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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6화 (16/175)

제16화

촤악!

마치 토마토처럼 터져나간 대가리로부터 새빨간 선혈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생겨난 자욱한 피 웅덩이 주변으로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서로가 복잡하게 얽히고 얽힌 전투였기에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단 한 사람.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와이번의 장로는 입을 쩌억 벌리며 기겁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병사의 머리가 날아가는 게 뭐가 그리 대수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이 문제였다.

물론 와이번의 완력이면 손톱을 휘두르는 것으로 방심한 상대의 머리를 날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와이번의 이야기지.’

아니, 그건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인간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제조건은 어디까지나 방심한 상대에게 날붙이를 휘두르는 것.

손가락을 이용한 풍압으로 상대를 절명시키는 사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설사 와이번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예전에도 본 적은 있었던가.]

장로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며 조용히 주억거렸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거의 잊다시피 하면서 살아왔었지만, 그때의 기억만큼은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언젠가 한 번 만났던 드래곤이 용언의 힘을 사용해 다른 생명체를 즉사시킨 적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드래곤이었기에 가능했던 경우.

상대는 인간이다.

일반적으로는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랬을 터였으나, 눈앞에 있는 사내는 그런 예상을 완벽하게 깨부쉈다.

그러면서 그 사내는 장로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몸 풀지도 않았는데 놀라긴 뭘 놀라.”

그 말을 끝으로 전장을 향해 뛰쳐나가는 사내를 바라보며 장로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플레이어라고 칭하는 사람들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그 시각.

“후우, 도마뱀만도 못한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

나는 쓰러뜨리고 쓰러뜨려도 끝도 한도 없이 나타나는 와이번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 놈을 쓰러뜨렸다고 생각하면 곧이어 다른 놈이 나타난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그 상황의 연속.

진절머리 나는 상황의 앞에서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원래는 이건 안 쓰려고 했는데.”

귀찮은 것보단 훨씬 낫다.

나는 삼두에 힘을 준 상태에서 검을 우악스럽게 휘둘렀다.

상당한 거리를 뻗어나간 풍압이 수십, 수백 미터 너머의 와이번을 휩쓸었다.

그야말로 폭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광경.

한 방에 와이번의 상당수가 절명했다.

그제야 우선순위를 수정한 놈들은 눈에 살기를 머금은 채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위기감을 느끼고 내뺐을 테지만, 오히려 환영이다.

‘안 그래도 한놈 한놈 따로 상대하는 건 귀찮았는데 전부 한 번에 와준다면 나야 땡큐지.’

어차피 내가 목적이라면 움직일 필요 없이 그냥 제자리에 서 있으면 된다.

그리고 다가오는 놈들을 전부 요격하면 끝이지.

오른발을 바닥에 내리박아 몸을 지탱한다.

너무나도 강한 힘에 지면이 거미줄처럼 금이 가며 돌조각이 휘날린다.

자세를 잡은 나는⎯

콰드드드득!

⎯그대로 검격을 날렸다.

이루 형용치도 못할 정도로 강력한 진동이 사방을 울리더니, 솟아 나간 검기가 구름을 갈랐다.

자욱한 먹구름 뒤로 가려진 햇빛이 지상을 밝혔다.

그리고 빛이 닿은 자리에는 무수히 많은 와이번의 사체와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야말로 경이롭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을 직면한 아군 측 와이번은 입을 다물었다.

[아아… 이럴수가….]

[이, 이게 정령 인간이 저지른 짓이더냐.]

비록 적대관계라 하더라도 동족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보고 경계할 법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다가온 충격에 그들은 딱딱하게 굳었다.

뭐, 감상은 둘째치고.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투로 인한 아드레날린이 추스르지 않았는지 적들은 아직도 달려들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일부러 내 힘을 빼기 위해서 자살행위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게다가 전에 상대했던 수호용쯤 되는 체급이면 모를까.

“이 정도 잡몹들을 상대론 권능도 사용할 수 없단 말이지.”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상대는 일정 이상의 힘을 지녀야지만 스탯을 흡수할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다.

한데 이놈들은 죄다 그게 불가능했으니, 괜히 의욕만 빠지는 기분이었다.

보상이 있으면 모를까.

아무 보람도 없이 상대를 쓰러뜨리는 건 지루하니까 말이다.

반복되는 굴레에 싫증이 나려던 그때였다.

내 시야에 어떠한 존재가 눈에 들어온 것은.

“어?”

앞선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멀뚱히 서 있는 둘리.

어쩐지 조용한가 싶었더니 급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상한 것도 없나.

이제 막 부화한 해츨링이 겪기에는 스펙터클한 상황이긴 했다.

일반적인 해츨링이었다면 드래곤 레어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았을 테니까.

하나 나와 같이 다니는 이상, 언제까지고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둘리야.”

“한별! 두리를 불렀나.”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너도 여기서 1인분 해야지.”

“…….”

내 발언에 둘리는 급격히 조용해졌다.

원래였으면 싫다고 찡얼거렸을 테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 녀석은 내 눈을 마주 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유사 드래곤들의 싸움을 보고 있자니, 진정한 용족으로서 피가 들끓는 듯했다.

