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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년만에 귀환한 고인물-9화 (9/175)

제9화

“그건 팁, 기다리는 동안 그거나 빨고 있어.”

그 이야기를 들은 노인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평소 그의 성격대로라면 저런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을 들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상대의 목을 베어버리고 남았을 테지만.

왠지 모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왜일까?

정말 인정하기 싫은 이야기이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같은 길을 걷은 한 명의 무인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한별이라는 사내는 이 시련마저도 간단하게 해낼지 모른다고.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기행으로는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보아온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보고 실망할 대로 실망해, 족쇄를 끊기 위한 퍼즐 맞추기식의 궤변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울뿐인 망상이랄지라도 상상은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래,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저 애송이가 성공한다면…’

노인은 문을 열고 나서는 신한별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책상에 떨어져 있는 금화를 주워 손가락으로 굴리며 굳게 닫힌 문을 지켜봤다.

문을 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텅 빈 공허함이 남아 있었다.

* * *

노인과의 대화 끝에 상점을 박차고 나온 나는 숨을 깊게 들이 내쉬었다.

“아 맞다. 그래도 옷 한 벌은 달라고 할 걸 그랬었나.”

괴수의 폭발로 인해 입고 있던 옷은 불타버린 지 오래.

그나마 괴수의 가죽을 입고 있었기에 별 신경 쓰지 않고 넘겼는데, 영감에게 가죽을 넘긴 덕분에 내 몸은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뒤늦게 든 생각에 옷이라도 받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상점은 강력한 강풍과 함께 소멸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적잖게 당황하고 있자, 시스템창이 눈앞에 생성되었다.

〈상점을 찾는 당신에게.〉

〈상점을 나서게 되면 기존에 있던 위치에서 사라집니다. 상점에 가고 싶으면 다음 미궁의 랜덤 위치에 발생하니 다음 기회를 노려보세요!〉

〈TIP. 상점에서 볼일이 끝난 게 아닌 이상, 함부로 상점을 나서는 행동은 하지 맙시다!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르니까요.〉

이미 상점을 나서고 나서 떠오른 팁에 나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저번부터 계속 저 모양인데 저거 나랑 싸우잔 건가?

여러모로 짜증이 치솟았지만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상황.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짜증을 부려봤자 의미 없는 감정 소모일 뿐이다.

탑에 천년 가까이 있으면서 깨달은 건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선 신경 쓰지 말자는 것.

아무리 땅을 치고 후회해봤자, 버스는 이미 떠났다.

그런 의미 없는 시간을 낭비할 바에는 다른 일에 시간을 투자하는 편이 맞았다.

나는 검을 어깨에 걸치고는 습지를 나아갔다.

스스윽!

내가 상점에 있는 동안, 시간은 저녁을 훌쩍 지났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왔다.

밤이 되자 온도가 영하로 내려갔지만, 이 정도 추위는 별것도 아니다.

춥지 않냐고?

“닿자마자 새파랗게 얼어붙는 추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지.”

모든 건 상대적인 법칙에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이 추위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추위 덕분에 늪지대가 얼어붙으며 움직이기 편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챙챙!

늪으로 검으로 쿡쿡 찔러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발을 내디뎠다.

해가 떠 있을 때는 움직이기 불편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적기였다.

유니콘이 제아무리 빠르다고 하더라도 내 손에 걸리면 별거 없다.

그러고 보니,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괴수도 천연기념물로 취급하던가?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생동은 불법 밀렵이려나.

순간 머릿속에서 의미 없는 의문점이 떠올랐지만, 나는 대충 신경 끄기로 했다.

뭐, 밀렵이니 뭐니 하면 어때.

이미 지구에서는 잇따라 게이트가 열리고 괴수가 전 세계를 장악하면서 인간이 희귀종이 된 지 오래다.

이른바 합법이라는 거지.

수가 더 적은 멸종위기종이 더 많은 숫자의 희귀종을 쓰러뜨린다는데 과연 누가 뭐라고 할까.

“그렇게 됐으니. 한 번 찾아볼까?”

변종 말 새끼들을 보러.

* * *

유니콘을 발견할 때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불과 1시간? 그 정도 시간이 걸렸을까.

내내 걸림돌이 되었던 늪이 얼어붙어서 기동력이 최대로 발휘한 덕분도 있었지만,

‘괴수라도 밤과 피로에는 어쩔 수 없다는 거지.’

나는 수풀 근처에 몸을 숨긴 채, 유니콘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엿봤다.

예상대로 유니콘들은 다 같이 무리를 만든 채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괴수라도 잠에 들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

이 점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유니콘들은 서로 로테이션을 돌며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이는 괴수치고는 상당한 지능을 가진 것을 보여주는 대목.

만일 유니콘을 사냥하기 위해 과감하게 뛰어들면, 불침번을 서고 있는 놈한테 걸려 나머지가 도주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

그런 결말을 맞이하지 않도록 방법을 구안해야 한다.

상당히 어려워 보이는 난이도였으나.

“간단하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끝낸 나는 손을 털며 히죽 웃었다.

요건대 핵심은 아무도 모르게 불침번을 암살해야 한단 소리잖아.

그런 거라면 바로 내 특기지.

나는 바닥에서 주먹만 한 짱돌을 주었다.

뿌드득!

