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2화 (12/175)

제12화

금이 가기 시작한 알은 엄청난 기세로 흔들리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 이유를 퍼뜩 깨달은 나는 주머니에서 알을 꺼냈다.

분명히 내가 처음 알을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꽤나 크기가 컸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 뒤에 내 주머니에 들어가기 알맞은 크기로 줄어들어서 그렇지.

“그러면…….”

내 예상은 적중했다.

주머니에서 꺼내자마자 알은 점점 부피를 키워갔다.

손아귀 안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를 지나, 어느새 내 하체에 닿을만한 크기까지 거대해졌다.

그 정도로 거대해진 알은 상당한 기운을 내뿜으며 날뛰기 시작했다.

느껴지는 기운만 하더라도 일전에 상대했던 대왕뻘인 유니콘의 포텐을 아득히 뛰어넘을 지경.

경계심을 거두지 않고 지켜보고 있을 무렵.

떨어지는 껍질 사이로 짙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상당한 온도였다.

만약 저기에 손을 넣으면 그대로 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대감 절반, 경계심 절반을 가슴에 품은 채 보고 있자, 시야를 밝히는 섬전과 동시에 그 안의 생명체가 일어났다.

파지지직⎯

상당한 뇌전이 일며 검은 인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면하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파충류의 눈동자와 두 쌍의 아담한 날개.

지구에 있을 적, 플레이어가 보여준 그림과 아주 익숙한 모습을 한 생명체는 남은 알 조각을 꼬리를 휘둘러 부숴버렸다.

그저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율케 하는 광경.

상상을 초월한 놈의 정체에 나는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저건? 드래곤?”

드래곤.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최상층에서 활약하는 랭커들마저도 심장을 들끓게 만드는 종족.

드래곤에 대한 전설과 무용담은 탑 밖에 있던 나조차도 익히 들어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 위용에 관해서라면 더더욱 말이다.

헌데…

“왜 이렇게 작아?”

나는 내 앞에 있는 드래곤을 바라보곤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기껏 해봤자 허리춤에 닿을까.

지금까지 내가 상상해온 드래곤의 늠름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해보면 방금 알에서 부화한 녀석이다.

드래곤으로 치면 아직 해츨링에 불과했다.

방금 막 부화한 해츨링이 내뿜는 기척을 떠올리자면 성체가 되고 나서의 포텐션이 절로 무서워질 정도였으나.

아직까진 그래봤자지.

“진짜로 이게 드래곤이라고?”

보통 드래곤은 외피의 색에 따라 속성을 나누는데, 색을 보아하니 뇌룡에 속하는 녀석인 듯했다.

신기하단 눈빛으로 녀석의 몸에 손을 대려 하자.

“궤에엑!!”

휘리리리릭!

녀석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내 손을 튕겨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

반항적인 녀석의 태도에 나는 호기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쭈 이것 봐라?”

소리만 칠질 뿐이지 딱히 아프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은 여느 동물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혼자 사는 습성을 지녔다고 했었지.

그렇다 보니 해츨링일 때부터 성격이 더러운 걸로 유명하다고.

그 사실을 모르고 접근한 플레이어들이 그대로 절명한 사건은 지구에서도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잘됐네, 다른 건 몰라도.

“길들이는 건 자신 있거든.”

아니, 생각해보니까 조금 빡치네.

이 용가리 새끼 그동안 내가 해준 게 얼마나 되는데, 그냥 몸에 손 한 번 댄 걸로 은혜를 원수로 갚아.

그까짓 용가죽이 한 번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달걀후라이나 계란찜으로 안 해 먹어서 망정이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세상을 보기도 전에 뱃속으로 들어갔으리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넌 안 되겠다.

세상엔 나쁜 개는 없다고?

오늘부터는 틀렸다.

“세상엔 나쁜 드래곤은 없는 걸로 해주마.”

* * *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녀석에게 주먹을 아니, 훈육을 휘둘렀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해츨링 일 뿐인 저 용가리가 내 몸을 타격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금 막 알을 깨고 부화한 햇병아리인 반면,

나는 좋든 싫든 천년이라는 세월 동안 튜토리얼에서 썩으면서 온갖 괴수를 상대했다.

그중에는 당연히 드래곤과 비슷한 신체 구조를 지닌 괴수도 있었다.

그러니 저 예의 없는 용가리를 상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한참의 접전 끝에 도무지 나와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단 것을 깨달은 녀석은 살기를 내뿜었다.

“크르르릉!”

일반적인 살기도 아니다.

일명 드래곤 피어라고 불리는 권능.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종족이든 불구하고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상태 이상이었다.

분명 에이션트급 드래곤들은 권능을 발동하는 것만으로도 어쭙잖은 존재를 지울 수 있다고 했었던가.

내가 의식해서 방어해내지 않았다면 제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게 누구 앞이라고 그르렁거리고 지랄이야.”

방심한 틈을 타, 녀석의 후미에 파고들어 주먹을 내리꽂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주먹이 들어간 녀석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이걸로 잠시나마 머리도 식힐 수 있겠지.

나는 한참 움직이다 말고 바람에 나부끼는 순백의 코트를 내려다봤다.

잠만 생각해보니까.

전에 그 아저씨가 이 코트를 완성하려면 드래곤 하트가 필요하다고 했었지.

그냥 이 새ㄲ… 용가리의 드래곤 하트를 써먹으면 안 되나?

〈TIP! 자신의 펫을 소모해서 아티팩트에 추출하거나 재료로 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참 탑이란 놈이 깐깐하기도 하지.

