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3화 (13/175)

제13화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던 괴수는 내 손에 의해 간단하게 절명했다.

아주 깔끔한 한 방.

아니, 따지고 보면 한 방에 끝난 건 아니니 두 방만이려나.

긴장감이라곤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차가운 적막만이 흘렀다.

삭막한 적막을 깨고 옆에 있던 둘리가 손뼉을 마주쳤다.

“한별! 멋지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별난 건 아냐. 그냥 간단한 거지. 나처럼 평소에 운동만 잘하면 너도 할 수 있어.”

“오오! 그런가! 알겠다! 나도 한별처럼 운동 열심히 하겠다!”

둘리의 의문에 양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하자, 녀석은 꼬리를 휘두르는 시늉을 보였다.

이렇게 보면 참 귀여운 녀석이라니까.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을 보는 것도 잠시, 나는 쓰러진 괴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근래에 들어서 만난 괴수 중에선 유니콘을 제외하곤 강한 놈을 못 봐서 안 하고 있었는데, 이런 거 하나하나가 생명줄이니 최대한 챙겨놔야지.

내 손에서 튀어나온 자줏빛을 띤 무수한 거미줄이 반으로 쪼개진 괴수를 잡아 삼켰다.

〈직업: [이터]의 부가 권능으로 대상의 기억을 흡수합니다.〉

권능을 발동하자 아주 희미하게 스탯이 상승되었다.

“한별?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냐, 별일 없어.”

둘리의 목소리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뗐다.

아무래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탓에 걱정을 끼친 모양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녀석에게 손을 흔들자 금방 낯빛이 밝아졌다.

이걸로 괴수까지 처리했으니, 이제 7층에서의 볼일도 마쳤다.

〈7층의 결과를 정리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어진 방법이 아닌 남다른 방법으로 공략에 성공함으로써 8층과 9층의 구성이 신한별님의 난이도에 맞게 조정됩니다.〉

〈탑이 당신의 행보를 보고 아주 적은 흥미를 지닙니다.〉

연달아 떠오른 시스템창을 확인한 나는 실소를 흘렸다.

“흥미면 흥미지 아주 적은 흥미는 또 뭐야.” 탑이 뉘신지는 몰라도 참 가지가지 하는 놈이다.

할 짓이 없어서 남의 모습을 염탐이나 하고 있긴.

저쪽에서 관심을 가지든 말든 별 상관은 없었다. 난 그다지 관심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하늘에서부터 강렬한 섬광이 시야를 가렸다.

〈8층으로 이동합니다.〉

* * *

〈8층에서 일어난 트러블을 해결하십시오.〉

〈제한 시간: 59시간 42분.〉

환한 섬광이 시야를 가리는가 싶더니, 지면에 착지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나와는 달리 둘리는 이런 느낌에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인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 한별! 누, 눈 아피 안 보인다! 이, 이게 뭐냐!”

“진정하고 가만히 있어 봐. 그럼 괜찮아질 테니까.”

“어… 그런가! 알았다! 오, 한별의 말대로 하니 정말로 아피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나 당황한 모양인지 안 그래도 안 좋은 발음이 더 어눌해졌다.

처음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각에 놀라긴 했는데, 둘리처럼 저 정도까진 아니지 않았던가?

하긴 드래곤의 감각은 다른 종족들보다도 몇십 배부터 시작해 몇만 배까지 강하다고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익숙해질 때까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테니까. 일단 두고 보면 되겠지.

나는 둘리를 뒤로한 채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가 서 있는 장소는 지금까지 겪었었던 좁은 광장도, 용암지대도 아닌 거대한 골짜기가 울긋불긋 펼쳐져 있는 협곡.

마치 미국의 그랜드캐니언를 연상케 하는 장엄한 절경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와, 역시 지리긴 지리네.”

나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협곡의 밑을 내려다보며 감탄사를 내질렀다.

마음 같아선 사진으로 찍어서 두고두고 보고 싶었지만, 탑에선 그럴 방법이 없으니 눈에 확실하게 새겨두기로 했다.

‘사실 지구였어도 사진기는 오랜 과거의 산물이지만.’

꿩 대신 닭이랬나.

그 비스무리한 걸로 치자.

한가로이 시간을 때우고 있을 무렵, 어느새 적응한 모양인지 옆에 따라붙은 둘리가 감탄사를 내질렀다.

알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니 신기한 것도 당연한가.

나는 상념을 지운 채 둘리를 내려다봤다.

더욱 확실하게는 녀석의 등에 있는 두 쌍의 무언가를 향해.

“둘리야.”

“어? 한별 날 불렀나?”

“그래, 생각해보니까. 너도 날개가 있으니까. 날 수 있을 거 아냐?”

“어… 두리는 아직은 못 난다!”

“못 날긴 뭐가 못 날아. 그럼 네가 가진 날개는 관상용이나 보지?”

“…….”

어디서 구라야. 눈알 굴리는 거 다 보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 눈은 못 속인다.

