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10화 (10/175)

제10화

서로 마주한 나와 유니콘 사이에서는 차가운 적막이 흘렀다.

서로가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끔 그런 말도 있잖아. 진정한 강자들은 한눈에 보면 단번에 알아차린다고.

그의 총량으로만 따지면 튜토리얼에서 줄곧 상대했었던 괴수와 동급이었다.

내가 그토록 찾고 있었던 강자의 반열에 포함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줄곧 이어지던 대치 상황을 깨뜨리고 먼저 움직인 것은 다름이 아닌 상대.

“크헝!”

놈은 지척이 울릴 정도의 포효를 내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지금까지 탑에서 만난 여느 괴수와 비견해도 상당한 압박감이었다.

상대가 이렇게 열혈이 반겨준다는데, 그냥 넘어갈 순 없지.

나는 들고 있는 검을 땅바닥에 강하게 박고는 허릿심에 힘을 줬다.

그리고는.

파아아앗!

놈과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격돌했다.

각기 다른 에너지가 충돌하며 강렬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충격을 버티지 못한 지반이 무너지며 거대한 크레이터가 발생했다.

돌부리가 사방으로 튀며 몸에 부딪혔지만,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다.

나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놈을 향해 소리쳤다.

“뭐해! 좀 더 뒷심을 발휘해 봐.”

“크르릉?”

딴에는 나를 장외로 튕겨버릴 각오로 돌진한 듯했으나, 제자리에서 움쩍도 하지 않자 유니콘은 당황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당연히 그렇겠지.

지금까지는 자신보다도 강한 강적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었을 테니까.

나는 오른쪽 발을 지면에 박은 채, 유니콘의 뿔을 붙잡고 힘을 줬다.

양쪽 팔에 핏줄이 울긋불긋 튀어나왔다.

길게 숨을 내뱉으며 이두에 힘을 주자 유니콘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의 연속에 눈을 번쩍 떠는 놈.

“흐읍!”

더욱 힘을 주자 놈은 바퀴를 돌아 그대로 지면에 꼬라 박혔다.

크레이터로 인해 한차례 약해진 지면에 육중한 무게가 실리자, 상당한 충격과 함께 싱크홀이 일어났다.

쿠우웅⎯!

상당한 거구가 수십 미터 지하로 떨어지면서 모래 먼지가 사방으로 나부꼈다.

나는 손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이마를 닦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무거운 걸 들고 운동하니까 좋네.”

괴수 사냥 말곤 전혀 할 게 없었던 튜토리얼에선 자주 하던 운동이었다.

무게도 무겁겠다. 괴수만큼이나 운동기구로 써먹을 만한 건 또 없지.

근육이 팽팽하게 팽창되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자, 유니콘은 여러 쌍의 날개를 휘날리며 상공으로 솟아올랐다.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상당히 분노한 얼굴이었다.

걱정 마라.

지금부터는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이니까.

지면에 박아뒀던 검을 빼 들고는 놈을 향해 점프했다.

점프 한 번에 놈의 정면에 도달한 나는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지금까지 상대한 괴수들이었다면 이 한 방에 맥없이 쓰러지고도 남았을 테지만, 놈은 거뜬히 버텨냈다.

기껏 해봤자, 몸에 작은 흠집만 생긴 게 전부.

“저건?”

뒤늦게 상대방의 몸을 확인한 나는 어이없는 실소를 흘렸다.

분명히 검을 힘껏 휘둘렀건만 아무런 상처도 생기지 않았나 싶었더니, 괴수의 몸에는 은빛이 감도는 비늘이 우수수 돋아나 있었다.

저러니 상처가 안 생길 만도 하지.

게다가 몸에 생긴 흠집마저도 빠른 재생력으로 금방 회복되었다.

‘어지간한 공격으론 통하지 않는단 건가.’

아쉽게 됐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런 식으로 빠른 재생력을 가진 괴수는 많이 상대해봤기에 놀랄 건 아니었다.

내 경험상 저런 상대의 공략법은 두 가지.

“첫 번째는 빠르게 연타해서 방어력을 깎아내는 방법.”

하지만 이건 방어력과 더불어 뛰어난 회복력을 지닌 놈한테는 기각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아예 뼈도 못 추릴 한 방으로 끝내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있는 힘껏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몸에 흠집을 내는 게 고작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버거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내가 천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저 놀고먹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나는 희미한 웃음기를 띠며 사냥한 유니콘들의 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직업: 이터의 권능을 발동합니다.〉

〈괴수 100마리의 영혼을 바쳐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을 상승시킵니다.〉

내 몸에서 뻗쳐져 나간 수백 개의 가지가 괴수들의 몸을 휘감고는 영혼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모든 영혼의 흡수를 마치자.