전처럼 한 박자 늦게 팁을 알려줄 땐 언제고, 이럴 때만 빠릿빠릿 일을 한다니까.

녀석이 나가떨어진 장소를 바라보고 있자, 자욱한 먼지 속을 뚫고 상처투성이인 녀석이 나타났다.

“…….”

아까 전만 해도 아득바득 죽을 듯이 달려들려고 할 땐 언제고.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어졌는지 녀석은 내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거 순응하겠단 얘기지?

음… 나도 잘 모르겠다.

보통 애완동물이 주인에게 따를 때는 몸을 까집은 채로 배를 보이니까, 대충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처음부터 이랬으면 편했을걸.

“이제 본격적으로 7층에 들어가기 전인데 사람 힘이나 빼고 만들고 참 별의별 짓도 다 한다.”

“…….”

이에 대해선 자기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듯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무턱대고 하악질을 하는 것보단 조용한 게 훨씬 낫네.

“그래서 그거 말고는 할 말이 없나 보지?”

“미아내.”

“어…?”

“미아나다. 나도 잘 모르고 했다.”

지금까지 으르렁거릴 때는 언제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이 스스로 입으로 미안하다고 말했어?

아니, 그보다도 사람 말을 할 수 있었던 거야?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상황에 나는 넋을 잃었다.

“너… 말 할 수 있었어?”

“그릏다! 인간의 언어 조금 어렵지만 금방 배울 수 있다.”

“그래?”

녀석의 대답에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모습은 영락없는 드래곤인데, 정작 말하는 건 한국말이라니.

엉성한 발음이긴 했지만, 저 정도면 대화하는 것에는 문제 될 건 없었다.

아직까지도 녀석이 말하는 게 어색한 기분이었으나, 서로 소통이 안 돼서 답답한 거보단 훨씬 나았다.

나는 목덜미를 긁으며 말했다.

“신한별이야. 그냥 네가 부르고 싶을 대로 대충 불러.”

“하별… 아랐다! 한별! 내 이름은 무엇인가!”

“네 이름? 그러게다. 뭐 할래? 용용이? 용가리? 용팔이? 네가 원하는 거 아무거나 하나만 골라. 그렇게 불러 줄 테니까.”

“…….”

즉석에서 떠오른 이름을 순서대로 나열하자 녀석은 얼굴을 찡그린 채 침묵했다.

딱 봐도 별로라는 눈치.

다른 이름을 요구하는 얼굴인데, 나보고 어쩌라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도 이름은 잘못 짓는다.

그래도 같이 다니는 동안 이 녀석이나 놈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적당한 이름이라도 짓는 편이 나긴 할 텐데….

“아, 그러면 둘리는 어때? 내 이름이 하나의 별을 뜻하는 한별이니까. 넌 내 두 번째라는 거지.”

나는 적당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사실 남극에서 온 유사 용의 이름이긴 한데, 그것까진 알 턱이 없을 테니까. 상관없겠지?

여러모로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슬쩍 시선을 돌려 녀석을 보니 좋아하는 눈치였다

“오오, 두리! 좋다! 난 두리다!”

“두리가 아니라 둘리야.”

“그래! 제대로 바름했다! 두리!”

“어… 그래, 알았어. 대충 그런 걸로 치자.”

발음이 안 좋은 게 흠이긴 하지만, 이제 막 태어난 해츨링한테 뭘 바라랴.

나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쓰벌, 여러모로 어질어질한데 그래도 오래간만에 왁자지껄한 건 좋구만.”

이쪽도 대충은 일단락도 됐겠다. 나는 시스템을 바라봤다.

〈7층에 입장해주십시오.〉

때마침 준비도 전부 마쳤는지 방 한켠에 문이 생성되었다.

‘저길 넘으면 된다는 건가.’

간단하니 좋네.

둘리 녀석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비장한 얼굴이 되었다.

아주 짧은 대화였지만, 그 새에 드래곤의 표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니 여러모로 웃긴 이야기지만 그냥 넘기자.

뭐든 타고나면 좋은 거잖아.

나는 둘리와 함께 문을 활짝 열고 7층의 관문을 넘었다.

언제나 그렇듯 환한 빛이 우릴 마주한다.

그리고.

우리 둘이 도달한 장소는 방금 전보다도 넓은 규모의 공간이 펼쳐졌다.

다만 이전과는 달라진 게 있다면.

-크르릉!

눈을 뜨자마자 우리들의 앞으로 드래곤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괴수가 등장했다.

〈7층은 괴수의 공격을 피해 생존하는 것입니다.〉

〈제한 시간은 24시간입니다.〉

시스템창의 말대로 7층을 깨기 위해서는 저 괴수의 무자비한 공격으로부터 회피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희미한 웃음기를 띠며 괴수의 정면으로 나아갔다.

여타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하자 괴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괴수는 아가리를 벌리며 우악스럽게 달려든다.

다른 플레이어들이라면 두말할 여지도 없이 저 괴수를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시스템창의 말을 따랐을 테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프론트 킥으로 놈의 아가리를 걷어차고는 쥐고 있던 검을 시원하게 내리그었다.

촤악!

아주 긴 검흔과 함께 괴수의 머리가 절반으로 갈라졌다.

깔끔하게 절반으로 갈라진 괴수는 그대로 숨을 잃고 절명했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굳이 탑의 말을 따를 필요는 없잖아.”

내가 가야 할 길은 내가 직접 만들어서 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