좋은 징조였다.

의지를 불태워서 나쁠 건 없었다.

게다가 명색이 드래곤인데 짝퉁들이 날뛰는 판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지.

‘보아하니 남은 놈들도 얼마 안 남은 모양인데 조금은 괜찮으려나.’

남은 적의 전력을 고려하면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된 이상 할당량을 뺏어간다 한들 뭐라고 할 녀석은 없었다.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준 은인에게 입을 댈 정신 나간 용가리는 없을 테니까.

나는 적당한 상대를 골라 목덜미를 낚아챈 다음, 둘리를 향해 내다 꽂았다.

둘리는 남다른 반사신경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회피해내고는 입을 벌렸다.

벌린 입으로부터 상당한 에너지가 응축되었다.

위이이잉!

상당한 굉음과 함께 응집된 열선은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블랙드래곤의 브레스에 적중한 괴수들은 흑염에 불타며 지면에 우수수 떨어졌다.

괴수들은 불을 끄기 위해 바닥에 몸을 비볐지만, 애석하게도 쓸모없는 짓이다.

단순한 화염이면 모를까.

블랙드래곤의 브레스는 닿은 상대를 저주시키며 영원토록 불태우는 힘이 깃들어 있다.

한 방까지는 아니었지만, 지속적인 데미지는 놈들을 죽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후욱후욱….”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다문 둘리는 비지땀을 흘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비록 브레스의 지속 시간은 짧았지만, 둘리가 해츨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이라면 고전하고도 남을 적을 쓰러뜨렸으니 말이다.

“해츨링이라도 해도 태생부터 드래곤이라는 건가.”

나랑 같이 다니는데 이것도 못 하면 섭섭하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걸리적거리는 짐꾼은 필요 없으며, 능력이 없으면 나를 따라올 자격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둘리가 보인 무력은 썩 만족할 만했다.

“수고했으니까. 거기에서 쉬고 있어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아니다! 한별, 나머지도 내가 마무리 짓겠다!”

방금의 전황을 보고 자신감을 가졌는지 둘리는 손을 뻗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한 번에 많은 마나를 사용한 탓에 손끝이 파르르 떨렸지만, 위태해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둘리는 오히려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속여넘기거나 무마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자신감으로부터 비롯된 미소.

‘…그 주인에 펫이라더니.’

좋네.

한동안은 간섭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자세한 이유까진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녀석이라면 성장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 * *

쿠구구구궁!

아주 멀리서부터 굉음과 함께 짙은 피 냄새가 풍겨왔다.

전쟁이 시작할 때부터 모든 전장을 굽어보고 있었으며 전황을 통솔하던 와이번.

예로부터 수호용이라는 이명으로 일컬어 오던 괴수는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흐음.]

자리에서 일어난 괴수는 침음을 흘렸다.

끝없는 죽음과 삶을 되풀이해오던 그였기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직접 관장하던 전장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 정도는 말이다.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수호용 님 큰일입니다.]

직권의 대리인으로서 전장을 지휘하고 있을 터인 와이번이 피를 흘리며 그의 앞에 도달했다.

[요란 떨지 마라. 무슨 일이지.]

[죄, 죄송합니다. 다… 다른 일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한 인간에 의해 아군의 피해가 상당합니다.]

[인간?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지휘권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찾아온 것이더냐.]

매우 언짢다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와이번은 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싱거운 반응에 수호용은 고개를 휙 돌렸다.

어차피 전황을 지켜보기 위해 일어날 예정이었으니 상관없다.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조금 예정을 앞당기기로 하지.]

[그 뜻은….]

[내가 직접 나서겠다.]

그 말을 끝으로 수호용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을 일으켜 세운 건 얼마 만일까.

굳은 몸을 이끌고 전장에 다가갈수록 멀리서부터 느껴졌던 피 내음이 직접 와닿았다.

상상한 것 이상의 피해, 근원지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동나 있던 관심이 샘솟기 시작했다.

‘허어, 아무리 나약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와이번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활약할 수 있다니.’

인간이라면 진작 사멸한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을 줄이야.

어찌 됐건 상관없는 일이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 능력을 지닌 인간이라도 한들, 결국 본질은 나약한 인간.

태생부터 타고난 종족의 벽은 뛰어넘을 수 없다.

게다가.

[쥐새끼가 발악하는 것은 재미있지.]

수호용은 조용히 읊조리며 목적지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장소에는 바닥에 떨어진 수백 마리의 와이번 사이에 한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일전에 말했던 놈이 바로 저 인간인가.]

지체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사살한다.

머릿속에서 그리 결론 지은 수호용이 전력을 다한 공격을 하려던 그때였다.

[어?]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든 기시감에 수호용은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수년 전, 감옥과도 같은 탑에서 자신을 살해한 당사자.

그것도 반항할 새도 없이 한 방만에 당한 그 수모만큼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있었다.

헌데.

“어, 이제 왔어? 우리 구면이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악몽 속 얼굴이 그 자리에서 손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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