오른손으로 돌을 쥔 채로 강한 힘을 주자, 돌은 엄청난 압력에 의해 바스러지며 압축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1분 정도 반죽을 주무르듯이 손바닥을 움직이자 짱돌은 손톱만 한 크기까지 줄어들었다.

마치 기계적인 요소로 제련이라도 한 듯이 매끈해진 돌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뭐 이만하면 되겠지?”

조금 울퉁불퉁한 부분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 정도 퀄리티라면 충분하다.

만일 내가 궁수나 도적 같은 직업을 골랐다면 좀 더 편하게 끝내고도 남았을 일이지만, 그런 거 하나에 투덜거리면 끝도 한도 없다.

지금 내 능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지.

나는 불침번까지의 거리를 재고는 자세를 잡았다.

내가 지닌 것은 단 한 발.

한 발에 끝내야 하기에 실수나 방심은 용납하지 않는다.

상대의 숨소리와 근육의 움직임 그뿐만 아니라 바람과 습도 등등까지도 모두 고려한다.

휘이이잉⎯

거친 모래바람이 지나고 난 직후, 바람이 멈췄다.

나는 심장 소리와 호흡마저도 최대한 죽인 상태에서 오른팔을 최대한 젖혔다.

눈을 감고 최대한 감각을 집중시킨다.

아주 미세한 바람의 흐름에서 돌의 감촉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사고가 차갑게 식자 0.1초의 움직임마저도 슬로우 카메라처럼 느껴졌다.

초인적인 감각이 절정이 다다랐을 즈음.

나는 정면을 향해 돌팔매질했다.

가공할만한 속도로 가속을 거듭한 돌은 유니콘의 머리에 직격하면서, 놈을 기절시켰으리라고 예상했으나…

콰득!!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와 함께 유니콘의 대가리가 허무하리만치 터져나갔다.

뇌척수액이 사방으로 튀김과 동시에 떨어져 나간 목덜미로부터 새빨간 선혈이 솟아오르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야말로 분수를 연상케 하는 그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침묵을 유지했다.

“…….”

아니, 토마토도 아니고 저게 왜 저렇게 쉽게 터져?

얼마나 어이없는지, 입에서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투욱!

상당한 거리를 날아 발밑에 떨어진 유니콘의 뿔을 바라보며 나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이거… 누가 봐도 조진 거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정면을 쳐다보자 유니콘 무리는 피범벅이 된 자신들의 몰골을 보며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너희들도 당황스럽나 봐? 잘됐네, 사실 나도 엄청 당황스럽거든.

이렇게 된 이상, 처음에 짠 계획도 전부 망쳤다.

그렇다면.

고민은 짧았다.

이렇게 된 이상, 무지성으로 맞붙이치는 것만큼 간단한 해결 방법은 없었다.

탓!

나는 수풀 속을 뚫고 무리를 향해 달려갔다.

얼마나 빠른지 포탄과 같은 속도.

뒤늦게 꼬리를 잡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몇몇 유니콘들이 도망치려고 했으나, 그런 놈들은 이미 늦었다.

쫘아악!

검을 횡으로 가볍게 휘두르자 유니콘들의 날개가 우수수 떨어졌다.

가장 핵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동력을 잃었으니, 저번과 같이 쉽게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놈들의 가장 거추장스러운 부분이 없어졌으니.

“이제부터는 내 시간이란 거지.”

조금 낯간지러운 대사였나?

말하고 나니 조금 후회가 들긴 했지만, 아무렴 뭐 어떤가.

상대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괴수들이다.

그리고 내 손에 곧 죽을 테니.

나는 전장을 종횡무진 움직이며 유니콘들의 급소를 찔렀다.

이어지는 내 공격에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유니콘들이 반격을 위해 이마의 뿔을 내세우며 돌진해왔다.

그 수가 상당한 만큼, 마치 라이플을 쏜 것마냥 총알이 쏟아지는 광경이었으나.

“어딜 더러운 걸 들이밀고 있어.”

손날을 휘두르는 것으로 뿔을 박살 낸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양학으로 모자라 학살에 가까울 지경.

다만 다른 괴수를 상대할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짤랑짤랑!

유니콘을 쓰러뜨릴 때마다 무수히 많은 금화가 떨어졌다.

그 뒤로는 아주 간단했다.

비장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뿔과 날개가 떨어져 나간 유니콘은 단순히 말과 다를 게 없었다.

툭툭⎯ 나는 검에 묻은 피를 떨쳐내곤 100개가량 쌓여 있는 금화 주머니를 바라봤다.

이걸로 목적도 달성했겠다.

“이제 망할 상점만 찾아내면….”

나는 말하다 말고 침묵을 유지했다.

그도 그럴 게.

쿠, 쿠, 쿠웅, 쿠우웅!

멀리서부터 강렬한 기척과 함께 지면에서부터 진동이 느껴졌기에.

이윽고 짙은 그림자가 달빛을 잡아 삼켰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가공할만한 압박감.

그만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이루 형용치 못할 정도로 괴이한 괴수가 우악스러운 이빨을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에.

등과 이마에 달린 날개와 뿔만이 놈이 유니콘이라는 존재감을 알려줬다.

튜토리얼 내에서도 온갖 괴수를 상대해봤던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버거워 보이는 생김새.

허나.

나는 100마리나 훌쩍 넘는 유니콘을 쓰러뜨리면서 얻은 금화 더미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땡 잡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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