마치 도핑이라도 한 것처럼 주변 시야가 훤히 보였으며 온몸에 힘이 넘쳐났다.

괴수의 영혼을 제물로 삼아 아주 단시간 신체 능력을 올리는 권능.

장기적인 전투에는 발동 조건과 지속 시간을 생각하면 효율에 맞지 않는 능력이지만…

‘이런 상황에는 찰떡이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자줏빛의 섬광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몸에서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만끽하며 상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히히힝!”

대왕뻘인 유니콘은 나를 보고는 비웃듯이 울음소리를 냈다.

방금의 일격을 통해 내 공격이 자신의 몸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꽤 짜증 나는 낯짝이었으나 상관없다.

“여유 부릴 수 있을 때 많이 부려 놔. 미리 경고하건대.”

적어도 내가 본 상대 중에서 이겼다고 확신한 놈치고 사지 멀쩡히 살아 돌아간 놈은 없었거든.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유니콘이 날개를 휘젓자 강력한 토네이도가 일어났다.

습지에 있는 모든 거목을 뽑아내고도 남을 위력.

허나 지금의 나한테는 시원한 바람만도 못했다.

토네이도를 맨몸으로 뚫고, 놈의 머리에 착지한 나는 검을 쥐었다.

이윽고 검에서부터 자줏빛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권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미 끝이야.”

나는 검을 역수로 쥐곤 참격을 날렸다.

쫘아아아악!

이전까지는 들어볼 수 없는 시원한 파육음과 함께 놈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상당히 깊은 부상에 의해 나한테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잃을 터,

“그러면 남은 건 그 망할 상점만 찾으면 되는 건가.”

사실상 이번 층에서도 가장 난제라고 할 수 있는 문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상점에 가야만 했다.

성격 더러운 그 노인네한테는 받아야 할 물건이 있어서.

또 내가 잃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이걸로 끝이다.”

“크헝크헝!!”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서 검을 들어 올리자, 유니콘은 최대한 비굴한 자세와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마치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 듯이.

괴수들을 상대한 오랜 경험상 놈의 의도를 알아차린 나는 흥미로운 얼굴을 지었다.

“아, 그러니까. 상점의 위치를 네가 알고 있다고?”

“컹컹!!”

“동료들 곁에 안 아프게 보내달란 뜻이 아니고?”

“…….”

장난끼가 다분한 내 말에 녀석은 사색이 된 채로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뭘 그리 정색하고 있어. 장난이야, 장난.”

“크릉!”

내가 무신경하게 손을 흔들자, 녀석은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감에 눈을 번쩍였다.

얘도 참, 하는 짓들이 덩치만 다르지 강아지랑 다를 게 없구만.

뭐 그건 상관없고.

“거기에 멀뚱히 앉아서 뭐 해? 알고 있으면 어서 길 안내나 해.”

* * *

나는 유니콘의 등에 탑승한 채로 편하게 이동했다.

놈은 광활한 넓이의 습지대를 지나, 그 너머에 있는 거대한 절벽을 타고 더더욱 지하로 내려갔다.

나는 그 풍경을 구경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저 습지대는 얼마나 넓었던 거야? 저길 혼자서 이동하려고 했으면 이틀 밤낮은 꼬박 걸렸겠는데.”

자칫하면 혼자서 개고생만 할 뻔했네.

새삼스럽게 느껴졌지만, 녀석을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 건 신의 한 수였던 모양이었다.

은연중에 내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녀석은 객기를 부렸다.

물론 곧바로 나한테 머리를 맞고는 입을 다물었지만.

휘이잉⎯ 유니콘의 속력으로도 절벽 아래로 한참 동안 내려가던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한차례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기쁨에 들떠 중얼거렸다.

“드디어 도착인가?”

미궁에 들어와 처음 마주했었던 넓은 공동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습지대도 아닌 풍경이었다.

지면과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화끈한 열기가 이곳까지 느껴졌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익을 것 같은 화력.

나는 눈에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보며 확신했다.

‘화염 지대.’

아니, 그보다는 용암지대가 형평성에 더 어울리려나.

그나마 이전의 습지대에는 늪 이외에도 큼직큼직한 나무들이 섞여 있어서 다채로운 조화를 이뤘다면, 어딜 봐도 새빨간 용암밖에 보이지 않아서 눈이 아플 정도.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어느 지점을 보곤 멍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착시 현상인가 싶었는데,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나는 욕을 내뱉었다.

“저게 왜 저기에 있어.”

버그 걸린 거 아니지?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내가 그토록 찾고 있던 상점이 있었다.

