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운수도 더럽게 없네. 하필이면 그때 죽인 괴수가 그놈이었어?’
세상의 모든 상황을 찾아봐도 이렇게 거지 같은 블랙코미디도 없을 것이다.
이전 층에서 단칼에 도륙 낸 괴수가 알고 보니 의뢰인들의 대가리였을 줄이야.
각 층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기 때문에, 나에겐 조금 전 일이었지만 저들은 몇 년 동안이나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의 지도자인 수호용을 기다려 온 것이다.
제3자가 봤으면 단순히 웃고 넘겼을 테지만, 나는 웃음조차 내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게.
무슨 사이비의 신도 마냥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에게 그놈은 내가 죽였다고 실토할 순 없잖아.
하라면 못할 것까진 없지만, 천년의 세월 동안 아무리 인간성이 닳고 닳았더라도 그 정도 양심은 있다.
내가 난처하단 듯이 애써 시선을 회피하고 있자 와이번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실례한 부탁이지만 귀인께서 만나신 수호용은 어떤 인상이셨나요? 귀인께서 기억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
와이번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간절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애절하기까지 한 눈빛.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수호용이라는 작자의 존재가 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의미인지.
그런 그들에게 솔직하게 토로한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을 둘째치고,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 정도까지 냉혈한은 아니다.
‘쓰벌, 이러나저러나 해도 개 같은 상황이라는 건 다름없잖아.’
어쩔 수 없지.
그다지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다른 건 몰라도 능청스러움이라면 자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얼굴에 철판을 까는 거라면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니까.
지옥과도 같은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진심이나 이타적인 마음을 가진 인간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오로지 위선과 이기심만이 넘쳐나는 세상.
플레이어가 아닌 단순한 인간에겐 그것은 곧 생존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최면한다.
거기에서 국한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여 과거의 기억마저 왜곡시킨다.
심박수부터 시작해 아주 적은 표정과 몸짓, 그리고 동공의 떨림마저도 속여서 수의적인 움직임으로 조종했다.
내가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와이번은 의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저기… 귀인분?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크흡! 아, 아니야. 그동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때의 기억은 잊어버리도록 만들려고 했었는데, 다시 그분의 얼굴을 떠올리자니 눈물이 몰아닥쳐서….”
[이거 실례했군요. 귀인께서도 수호용님과의 무언가가 남아 있었을 줄이야. 제가 오히려 귀인의 나쁜 기억만 자극한 모양이군요.]
“그럴 수도 있지. 후우… 나도 웬만해선 최대한 머릿속에서 잊으려고 했는데, 외부인인 나보다 직접 관련된 너희들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아, 아닙니다! 이런 심성을 지닌 분을 앞에 두고 저희들이 그동안 정말로 범례를 저질렀군요. 그동안 귀인께 범한 잘못을 용서해주시길!]
“아니야. 물론 그럴 수도 있지. 세상엔 완벽한 게 어딨어.”
나는 붉어진 눈시울을 닦으며 그들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와이번들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면서까지 간절함을 전달해왔다.
[부디! 폐가 아니라면 귀인께서 직접 보셨던 수호용의 인상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큽… 인상이라… 그 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인상은 무슨 인상이야.
남아 있는 기억이라고 해봤자 반항할 여지도 없이 한 방에 뒈져버린 기억밖에 없는데.
여기까지 와 버린 이상, 대충 마무리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최대한 아련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를 지어내면서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은 내 인생에 있어서 터닝포인트라고 해도 좋을 만한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켰지.”
7층의 핵심 클리어 요소이면서 나한테 한 방에 죽어줬으니 나의 탑등반 역사상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밖에 없지.
“또, 녀석은 항상 나에게 새로운 경험과 잊고 있던 사실들을 다시 되새기게 해주기도 했어.”
탑의 핵심 요소가 한 방에 끝나는 경험과 체급이 전부 크다고 깡패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알려주기까지 했다.
어느 의미에선 모든 층을 통틀어 내게 신선한 충격을 제공했다.
참 고마운 괴수지.
자기최면 거듭하며 연기를 하고 있자 와이번들은 이루 형용치 못한 눈빛으로 나를 뻔히 쳐다봤다.
[그렇군요… 귀인께서도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너희들에게 비하면 그다지 별일도 아니야.”
그래, 그렇게 숭배하던 조직의 대가리가 갑자기 절반으로 쪼개져서 죽었는데 그보다도 당황스러운 일은 없겠지.
그동안 지지하던 정신적 지주가 죽는 것은 내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과정이리라.
여기에선 연기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손을 들어주자.
그게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치는 것이 도리였다.
[충분히 귀인의 심정도 헤아리고 있으니 괜한 배려라면 안 해주셔도 됩니다. 귀인께서 건네주신 말씀대로 저희들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감내하고 있습니다. 그간 벌어온 수호용의 그 악독한 만행과 악행이라면.]