보통 새들은 어미가 새끼를 나무 위에서 떨어뜨리는 것으로 날갯짓을 학습시킨다고 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보통 어느 정도 이상은 성장한 뒤에 하는 짓이긴 해도…

명색이 드래곤인데 몇몇 과정은 생략해도 상관없겠지.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둘리야.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한 번 날아봐야지.”

“어… 하지만 한별 여긴 너무 높다!”

휘이이잉!

둘리는 끝도 한도 안 보이는 가파른 절벽을 보곤 아연한 얼굴을 지었다.

드래곤이 무슨 고소공포증이야. 웃기는 농담은 집어치워라.

누가 들으면 물고기가 물공포증이 있단 소리나 하는 거와 다를 게 없다.

너무 원망하진 말렴.

모두 탈 것이 필요한 나를 위한… 아니, 너를 위한 일이니까.

“걱정 마. 원래 처음이 떨리는 법이지 막상 경험해보면 별거 아니니까.”

“하, 한별 만약에 날지 못해서 떨어지면 구해주는 건가?”

“아니? 내가 왜?”

전부 널 위해서 하는 일인데 내가 희생을 왜 해.

원래 뭐든 강하게 키워야지, 그 값어치를 하는 법이다.

추가로 덧붙이자면 성장에는 자신의 목숨이 직결된 일이라면 효과는 배가 되기 마련이다.

그걸 어찌 아냐고?

내가 그렇게 해서 강해졌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행운을 빌게.”

나는 냉정한 웃으며 둘리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둘리는 아련한 표정을 끝으로 절벽 밑으로 추락했다.

낭떠러지 너머에 있는 안개 속에서는 둘리의 비명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비명 속에 드래곤 피어도 섞여 있는 걸 보니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 둘리의 비명마저도 잠잠해졌을 무렵.

“……왜 아무 소식도 없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 건 아니겠지.

창공을 지배하며 모든 생명체를 범접하는 드래곤이라는 녀석이 졸지에 추락사라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협곡의 밑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

미약한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먼 거리긴 했지만, 멀리서부터 어쭙잖은 날갯짓을 하며 헥헥거리는 둘리 녀석이 시야 속에 들어왔다.

“하… 한별, 드디어 성공해타!”

그 말을 들은 나는 지면을 박차고 뛰어 허공에서 둘리를 낚아챘다.

자기도 성공했다는 성취감에 밝아진 표정이었다.

아무리 해츨링이라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라는 건가 보다.

나는 품에 안긴 둘리를 보며 말했다.

“나중에 다른 드래곤이 어떻게 날았는지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면 돼.”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고 말이야.

그거면 충분하다.

* * *

나는 지면과 벽을 박차며 협곡 사이를 가로질렀다.

상당히 넓은 거리라 다른 플레이어들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만한 거리였으나, 나한테는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덕분에 시간을 절약한 우리는 반나절 채도 되지 않아 협곡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그곳은 상당한 음기로 인해 수풀을 비롯해 생명체가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구성되어 있었다.

‘나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인데, 다른 플레이어들이 여길 클리어했다고?’

머릿속에서 막연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 의문은 얼마 되지 않아 해결되었다.

생각해보니 7층을 클리어하면서 난이도가 조정됐다는 문구를 본 거 같았다.

뭐 어쩔 수 없지.

지금으로선 난도가 높아진 만큼 보상도 클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걷는 것도 잠시, 멀리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리는 대략 200M쯤이나 될까.

기척을 끌어올리며 그 방향으로 나아가자 가지각색의 괴수 무리가 나타났다.

7층에서 쓰러뜨린 괴수와 많이 닮았지만, 아무래도 전의 놈과는 달리 이쪽을 적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눈치.

그래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놈들을 향해 다가서자 그중에서도 대표뻘로 보이는 괴수가 앞장섰다.

[인간이여. 기다리고 있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렇다. 하늘의 계시를 받은 자여 자네에게선 확실히 증표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군. 확실하다네, 자네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자다.]

증표의 힘?

제가요?

그들의 호칭을 듣고 가장 먼저 의아스러움이 앞섰지만, 다른 곳도 아닌 탑이니 대충 그런 설정인 듯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그는 입을 열었다.

[먼저 우리들의 소개부터 하는 편이 이치에 맞겠지. 우리는 와이번 중에서도 바람의 부족이라네.]

와이번, 풍문으로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그들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수식어라면.

“유사 짝퉁 드래곤.”

[지금 뭐라고 했지?]

“내가 뭐라고 했던가? 네가 잘못 들은 거야.”

[흠흠, 그런가.]

뭔 유사 드래곤 주제에 왜 이렇게 귀도 밝아.

순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었으나, 내가 부정하자 그들은 미심쩍은 듯한 반응을 보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으니, 지체할 거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네놈이 하늘의 계시를 받았을 터, 그러니 그 뜻을 따라서 우리를 위해…….]

“아니, 그 전에.”

내가 손을 들어서 말꼬리를 자르자, 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한 얼굴.

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핏대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야, 근데 부탁하는 놈들이 태도가 그게 뭐야. 이게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나.”

이것들이 언제 봤다고 반말질이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