그것도 불사르기가 사방으로 튀는 용암 위에 배처럼 둥둥 떠 있었다.

여러모로 한숨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결국 선택지는 없었다.

탑이 까라면 까는 게 플레이어의 입장인데 어쩌겠나.

유니콘과 함께 상점에 도착한 나는 문을 발로 걷어찼다.

상점의 내부에 들어서자, 노인은 상당히 놀란 눈으로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자, 자네… 여긴 어떻게….”

“여긴 어떻게? 그 말 꼬락서니를 보니까. 상점이 이딴 장소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나 봐?”

“큼큼… 오해네. 진정하게나.”

오해는 무슨 이 노인네가 드디어 노망이라도 낫나.

얼굴에 당혹스러운 티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수염에 묻어 있는 침부터 닦고 말하지.

따지고 싶은 건 많았지만, 그건 나중이다.

“네가 말한 건 전부 챙겨왔으니까. 확인부터 먼저 해.”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금화 주머니를 책상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주머니의 옆구리가 찢어지며 그 안에 담긴 금화의 일부가 흘러내렸다.

얼마나 많은 양인지 흘러내린 금화는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의기양양할 때는 언제고, 금화를 내려다보던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말한 100개보다도 넉넉하게 챙겨왔으니까 이거라면 충분하지?”

“이, 이렇게 빨리 챙겨오다니… 아… 아무렴 이 정도 양이라면 문제없을 것 같다네.”

노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노인은 눈초리를 번뜩이며 내 귀에 속삭였다.

“그런데 말이야. 사실 이것보다도 더 좋은 물건이 있단 말이지.”

그는 들고 있던 갑옷을 내팽개치곤, 창고에서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은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상자를 들고 왔다.

“이건?”

“기다려 보거라. 아직이니까.”

노인은 입꼬리를 짜악 늘어뜨린 채, 상자의 봉인을 해제했다.

있어 보이는 수증기가 틈 사이로 새어 나오며,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상자를 개봉하자, 그 안에는 새하얀 코트가 들어 있었다.

“…코트?”

내가 지닌 모든 지식을 동원했지만, 플레이어 중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류의 장비를 지닌 자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게다가 방금의 갑옷에 비하면, 과연 괴수와의 싸움에서 멀쩡히 남아 있을지 의문이 생기는 비주얼.

실망감에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자 노인은 혀를 찼다.

“끌끌, 그래서 자네가 아직까지 애송이라 불리는 거네. 곁만 볼 줄 알지 본질을 보지 못하면 쓰나. 한 번 자세하게 들여다보거라.”

그의 말대로 코트를 터치하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백룡의 갑옷(SS+)〉

〈수백 년 전에 죽은 드래곤로드의 외피로 만든 갑옷으로 어떠한 갑옷과 비교해도 비견할 수 없는 내구력을 자랑합니다!〉

〈모든 상태 이상에서 면역, 용족 친화력+100……〉

“씨발, 이게 뭐야?”

아티팩트를 확인해 보자마자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무수한 효과는 일단 둘째치고, 내 눈을 한 번에 사로잡은 것은 바로 SS+급이라는 문구였다.

탑에 들어와 지금까지 얻은 아티팩트라 해봤자 S급의 위용이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알.

당장 계란 프라이를 해 먹어도 이상한 것 없는 그것과 비교하면 완전 혜자나 다름없었다.

내가 감탄을 내지르고 있자, 노인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어떤가? 욕심이 나지 않나. 원래는 이것보다도 더 받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니 특별히 싸게 쳐주도록 하마.”

그는 음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미궁에는 오백 년 세월을 묵은 엄청난 요물이 하나 있다네. 지금까지 이름을 날린 여러 괴수들이 달려들었지만 놈을 쓰러뜨리는 것만큼은 불가능했지. 아 참 자네가 사냥한 괴수 중에 등에 날개가 달린 말과 비슷한 놈인데….”

그가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나는 검을 휘둘러 상점의 한쪽 벽면을 뜯어냈다.

쿠궁!

깔끔하게 잘려 나간 절단면 뒤로 거대한 덩치의 인영이 뜨거운 입김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놈을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아저씨, 혹시 지금 말한 놈이 이 녀석이야?”

투둑!

노인은 넋이 나간 듯 입을 쩍 벌리며 들고 있던 금화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어어… 마, 맞다네. 자네 말마따나 괴수는 저놈이라네….”

“그래? 잘됐네. 저번처럼 두 번 왔다 갈 일도 없고.”

그렇게 됐으니 이건 내가 가져간다?

나는 노인의 손에 쥔 코트를 가져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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