸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도 고작인데 말이야.]

확실히.

놈의 말대로 저 상태에서 더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력을 끌어내 저항해 봤자, 앞으로 낼 수 있는 힘은 한 번 남짓이겠지.

그 한 번 가지고는 나한테 상처 입히는 것은 물론 흠집 내는 것도 고작이다.

누구보다도 자기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는 놈은 단념한 듯 보였다.

어차피 죽어도 권능으로 인해 부활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들과 비하면 목숨값은 아깝지 않다는 것일 테지.

[걱정 마라. 네놈 따위를 원망은 하지 않으니.]

“다행이네. 죽어도 끝없이 부활하는 몸뚱어리로 귀찮게 굴면 곤란할까 싶었는데 말이야.”

[귀찮게라…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도 오래간만이야. 크하하하! 역시 네놈은 지금까지 나타난 인간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군.]

“인간?”

뜬금없는 그의 발언에 나는 다시 되물었으나 그것에 대해 대답해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그것도 잠시.

수호용은 관심이 동했다는 듯, 와이번의 장로가 있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거 아니다. 그저 그뿐인 이야기니까. 어쩌면 네 녀석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생명체의 욕심과 추악함에 대해서라면⎯.]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수호용은 숨을 거두었다.

여러모로 끝이 거슬리는 결말.

“어차피 뒈질 거면 시원하게 알려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입이 비싸.”

괜히 어그로만 끌고 있어.

마치 사이다도 없이 고구마를 입 한가득 처넣은 듯이 텁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숨을 돌렸다.

놈은 끝까지 알 알려줄 생각이었겠지만.

나는 빙그레 웃으며 놈의 사체를 내려다봤다.

“그래도 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직업: [이터]의 부가 권능으로 대상의 기억과 스탯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네?

권능만 요령껏 사용할 수 있다면 내 앞에선 영원한 비밀 따윈 없다.

‘잘만 쓰면 평생 무덤까지 갖고 가려 했던 흑역사까지 전부 알 수 있는 권능이니까.’

아주 희미한 스탯의 상승과 더불어 수호용의 기억들이 내 머릿속으로 쏟아졌다.

이전에 권능을 사용했던 고블린과는 달리 엄청난 정보량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당황해서 손을 뗄 법도 했지만, 나는 덤덤하게 기억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3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억겁과도 같은 시간 끝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뗐다.

“이게 놈의 기억인가.”

나는 수호용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천천히 정리하며 입을 뗐다.

방금 전에 놈이 내게 한 말.

‘생명체의 욕심과 추악함이라.’

수호용의 기억을 되짚어가 보니 이 탑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새로운 국면들이 보였다.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추악한 과거.

“흠, 이랬단 말이지.”

나는 수호용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악한 과거에 대해 여러모로 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그건 잠시 뒤로 미뤄두자.

지금은 그것보다도 앞서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8층의 결과를 정산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탑의 관리자 중 일각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안합니다.〉

〈신한별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과제가 전부 클리어되지 않았습니다. 해결 방안은 모색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탑의 시스템이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회의의 과반수에 따라 9층의 진행이 결정됩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전과는 달리 복잡한 시스템 창이 시야 위로 떠올랐다.

“그러니까. 탑에서도 판단을 못 내렸다 이거지?”

하긴 8층에서의 클리어 조건은 트러블을 해결하는 것.

그리고 트러블은 와이번 사이의 격돌을 뜻한다.

그 문제의 핵심인 수호용을 죽임으로써 어떻게 보면 트러블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수호용은 권능을 통해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이래서는 트러블을 해결하기보단 뒤로 미룬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오류가 발생한 건가.’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해결한 거나 마찬가지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문제의 씨앗은 남아있는 것이니까.

“얼씨구, 당사자는 뭐라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자기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난리 났네.”

〈회의가 진행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투표 결과가 나왔습니다. 투표는 찬성 3표, 반대 1표, 기권표 1표.〉

〈투표의 결과에 따라 과반수의 의견대로 9층을 진행, 다만 9층의 클리어 과제와 구성이 달라집니다.〉

〈탑이 당신의 행보에 관심을 가집니다.〉

내 행보에 관심이라…

지구에 게이트가 발발하고 나면서부터 누구한테 관심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다.

그런데 나한테 관심을 가진 놈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저것들이라니.

“지랄맞게도 영광이네 영광이야.”

그깟 관심 엿이라도 먹으라지.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을 허공을 향해 중지를 치켜세웠다.

그것을 끝으로 상공에서부터 떨어진 섬광이 내 몸을 에워 싸맸다.

〈서버 최초로 믿기지 않는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업적: 탑의 변혁을 일으킨 자의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9층으로 이동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