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이것들이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잇따른 발언에 차가운 적막이 흘렀다.
와이번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잘못 들은 거냐고 되물으면서 서로의 귀를 의심하고 있을 정도.
하긴 새삼스럽지만 타종족에게 욕을 들어볼 기회는 그리 흔치 않을 테니 놀랄 만도 하다.
게다가 ‘하늘의 계시’를 받은 자의 입에서 그런 험한 발언이 나오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심리적인 작용이 뒷받침한 까닭이었다.
[나이를 먹더니 귀가 침침한 모양인 것 같군. 그래서 네가 해줄 일은 우리들을 따라서….]
“용가리들이이 다 같이 귀에 총을 맞기라도 했나. 대답 안 해?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게 뭐냐고.”
당장 엎드려서 싹싹 빌어도 고민해볼 판인데, 저들의 태도는 그저 실소만 나오게 했다.
내가 주먹을 풀며 앞으로 나아가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와이번들이 경계하는 기색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의 앞을 막은 와이번들마저도 그들 중에서 가장 약한 존재들.
간부로 보이는 자들은 영 탐탁지 못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태도를 보면 나를 얼마나 가볍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뭐, 나도 이해한다.
세상에는 뭐든 직접 겪어보기 전까진 자만감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그런 거에 먹히는 아주 빠른 해결법이라면 잘 알고 있다.
“충격 요법이라고 알고 있어?”
그것만큼 효과 좋은 건 또 없거든.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와이번들의 사이로 달려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용족의 DNA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다고, 내 움직임에 반 박자 늦게 반응하는 놈들.
하나, 알아차려봤자 별 의미는 없었다.
안다고 한들 내 공격을 막지 못하면 소용없는 일이니까.
놈들의 팔을 쳐내는 것으로 움직임을 저지한 다음, 나는 와이번의 날개를 잡고 허리를 역방향으로 접었다.
내 앞을 막아선 와이번은 엄청난 격통에 의해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단 1초도 걸리지 않아 벌어진 일.
[어, 도대체… 무슨 일이….]
“뭐긴 보고도 모르겠어?”
딱 봐도 뻔하잖아. 너흰 주옥 됐다는 거지.
나는 손에 쥔 와이번의 머리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몸을 풀었다.
이상한 기류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그들은 쉬이 움직이지 못한 채 서로 눈치만 살폈다.
이미 벌어진 상황으로 인해 내가 그들에게 호의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언제 폭탄이 터질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그들의 대표로 보이는 와이번이 입을 뗐다.
[이, 일단 진정하시게나.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이야기를 통해 차차 풀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단번에 바뀐 말투.
방금까지만 해도 멋도 모른 채 반말을 찍찍 내뱉어대던 그때와 비교하면 360도 변한 태도였다.
내가 가볍게 손가락을 끄덕이자, 그들은 움찔하며 경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나 참 누구 한 명 죽인 것도 아니고 그저 기절만 시켰을 뿐인데 저런 반응이라니.
역시 예의를 밥 말아 먹은 것들에겐 충격 요법만 한 게 없다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대화할 준비가 됐나 보지? 그래서 손님을 모셔두고 서서 이야기를 하겠다고?”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서 준비하겠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급조된 자리에 앉은 나는 책상 위에 두 다리를 꼰 채로 비스듬히 앉았다.
거만하기까지 한 자세에 그들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에 대해서 감히 입을 댈 자는 없었다.
나는 무신경하게 턱을 괸 채 화두를 던졌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허허… 다른 건 아니고 당신… 아니, 귀인께서도 하늘의 계시를 통해 잘 아시고 있지 않습니까.]
“하늘의 계시?”
아까 전부터 계속 그런 단어를 쓰던 거 같긴 한데 그건 또 뭐야.
내가 의문을 던지자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대꾸했다.
[귀인분께서 업을 쌓기 위해선 저희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야지만 가능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혹… 저희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까?]
“뭐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
그의 물음에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와이번의 발언으로 미루어보건대 탑의 시스템에 대해선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탑과 플레이어에 대한 자세한 개념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대충 플레이어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그렇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보인 태도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탑의 구조를 이용해 갑과 을의 관계를 이용해 먹을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지금까지는 조금 과감하게 나가도 별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플레이어들이라면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불쾌하더라도 그냥 수긍하고 받아들였을 테니.
하지만.
[그렇다면 저희들에게 협조하셔서 순조롭게 일을 해결….]
“계속 듣자 하니 크나큰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 너희 용가리들이 말하는 그 일이란 건 내가 협조 안 하면 그만이잖아.”
[요, 용가리라니.]
내 발언에 몇몇 와이번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장로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없다는 듯 대화를 이어나갔다.