“그래, 너희들의 말대로지. 수호용 그 녀석의 만행과 악행이라면 나조차도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 어?”
어…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지?
갑자기 여기서 만행이랑 악행이라는 단어가 왜 나와.
연기에 심취한 나머지, 선행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잘못 들었나 보다.
그리 생각하면서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하는데, 와이번은 지금까지 보여준 선한 모습을 전부 부정하듯이 우악스럽기까지 한 이빨을 빠득 갈았다.
입안에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유황 냄새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일전에 둘리가 보여준 드래곤피어까지는 미치진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살기가 피부를 따끔하게 찔러왔다.
[지금껏 수호용이라고 불리며 모든 와이번에게 받았던 존경과 숭상을 전부 팔아치우고, 상대편의 진영에 붙어 저희 진영의 와이번들을 학살한 그 날밤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학살이라니, 서로 친한 거 아니었어? 멀쩡히 잘 가다가 갑자기 무슨 학살 드립이야.’
아무리 아침드라마라도 이렇게 극적인 전개는 없을 것이다.
영화라도 이 정도로 개연성을 말아먹으면 욕먹는다.
급격히 변한 태도에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내 오랜 경험상 이런 상황에선 괜히 나서는 것보다는 입 닥치고 상황을 파악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 망측할 놈은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었어도 시원찮을 판인데, 수호용은 죽고 나면 부활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
[네, 놈은 그 권능을 이용해 다시 상대편에 협력해….]
콰과과과쾅-!
그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귀청을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인간의 귀를 가진 나조차도 눈을 찌푸릴 정도인데, 청력이 수십에서 수백 배나 월등한 와이번과 둘리한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상황이 벌어진 직후.
나는 서둘러 굉음이 발생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이 닿은 장소에는 거대한 화재가 얼마 남지 않은 수풀을 활활 태웠다.
협곡의 특성상 뻥 뚫린 환경으로 인해 강풍을 바고 유황 냄새가 짙게 느껴졌다.
핵심은 그게 아니다.
기척을 집중시키자 꽤 떨어진 상공으로부터 검은 인영들이 들이닥쳤다.
언뜻 보면 새 떼와 같은 광경이었으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처음에 직면했던 원근감과는 달라졌다.
상대의 정체를 파악함과 동시에.
[저, 적입니다! 상대 진영에서 대규모 군세를 이끌고 이쪽을 향해 접근 중입니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적진에 나갔었던 척후병이 힘겹게 외쳤다.
이곳에 도달하기 전까지 전투가 있었던 모양인지, 와이번은 어깻죽지부터 시작해 이어지는 복직근까지 출혈이 이어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날붙이로 인해 갈라진 상처에선 피가 울컥 쏟아졌다.
손으로 틀어막고 있어서 그렇지 당장에라도 내장이 튀어나와도 이상한 것 없는 상황.
이곳까지 도달한 것만 해도 놀라울 정도다.
그런 노력과는 달리 아쉽게도 말을 전부 잇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세한 설명을 꺼내지도 전에 흉측한 손톱이 놈의 가슴팍을 꿰뚫고 튀어나왔기 때문에.
끝내 힘을 잃은 녀석은 흘러내리는 내장과 함께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 이럴 수가!]
척후병의 자세한 설명이 없었음에도 누구나 할 것 없이 전투태세로 들어섰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의미 없었기에.
상대편 진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뻥 뚫린 하늘에는 와이번의 대군으로 인해 시꺼먼 그림자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을 조성하는 광경이다.
싸늘한 침묵을 깨고 움직임을 감행한 것은 바로 그때!
[전부 몰살시켜라!]
[어떻게든 놈들의 목적을 저지해내라!]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집단은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격돌하고야 말았다.
함성과 비명 소리가 사방을 진동하며.
와이번의 피가 폭풍우처럼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전쟁.
혼란 중에서 나는 전혀 괘념치 않다는 듯이 와이번의 장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요건대 너희들은 탑의 예언이라는 것 때문에 내가 필요하단 뜻이지?”
[귀, 귀인이시여! 여기에서는 저희들이 직접 방어해낼 테니….]
“됐어, 비슷한 용가리들한테도 쩔쩔매고 있는 너희들이 뭘 직접 해. 원래는 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긴 한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내 힘도 보태줄게.”
[힘을 보태주신다니 하지만….]
“됐어.”
그렇게 바라던 거잖아.
나는 콧방귀를 뀌며, 동족의 피와 내장을 전신에 뒤집어쓰고 달려드는 용가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런 허접한테는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사치다.
손가락을 튕기자, 일직선상으로 뻗어나간 풍압이 놈의 대가리를 박살 냈다.
새하얀 뇌수가 허공을 휘날리며 터져나간 한 줌의 ‘토마토’를 본 장로는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어, 어떻게?]
“아직 몸 풀지도 않았는데 놀라긴 뭘 놀라.”
대신에 심부름 값은 좀 비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