“보아하니 너희들도 명령을 내리고 있을 만한 처지도 아니잖아. 그렇게 급한 일이면 너희들끼리 해결하면 되지. 굳이 나한테 와서 맡기는 걸 보니 급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인가 봐?”
[…….]
정곡이었던 모양인지 장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방금과는 달리 완전히 역전된 서로의 입장.
보면 뻔하다.
그렇게 잘나신 와이번들끼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굳이 나한테 와서 부탁할 것은 없었을 테니까.
아쉬운 게 더 많은 입장이 을이 될 수밖에 없지.
“참고로 덧붙이자면 그까짓 탑, 난 언제 올라가든 상관없어.”
시간이 많은 건 이쪽이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나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해서 정석적인 루트로 탑을 올라간 것도 아니잖아.
찾아보면 다른 층들처럼 또 다른 클리어 요소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단호한 태도로 일관하자,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장로는 입을 뗐다.
[그 말씀대로이십니다.]
[자, 장로님! 어찌 외부인에게….]
[되었다. 괜한 자존심 하나 때문에 이번 일을 그르치려고 드느냐. 귀인의 말씀대로 아쉬운 건 우리니 속사정을 먼저 털어놓는 게 도리이니라.]
[…….]
장로의 언급에 와이번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귀인이시여.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런 추태를 보여서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다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어, 어… 그래. 알았어.”
언뜻 진지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상황은 장로의 주선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야말로 순식간.
그래도 보는 눈이 있기에 곁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는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너희 명색이 용족이라매? 용족이라는 작자들이 왜 이렇게 자존심도 없어.’
용족이란 놈들이 왜 이리 물러빠졌어.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 버리면 나중에 귀찮다고 내팽개치기도 뭣하잖아.
원래 계획대로라면 적당히 트러블을 만들어 귀찮다는 핑계로 그냥 개인행동을 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돼버린 이상, 그들의 사정을 안 들어볼 수도 없었다.
섣불리 움직였나 하는 생각이 들 즈음에 장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 어쩔 수 없지.
판단이야 일단 들어보고 내리면 된다.
[사실 이번 일의 발단은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입니다. 와이번은 저희들 말고도 여러 파벌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십 년 전의 과거엔….]
“야, 잠깐 멈춰봐.”
[네?]
내가 말꼬리를 끊고 중간에 난입하자 장로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너희 사정을 일일이 들어줄 시간은 없으니까. 나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대충 요약해서 말해.”
기왕이면 세 문장으로 짧게.
급작스러운 내 명령에 장로는 얼빠진 얼굴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무래도 쉽게 정의할 만한 일은 아닌 모양인지 손톱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는가 싶더니.
그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예로부터 와이번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 진영을 조율하는 수호용이 있었습니다. 한데 몇 년 전에 무슨 이유에선지 수호용이 돌연사하게 되시고 진영 간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상대편에서 저희 진영을 침략하면서 귀인님의 힘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요건대 정리하자면 너희들 밥그릇 싸움이라는 거네.”
[…….]
앞뒤 상황을 전부 말아먹은 채로 간략하게 줄여버리자 장로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반박은 할 수 없었다.
결국 내 말마따나 와이번들의 밥그릇 싸움.
이는 곧 내가 굳이 도와줄 필요는 없단 뜻이었다.
아무런 보상도 없는 자선 봉사활동이라면 사절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전에 수호용이 돌연사했다고 했었던가?’
수호용이라…
원래대로라면 칼 같이 거절하려고 했었지만,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위화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지간하면 무신경하게 넘어갔을 테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육감이 강하게 들었다.
7층에서 쓰러뜨린 괴수의 기억과 정해진 방식이 아닌 다른 선택지로 7층을 클리어하면서 생긴 8층과 9층의 변화.
내가 생각해봐도 어이없을 정도로 웃긴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인해봐서 나쁜 것은 없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일단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수호용이라는 거 있잖아. 전체적으로 검은 피부에 머리에는 두 쌍의 뿔이 달렸지 않아?”
[…일단 비슷한 와이번은 많긴 해도 귀인께서 말씀하신 것과 대충 비슷합니다만.]
이어진 그의 대답에 나는 단편밖에 없는 기억을 되살렸다.
7층의 괴수를 쓰러뜨린 것은 5초 남짓의 아주 한순간.
마지막으로 괴수의 몸을 절반으로 쪼갰을 당시에 가장 특징적으로 남은 기억이라고 한다면.
“음… 혹시 어깨 쪽에 붉은빛이 감도는 반점이 있지 않았어?”
[네! 맞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호용의 증표입니다! 혹시 귀인께서도 과거에 수호용과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어… 일단은 만난 적은 있는 거 같은데.”
어째 내가 한 방에 쓰러뜨린 괴수와 인상착의가 굉장히 닮은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